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184
249화 분노가 끓어오르다
대무덕이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폐하.”
“음?”
그런 무덕을 본 고진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산달이 아직 남은 것으로 아오만.”
“쿨럭. 그게 아니오라.”
“일곱째였나?”
“…….”
“마나석, 아니지 정력석이 그렇게까지 효과가 좋다니.”
고개를 끄덕이는 진천을 보며 무덕은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후우. 효과가 넘치지요. 그래서 열후께서 칼을 갈고 계신다는 소식은 듣고 있으시지요?”
움찔.
듣고 있다. 심지어 서울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야한 속옷을 정성들여 매일 준비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말이다.
“누가 보면 정력석이 가장 필요한 이가 바로 폐하인 줄 알 겁니다.”
“난 아침마다 두렵다.”
진천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런 진천을 무덕이 응시했다. 진천이 자신의 갑주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내 남자의 상징이 갑주마저 뚫고 나올까 봐.”
“알겠습니다.”
“진짜요.”
“예. 그리 알겠습니다.”
“진짜란 말이다!”
“예.”
왠지 진 듯한 느낌에 자괴감을 느끼는 진천에게 무덕이 여기에 온 이유를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리팔! 그가 살아 있었습니다!”
“그리팔?”
“예!”
“그 고지식하면서도 입만 산 영감?”
무덕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여간. 그가 연락을 해 왔습니다.”
“그랬군. 무어라 하던가.”
“자신이 쓸모가 있다면 나라 잃은 백성에게 새로운 나라를 구해주라 하더이다.”
무덕의 말에 진천이 입을 닫았다.
이어 쓴 웃음이 달렸다. 나라 잃은 백서이란 말 때문이었다.
“동병상련인가.”
한때는 나라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뇌들의 무능과 다툼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리팔의 상황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성들과 함께하는가?”
“그렇다 하옵니다. 수만에 이르는 백성들을 이끌고 있다 하더이다.”
“직접 가려함인가?”
“제가 쓰자고 한 이입니다. 제가 데리러 가야지 않겠사옵니까?”
“울절에게 알리게. 그리고 다녀오게나.”
“알겠나이다.”
진천의 명령에 무덕이 환한 얼굴을 하였다. 막사를 빠져나가는 그를 보며 진천이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전술지도를 보며 말을 이었다.
“……바쁜 고윈의 자리를 때우면 되겠군. 좋군.”
귀찮은 일을 하나 덜었다는 표정을 짓는 진천이었다.
***
“어허허허!”
그리팔 파샤 후작이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자 막사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놀라 그에게 다가왔다.
“후작님! 무슨 일이시옵니까!”
“아, 아니네. 갑자기 오한이…….”
뭔지 알 수 없지만 악몽을 꾼 것 같았다. 마치 커다란 물레마퀴 같은 곳 안에서 죽도록 뛰는 그런 꿈이었다.
“클, 다리도 없거늘.”
비어져 있는 다리를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좀 쉬셔야 하옵니다. 최근 시에라 제국 정찰대의 동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전에는 그냥 지나치던 이들이 최근 들어 부쩍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으으음.”
사실 운이 좋았다.
적들이 무시할 만한 수준이기에 살아남은 덕도 컸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는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 먹기 좋은 떡처럼 보일 것이니 말이다.
안 그래도 끌어가기 좋은 포로들이 한데 모여 있으니 다른 생각이 들 만도 했다.
거기에 왕도까지 결국 돌파를 했으니 터그람 왕국을 몰락시키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문제인가.”
그리팔 후작이 고개를 내저었다.
서신이 지금쯤은 당도했을 것이다. 그 답을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 되었다.
“어찌 할꼬.”
고민이 길어지는 밤이었다.
***
무너진 왕도를 뒤로하고 남하하던 시에라 제국은 한차례 숨을 돌리고 있었다. 급격히 몰아치다 보니 보급선도 좀 길어졌고, 병사들의 피로도도 꽤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는 터그람 정벌의 끝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도에서 피신한 병력과 이전 전선에서 후퇴한 병력들이 모두 또아리를 트고 있는 곳만이 남은 것이다.
그 숫자만 해도 물경 십만을 족히 넘어섰다.
무시 못할 숫자였다. 거기에 소울아머 유저도 닥닥 긁어모았는지 듣기로는 서른 가까운 인원이 모여 있다는 첩보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프라임 론 아가드 공작의 이목을 잡아끄는 것은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그리팔 후작이 살아 있는 듯하다?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인가?”
“예. 후방 보급선을 유지하는 정찰대로부터 들어온 첩보인데 터그람 왕국의 백성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퍼지는 모양이옵니다. 폐허가 된 영지에서 탈출해 떠돌이가 된 백성들이 특정 지역으로 몰리고 있는데 그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돌았다 하옵니다.”
“그리팔이 살아 있다? 그리팔이?”
프라임 공작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머금었다.
“정찰 결과는 어찌 되는가.”
프라임 공작이 묻자 보고를 올리던 참모는 취합한 정보와 첩보를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일단 그리팔 후작의 존재 자체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솔직히 가능성은 꽤 높게 보고 있사옵니다. 우리가 남하를 결정한 이후 터그람 왕국의 요지를 지키던 귀족들은 죽거나 왕의 뒤를 따라 후퇴했습니다.”
“그렇지.”
“그런데 패잔병은 물론이고 백성들이 한 곳에 몰릴 정도의 구심점이라면 그리팔 후작이 아니고서야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그렇겠군.”
“확인된 피난민만 사만에 가깝다 하옵니다. 물론 그중에 적의 병력은 오천이 좀 넘어가는 것으로 파악이 된 것으로 보아 패잔병 그 이상의 병력은 아닌 것으로 확인되옵니다.”
“사만. 사만이라. 꽤 많이 모였군.”
프라임 공작의 말에 참모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굳이 터그람 왕국 지역을 뒤지지 않아도 끌어올 수 있는 포로가 한 곳에 뭉텅이로 모여 있는 것이나 다름없사옵니다.”
“흐음.”
“다만 저들도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챘다고 봐야 하옵니다. 이미 정찰대에서 몇 번의 조우는 있었습니다만 그간 별도의 전선을 형성하지 말라는 지시에 따라 별다른 충돌은 없었습니다만…….”
“그 정도 숫자라면 지키기 힘들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아는 내용일 것이고.”
“예.”
참모가 프라임 공작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일반 백성이라 하지만 카말 왕국 쪽으로 넘어가기라도 하면 낭패겠지.”
“설마 카말로 가겠습니까? 차라리 필리어리라면 모를까.”
“지역적으로 그쪽이 가깝지 않겠나? 그리고 그리팔 후작이라면 차라리 그쪽을 택할지도 모르지. 자네처럼 생각하는 이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프라임 공작의 말에 참모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탓하는 게 아니야. 그리팔 후작이라면 그렇게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지.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까.”
프라임 공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그라졌다.
“어찌할까요.”
“잡아 오라 하게. 후방에 그 정도 병력은 충분하겠지?”
“이쪽으로 합류중인 지원 병력이 약 이만 정도가 있습니다.”
“그리 붙이게나.”
프라임 공작의 명령에 참모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이만 전부를 말이옵니까? 실제 적의 병력은 오천에 불과하옵니다. 크게 잡아 주어도 육천 정도일진데, 어찌…….”
“갑주를 벗기고 백성들의 옷을 갈아입히는 정도만 해도 숫자는 숨길 수 있는 일이네, 그리고 구심점이 있는 백성은 구심점이 없는 정예 병사들보다 나은 법이지. 만약 그리팔이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지.”
프라임 공작의 말에 참모가 고개를 다시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당하고도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러하오면 터그람 왕을 잡는 건 잠시 보류하는 것이옵니까?”
“조금 늦어진다고 해서 나쁠 게 있나?”
“그럼 그리팔 후작을 찾으면 압송해 옵니까?”
참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프라임 공작이 그리팔 후작을 탐냈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기에 조심스럽게 물은 것이다.
“나도 자존심이 있지.”
프라임 공작이 서늘한 음성을 뱉었다.
“그럼?”
“퇴짜를 맞은 것도 모자라 싸대기까지 맞았네. 더는 구애할 필요도 없지.”
참모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겁게 다 끌고 올 필요 없이 대가리만 때어 오라 하게. 터그람 왕국의 마지막 공성에 깃발 대신 매달 것이니.”
프라임 공작의 명령에 참모는 화색을 띄우며 대답했다.
“그리하겠나이다!”
그들도 그리팔 후작에 대한 원한이 깊다.
참모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도 그렇고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터그람 왕국 정벌도 그 때문에 개판이 되었으니 말이다.
“참. 그리고 황도는 어떻든가?”
황도의 상황을 묻자 참모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북방의 잔여병력을 빼서 내린다 하옵니다.”
“북방? 황도의 귀족들이 썩어넘치게 데리고 있는 병사들은 어쩌고?”
“북방은 지금 위험도가 낮으니 퇴역병사를 중심으로 한 징병을 통해 해결을 하고 그들로 하여금 북상하는 두 무리의 예봉을 꺾으며 각기 필리어리 왕국과 카말 왕국으로 진격해 나간다는 작전이라 합니다.”
“쏜튼은 그걸 듣고 멍청이처럼 있었다던가?”
“입지가 많이 안 좋아졌습니다. 황도 귀족들의 병력으로 하여금 최대한 빨리 막아 내야 한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참모의 보고에 프라임 공작이 조소를 지었다.
“우습게 보이나 보지? 가우리라는 놈등리.”
“그건 아닙니다만 비밀병기를 적극 활용한다 하옵니다.”
“그걸 적극 활용하면 사방이 시끄러울 건데? 일루이먼 부흥군 문제로 엉덩이가 가벼워진 놈들이 꽤 된다고 들었건만.”
“차라리 이참에 더 걸러 내자는 목소리도 있사옵니다.”
참모의 보고를 듣던 프라임 공작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큭! 크하하하핫! 푸하하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며 막사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앞에 있던 참모의 얼굴은 웃음소리에 점점 뒷걸음질 치며 해쓱한 표정을 지었다.
단지 웃음소리라 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기운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흐흐! 이제 다 왔다 이건가? 남부만 정벌하면 대륙 일통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하는 건가? 푸하하하! 이 상황에서도 내가 두려운 건가보구나!”
쩌렁하게 울리는 웃음소리에 섞여 나오는 말소리에 살기가 점점이 묻어 나왔다.
“하하하하하!”
그렇게 크게 웃던 프라임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한풀 꺾인 음성으로 한마디 툭 하고 내던졌다.
“써글 놈들.”
그는 더 이상 웃지 않고 있었다.
반개한 눈은 무엇을 바라보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 안에 이글거리는 분노쯤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쏜튼에게 서신을 보내야겠어.”
“쏜튼 백작에게 말입니까/”
“그래. 술법사를 부르게. 서신은 내가 직접 작성하지.”
웃음기가 지워지고 은은한 노기만 남은 프라임 공작의 말에 참모는 등줄기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말이 많기는 했다.
너무 대놓고 프라임 공작을 견제하는 것 아니냐고.
그러면서도 프라임 공작은 항상 웃어넘기기만 하여 일부는 속이 터진다고 했었다. 그런데 왠지 지금 프라임 공작은 이전처럼 쉽게 넘길 것 같지 않았다.
뭔가 터지기 직전의 화산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