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204
269화 후회없다
수많은 시체들이 쌓였다. 여기저기 개마기병들의 시신들이 눈에 띄였다. 물론 후회는 없었다. 적들의 시체는 그보다 몇 배는 많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목적은 이미 달성했기에,
“아쉽긴 하구나.”
프리어의 표정에 회한이 어렸다.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나 천여 명의 기병을 이끄는 장수가 되었다. 그것도 그냥 기병이 아닌 가우리 군의 꽃 개마기병이었다.
언제나 든든했던 동료들이 상당수 주검이 되어 있었다. 이 상황에 아쉬운 것은 더는 달리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삶에 대한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여기서 죽더라도 가족은 평안할 것이다.
슬퍼할지언정 그들은 나라의 보살핌을 받을 것이다. 전사자의 가족은 나라가 보살펴 준다.
주변의 존경을 받는다.
이미 보아왔던 모습이었고, 자신이 죽는다 해도 남은 가족들은 똑같은 존경과 보살핌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쉬워도 미련은 없었다.
이미 남는 순간 삶에 대한 미련은 두고 왔기 때문이었다.
“크아아압!”
한쪽에서 또 다른 동료의 외침이 들려왔다. 몸통에 적들이 내지르는 창을 세 개나 박고도 오히려 나아가며 환두대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거기에 걸린 시에라 제국 병사의 목이 반쯤 잘려 너덜거리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거기까지였다.
환두대도를 쥔 팔이 잘려나갔다.
다른 쪽 팔은 이미 잘려나가고 없었다. 동료병사를 죽인 탓인지 팔도 없는 개마병사를 대하는 적들의 손은 자비가 없었다.
“풉!”
순간 웃음이 나왔다. 전쟁터에서 자비 운운하는 자신이 웃겼던 것이다. 이제는 성한 이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다. 주인 잃은 전마들은 이리저리 흩어졌고, 일부 퓨마들은 주인의 시신 옆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아마도 주인을 따라 맹렬히 따라 싸웠을 것이다. 그 주변마다 온전치 않은 시체들이 여럿 있는 것을 보니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짝! 짝! 짝!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적이지만 솔직히 칭찬할 수밖에 없게 만드네.”
“그리그라 했소?”
“맞아. 이런 말하는 놈들 평소에 병신 같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할 줄은 몰랐네. 사람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고맙소.”
프리어가 짧게 화답하자 말을 건네었던 그리그가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고맙다니 더 할 말 없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열 내고 해야 하는 거 아냐?”
“강자가 해주는 예우만큼 기분 좋은 것은 없소.”
“이쪽 지휘관 맞나?”
“가우리의 대형 직위에 있는 프리어라 하오.”
프리어의 말에 그리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이 뭔지는 모르겠고. 일단 이름은 프리어라 부르는 것 같기는 하군. 정말 칭찬해 주고 싶은 건 그거야. 목적에 충실한 전투를 수행했다는 점.”
그리그의 말에 프리어는 미미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했기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너 우리편 할래? 나 정도면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다 살려 줄 수 있을 건데.”
그렇게 말하며 이제는 수십에 불과해 보이는 개마기병을 둘러보았다. 물론 그 수는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하나둘씩 줄어들었다.
“제의는 감사하오.”
“뭐, 예상은 했지만…….”
그리그가 입맛을 다셨다. 탐이 났다. 자신들이 가르친 노블기사단보다는 실력이 떨어지지만 볼수록 매력있는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먼저 간 친구들을 볼 때가 된 것 같구려.”
“딱딱하긴. 하기사 좋은 밥먹고 자란 뼈대있는 놈들이 다 그렇지.”
“화전민의 아들이오.”
“오! 출세했네?”
“아마 여기에 쓰러진 대부분이 비슷할 거요.”
순간 그리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화전민 출신으로 만들어 낸 부대가 이렇게 강하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리그 역시 출신 성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프라임 공작이 제자를 들일 때 그 출신을 따지지 않았었다고 봐야 했다.
솔직히 자신은 운이 좋은 것이다. 그 출발에 따라 어떤 대우를 받고 사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운이 좋다고 하기도 뭐하네.”
그리그의 솔직한 대답에 프리어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운이 좋은 것은 맞소.”
“그런가? 어떤 것이?”
그리그의 질문에 프리어가 활짝 웃음을 지었다.
“가우리의 백성이 된 순간부터.”
“허?”
“이 순간까지 모두가 다.”
정말 밝게 웃었다. 여태 딱딱해 보이던 것과 달리 정말로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다. 반대로 그리그의 얼굴은 지금까지와 달리 딱딱해 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했다.
지금 싸우고 있는 시에라 제국 병사들을 상대로 자신의 질문에 저런 대답이 나올까 생각을 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답은 ‘아니다.’ 였다.
아니 기사들을 잡고 물어보면 비슷한 대답을 이끌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답이 저렇게 진심처럼 느껴질 수 있을까.
역시 아니다.
소름이 끼쳤다. 카버라는 곳에서 온 마법사들은 가우리의 군병들을 전쟁광들이라 했다. 하지만 단지 전쟁광이라서 저런 표정이 나올 수는 없었다.
“뭐 이런 적을 만든 거지?”
그리그가 솔직한 대답을 했다. 프리어는 그저 웃고 있었다.
“묻지. 너 정도면 꽤 실력이 있는 편이겠지?”
“나름 나쁘지 않소. 적어도 이들을 이끄는 수장이니까.”
“그럼 그 실력 좀 가늠해 볼까?”
그 말을 끝으로 그리그가 나아갔다.프리어 역시 자신의 애마에서 내려섰다. 투레질을 하며 흉포한 모습을 보이는 퓨마를 프리어는 도닥여 주었다.
“먼저 나아감을 이해해다오 전우여.”
“큐히힝!”
분기에 찬 퓨마의 외침이 울려퍼졌다. 그러나 더는 난동을 피우지 않았다.
그저 걸어 나가는 프리어의 뒷모습을 볼 뿐이었다.
먼저 달려든 것은 프리어였다.
“으아아압!”
달려들며 환두대도를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동시에 그리그의 쌍검 중 하나가 환두대도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하지만 프리어는 그대로 나아가는 힘을 이용해 그리그가 휘두르는 다른 쪽 칼을 쥔 팔을 몸통으로 튕겨내었다.
“호?”
과감한 방어에 그리그가 감탄이라도 한 듯 짧은 탄성을 터트렸지만 이내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리 한쪽으로 휘감겨 오는 것을 느꼈다. 몸통으로 그리그의 팔을 튕겨내는 것과 동시에 몸을 숙이며 다리를 휘감아왔던 것이다.
“잔재주를!”
그리그가 빠르게 발을 뒤로 뺐다. 그러나 그리그는 다시 몸을 옆으로 빼며 몸을 피해야 했다.
콰앙!
다리를 잡는데 실패한 프리어가 그대로 고개를 숙이더니 몸을 맴돌며 다리로 그를 내리찍으려 했었던 것이다.
프리어의 뒷꿈치가 크게 한 바퀴 돌아 땅을 찍어내는 소리가 꽤 크게 울려왔다.
중무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래도 땅에 주저앉은 듯한 자세는 꽤나 빈틈이 많았다. 그런데 달려가기에는 모호했다.
쾌랙!”
발 뒷꿈치가 땅을 파헤치는 것과 동시에 프리어가 허리춤에서 뿌려낸 손도끼가 요란한 파공음을 내며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하, 이거 미치겠네.”
그리그는 그가 날린 손도끼를 피하지 않았다.
그가 뿜어낸 푸르른 소울포스에 튕겨 나갔기 때문이었다.
프리어가 던진 손도끼의 위력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그를 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나아가지 못했던 것은 그 손도끼가 교묘히 시선을 가리며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잠시 움직임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아마 큰 피해를 주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뿌렸던 것이 맞았다.
“심할 정도로 실전적이네.”
그리그의 평가를 받는 프리어의 이마에는 이미 굵은 땀방울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다. 이 간단해 보이는 동작을 하면서도 기력을 꽤나 쏟은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미 오랜시간 전투를 벌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 한번 받아줬으니 이제 막아봐.”
그리그가 히죽 웃더니 쌍검을 휘둘러 왔다. 순간 프리어의 이가 악물어졌다. 미친 듯이 날아드는 두 자루의 칼은 마치 수십 개의 칼날이 휘둘러지는 느낌마저 들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가가각! 카각!
수십 개의 불똥이 튀었다. 사이사이로 핏방울이 비산했다. 이음새가 잘려나간 찰갑의 비늘이 이리저리 튀었다.
그러나 프리어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나아갔다.
카아앙!
그리그의 칼을 막은 환두대도가 밀려나가다 못해 프리어의 어깨를 찍었다. 다른 칼은 어느새 뽑아든 손도끼를 들어 막아보았지만 무리였는지 도끼날과 그의 팔뚝 아래가 날아가 버렸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프리어는 남은 상박을 이용해 나아가며 그리그의 칼을 쥔 손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그대로 앞으로 날렸다.
콰직!
“크으!”
회심의 박치기는 먹히지 않았다.
대신 그리그가 칼 한 자루를 손에서 놓게는 만들 수 있었다. 왜냐면 겨드랑이에 끼었던 칼을 놓고 그대로 박치기를 시도하는 프리어의 관자놀이를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미치겠다.”
비틀거리면서도 환두대도를 휘두르는 프리어를 보며 그리그는 혀를 찼다. 항상 그의 몸과 같던 칼을 손에서 놓게 만든 것은 스승인 프라임 공작을 빼고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으아아압!”
비틀거리던 프리어가 다시 나아갔다.
위에서 아래로 그어지는 녀리치기.
그리그의 남은 칼 한자루가 그걸 막았다. 아니 오히려 잘라내려 소울포스를 끌어올리며 사선으로 내리쳤다.
카가가각!
시뻘건 불똥이 튀며 두 자루의 무기가 마찰을 했다.
“안 잘려?”
그리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소울포스가 넘실거리는 칼로 내리쳤거늘 상대의 무기가 잘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힘을 누르고 내려왔다.
까드득!
물론 거기까지였다.
그리그의 어깨 어림까지 내려오던 그의 환두대도가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한계였다.
“뭐, 잘 싸웠다.”
그리그가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 던졌다. 프리어가 웃었다. 그런 프리어의 가슴팍에 그리그가 칼을 박아 넣었다. 평소 쓸 일이 없이 장식처럼 들고 다니던 단검이었다.
프리어가 주저앉는 순간 뒤쪽에서 지켜만 보던 퓨마가 괴성을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마치 둘 사이의 싸움이 끝났으니 이제는 내 차례라는 듯.
“너도 전사구나?”
그리그가 픽하니 웃으며 달려드는 퓨마의 목을 잘랐다. 반쯤 목이 잘려 비척이던 퓨마가 그르렁거리더니 몇 걸음을 더 걸었다.
가슴에 칼이 박혀 무릎을 꿇고 숨을 거둔 프리어의옆이다. 그 앞에 풀썩 주저앉더니 머리를 기댄다.
그리고는 더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리그가 중얼거렸다.
“이겼는데 별로 기쁘지가 않네.”
그리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찝찝한 전투였다.
***
저녁이 되자 각 병력의 피해상황이 집계되었다.
다섯 개로 나뉜 병력 중 한 개 빼고는 피해가 적었다. 피해를 입은 하나의 병력은 약 이천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였다.
“후우. 죄송합니다.”
이실라 공주가 면목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하나의 갈래는 카말 왕국군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던 병력이었다. 카말 왕국과 가우리의 연합 원정이었기에 카말 왕국군에게도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뜻밖의 습격을 당했던 것이다.
물론 희생자는 카말 왕국군이 아닌 개마기병들이 다수였다. 그들이 길을 열면서 많은 수가 희생을 입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