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188
253화 조잡함 뒤에 숨은 큰 그림
뭔가 날아온다 싶어 방어술을 펼쳤지만 그에 막힌 것은 화살들 뿐이었다. 잿가루는 바람을 타고 그대로 시에라 제국 병사들의 눈가로 스며들었다.
“억!”
“재, 잿가루다!”
잿가루 자체는 큰 살상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잿가루에 눈이 감겨진 사이 바닥에 여기저기 파 놓은 작은 구덩이를 피하지 못한 병사들이 여기저기 비틀거리거나 자빠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대열이 흐트러진 탓에 방어술이 제대로 방어를 못하는 구역이 많은 덕에 일부 병사들이 그대로 그리팔 후작 병사들이 쏘아 낸 화살에 맞아 사상자가 늘어났다.
“이 상황에서도…….”
윌리 백작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백작님!”
앞쪽에서 기사 하나가 달려왔다. 이를 악물은 것이 뭔가 분한 표정이었다.
“뭔가!”
“놈들이 우리가 쏘아 보낸 화살을 수거해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뭐?”
화살이 다 똑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거푸집의 차이도 있고 만드는 재료나 양식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빌어먹을!”
기사가 내민 화살대를 본 윌리 백작이 욕설을 뱉어 내었다.
딱 봐도 이번에 새로 보급 받아온 화살대였다. 이전에 보급 받던 물건은 가우리 덕분에 차단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받은 물건은 황도 북부 쪽의 산지에서 제작해서 가져온 것이라 차이가 좀 있었다. 게다가 이건 프라임 공작이 이끄는 병력에는 아직 지급되지 않은 물건이었다.
즉 이건 지금 그들이 쏜 것을 활용했다고 봐야 했다.
물론 전투 중에 화살이 떨어지면 재활용을 하기도 하지만, 기사가 달려올 정도라면 단순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
“지금 쏘아지는 화살의 대부분이 우리가 쏘아 낸 것들입니다! 처음 저들이 쏜 것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빌어먹을 놈들에게 화살만 잔뜩 안겨준 꼴이군. 보나마나 안쪽으로 쏘아낸 화살은 별 의미가 없었을 거고.”
이것만 봐도 적들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윌리 백작이 이를 갈았다.
“화살공격은 절벽 쪽으로 제한하라!”
윌리 백작의 명령이 곧 궁수대로 전달되었다. 생각해 보면 적들의 보급이 원활할 리가 없었다. 패잔병들에게 보급이란 것은 그저 전장 주변에서 주워 모은 것이 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적인 전투를 예상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쪽에서 화살공격을 멈추자 날아드는 적의 공격 중 돌멩이의 비율이 확 올라갔다.
“빌어먹을.”
괜한 무기만 적에게 쥐여 준 것 같아 씁쓸했다. 그 사이 병사들은 차근차근 적 진지로 나아갔다.
돌멩이도 맞으면 타격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갑주로 무장한 병사들이다.
화살공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달려가는 병사들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마치 조잡한 함정 등에 당한 것이 화가 난 듯했다.
“적들이 빠르게 몰려옵니다.”
“그렇구먼.”
그리팔 후작이 병사의 등에 업혀 적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높이에 미치지 않던 적의 화살들이 이제는 절벽 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부 병사들이 낙하하는 화살에 등판 등을 맞아 비탈에 굴러 떨어졌다.
화살을 가져다주고 내려가던 백성 중 일부도 화살에 맞아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 코디 남작과 그리팔 후작의 눈이 마주쳤다.
초조한 표정의 코디 남작아게 그리팔 후작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코디 남작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외쳤다.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라! 아직 때가 아니다!”
“고개 숙여! 죽고 싶어?”
여기저기서 악다구니를 외치는 기사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패가 없으면 나무판자를. 나무판자가 없으면 대충 나뭇가지에 넝쿨을 엮은 조잡한 방패를 들어 적들의 공격을 맞아 가고 있었다. 던져대던 돌멩이도 더는 던지지 않았다.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적들의 돌격을 허용하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시에라 제국 병사들의 함성이 마치 바로 옆에서 지르는 것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실제로 일부 적병은 수십 걸음도 채 안 되는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때 그리팔 후작이 외쳤다.
“쏘게!”
쩌렁쩌렁한 외침이었다.
어디서 그런 큰 목소리가 나올 힘이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이어 코디 남작이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외쳤다.
“준비이이이!”
그러자 여태 몸을 숨기고 있던 궁수들이 화살을 활에 재고 일어섰다. 그런데 활을 든 이들이 그들뿐이 아니었다. 궁수가 아닌 병사들도 활을 들었다. 심지어 일부 백성들까지도 활을 들어 화살을 시위에 먹이고 있었다.
이어 코디 남작의 외침이 이어졌다.
“일제히 쏴라아!”
그와 동시에 너나 할 것 없이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 하늘로 솟구쳤다. 화살들 일부는 제대로 앞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옆으로 튕기듯 날았지만 대부분 화살들은 무사히 하늘로 몸을 띄웠다.
“억!”
윌리 백작이 단말마를 외쳤다.
기습이었다. 어느 정도 화살공격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이건 어느 정도라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수천 발은 족히 되어 보이는 화살이 일시에 솟구쳐 오른 것이다.
술법사들이 서둘러 방어술을 펼쳤지만 상황은 심각했다. 특히 선두를 달리던 병사들의 상황이 가장 안 좋았다.
퍼퍼퍽! 퍼퍽!
한 번에 대여섯 대의 화살이 몸에 틀어박힌 병사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달려가던 힘을 이기지 못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주변의 병사들도 다르지 않았다.
작게는 두세 대 많게는 서너 대의 화살이 몸에 박혀 왔다. 마치 단체로 줄에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우수수 나자빠진 것이다. 날아오던 돌멩이도 줄어들자 잠시 방심한 탓이 컸다.
거기에 코앞이 적의 방책이다 보니 약간 흥분한 것도 있었다.
“무, 무슨 궁수가 저렇게 많아!”
“억!”
일부 방패를 소지한 병사가 쭈그리고 방패 뒤에 앉아 질린 얼굴로 외쳤다. 그때 옆에서 달리던 병사가 몸에 화살을 맞고 비명을 내질렀다.
“어억!”
“빌리!”
동료였는지 안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화살을 맞으며 쓰러진 사내가 벌떡 일어서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괘, 괜찮아!”
“어? 어!”
이내 방패를 들고 다가와 함께 몸을 피한 동료의 걱정에 가슴팍에 박힌 솨살에 손을 가져갔다.
뽁.
너무도 쉽게 뽑히는 화살. 가죽 갑주의 거죽에 간신히 틀어박힌 화살이었다.
“뭐, 뭐야?”
순간 빌리라 불린 병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궁수가 쏜 게 아니야!”
주변을 살피니 몇몇 병사들은 온몸에 화살을 박은 채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달리는 와중에 화살 일부가 툭하니 떨어지기도 했다.
“젠장 거리가 짧잖아! 궁수가 아니어도 활시위만 당길 줄 알면 할 수 있는 거였어!”
빌리라는 병사가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쏟아지는 화살 중 일부는 힘없이 떨어지기도 했고, 터무니없이 짧은 거리임에도 제대로 날아오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다.
“당했다…….”
그럼에도 너무 가까웠다. 그리고 날아오는 화살은 말 그대로 개나소나 쏘아 대었다 할 정도로 많았다.
“와아아아아아!”
그리팔 후작의 병사들과 백성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승리는 아직 요원했지만 자신들의 손으로 이루어 낸 성과에 기세가 오른 것이다.
“와하하하!”
그리팔 후작을 업고 있던 병사도 흥이 돋았는지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기고만장하게 달려오던 시에라 제국 병사들이 말 그대로 짚단 쓰러지듯 우수수 쓰러지는 모습이 통쾌했던 것이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리팔 후작의 입가에도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동안 패배한 전장을 떠돌며 모은 것 중에는 활들도 많았다. 처음에는 무기로 쓴다기보다는 혹여 장작이라도 쓸까 해서 모았던 것들이었다. 상당수는 시위도 끊어진 것들도 있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활을 든다 해도 쓸 만한 궁수가 되려면 수년의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시위를 당기고 놓아봐야 제대로 날아가는 것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무언가를 노리고 쏠 필요가 없었다. 단순한 일제사였다. 거리도 길게 볼 필요가 없는 일제사.
오천 명 중에 궁수는 오백여 명 정도. 그 외에 활 좀 만져 본 병사까지 합쳐 천오백이 안 되었다. 그런데 활의 개수는 삼천 개가 넘었다. 시위가 끊어진 활까지 합치니 오천 개가 넘어갔다.
어차피 멀리 쏠 것도 아니었고 많은 화살을 날릴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화살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이다.
처음 화살을 날리고 적의 화살을 이용해서 싸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적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원거리 투사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닥치고 돌격이다.
그렇게 끌어들이고 끌어들인다.
지척에까지. 그리고 각자 두 개에서 세 개씩 돌아가는 화살을 한번에 쏟아붓는 거다.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펼쳐졌다.
“족히 삼천은 전투불능에 빠졌사옵니다!”
코디 남작이 환한 얼굴로 외쳤다.
이만에서 삼천이란 숫자는 결코 적은 게 아니다.
단 한 번의 일제사로 이 정도 숫자가 쓰러졌다는 것은 엄처난 타격인 것이다.
구덩이를 판 것도 재를 뿌린 것도 대열을 흩트리기 위한 것이다. 화살을 날리지 않은 것도 적들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유도한 것이다.
대열이 더 빨리 무너지게 만든 것이다.
사기가 오르자 다시 이쪽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다시 돌멩이가 날아갔다.
“완전 농락당했군.”
빌리 백작이 이를 악물었다.
당하고 나니 그림이 그려졌다. 조금 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심 천하의 그리팔도 수단이 없으니 저항하는 방법도 조잡하구나 싶은 마음도 일부 들기도 했다.
이게 전부구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수천의 병사가 한 방에 무력화 되고 나니 소름이 끼쳤다.
조잡하다 싶었던 것이 이 순간을 위한 큰 그림이었던 것이다.
그리팔은 역시 그리팔인 것이다.
“이, 일단 병력을 물릴까요?”
참모가 질린 얼굴로 물어 왔다. 정신이 없는 것이다. 그런 참모를 보고 한숨을 쉰 빌리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리팔이 원하는 게 그거다.”
“그, 그럼?”
“밀어붙여!”
“하, 하지만 화살이 더 날아오면 위험합니다!”
“방패병을 내세우면 되잖아! 방패병 중심으로 소수 병력끼리 뭉치라 해! 공성전 훈련 안 했나!”
그제야 참모는 정신을 차린 듯 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낮은 방벽이라 생각하지 말고 성벽이라 생각하란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도 죄다 함정이야!”
수레 등으로 만들어놓은 방벽. 간신히 성인 키를 넘겨 놓은 그것이 방심을 불렀다.
깃발이 움직이고 다시 뿔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충격에 빠졌던 시에라 제국 병사들이 군데군데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패들이 전방으로 그리고 머리 위로 올려졌다.
그 모습이 마치 수많은 새끼 거북이들이 바다로 몰려 나가는 꼴 같이 보였다. 속도도 느리고 뽈뽈거리는 것이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더는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병사들은 없었다.
그렇게 확실하게 조금씩 압박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