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217
282화 도적 오만!
무덕과 그리팔을 보내고 난 뒤 파야칸인 쿠라한과 남은 티부르 황제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이거 생각해 보니 말하고픈 건 다 잊어먹었구먼.”
“끙. 그렇습니다.”
쿠리한도 신음성을 흘렸다.
어차피 동맹을 맺기 위해 온 것으로 알고 있는 이상 적당히 밀고 당기며 받을 게 얼마나 되는가를 계산해 보려 했었다. 그러나 황당하다 싶은 그들의 제의에 그런 생각은 훌훌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어찌 생각하는가.”
티부르 황제의 질문에 쿠리한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생각이 복잡해진 것이다.
“분명 시에라 제국이 꽤 피곤한 상황이긴 합니다만…….”
“그렇긴 하지. 그러나 지금 꽤 병력이 모이고 있다는 걸로 아는데.”
“지금까지 오십만 이상이 모였습니다. 아직도 중앙으로 움직이는 병력이 있어 최종적으로 약 백만 정도까지 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허…….”
백만이라는 숫자에 티부르 황제가 혀를 찼다.
‘언제든 백만대군을 움직일 수 있는 나라가 시에라 제국이다.’
이런 말은 항상 있어왔지만 실제 그 정도의 병력이 움직였던 적은 없었다. 그 정도의 숫자가 아니어도 정복전쟁을 무리없이 수행해 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백만이 모이려 하고 있었다.
“한 번에 밀고 내려오려나 보구먼.”
“아무래도 그럴 모양인 듯 합니다.”
투먼 제국도 초원의 부족들과 병사를 모으면 한 오십만은 가능했다. 어차피 집안의 남성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에 익숙한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초원이라는 배경은 그게 가능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 병력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다는 점이다. 사내들을 닥닥 끌어 모으는 것이기에 그 전쟁의 성과에 따라 제국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거기에 각자에 흩어진 이들을 끌어 모은 것이기에 전술적인 움직임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도 약점이었다.
물론 시에라 제국도 백만은 쉽지 않은 모집이었을 것이다. 신병의 비율도 높을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전술적인 움직임에 능한 지휘관이 있어 숫자만큼 파괴력을 줄 수도 있었다.
새삼스럽게 시에라 제국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언젠간 이 땅도 넘보겠지?”
“그건 모르옵니다. 솔직히 먹을 게 없는 땅이잖습니까.”
“어차피 알지 않은가. 남부가 평정되면 그 다음은 우리 쪽이는 걸 말이야.”
“백만이 쳐들어와도 막을 수 있습니다. 초원은 우리 편입니다.”
“그렇겠지. 그러나 그 백만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면? 야금야금 먹어 들어온다면?”
티부르 황제의 말에 쿠리한이 입을 다물었다.
초원을 방패삼는다면 백만이라도 막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가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후 시에라 제국이 무리해서 진격해 온다면 그때는 장담이 어렵다.
그게 아니더라도 티부르 황제의 말처럼 조금씩 장악해 온다면 야금야금 먹히다가 몰릴 것이 뻔했다.
“우리도 준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없는 상황에서도 준비는 하고 있었다.
투먼 제국이 바보도 아니고 시에라 제국이 언젠가는 그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쯤은 잘 안다.
그렇기에 기회를 보며 자웅을 겨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막느냐 먼저 치느냐인데…….”
솔직히 지금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정말 그들의 말대로 시에라 제국을 집어삼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시에라 제국이 유례없는 병력을 모으는 것만 봐도 남부 동맹군이 꽤나 선전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거기에 또 북방의 병력이 조금씩이지만 순차적으료 교체되고 있다는 점도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 교체된 병력이 어디로 갈 지는 뻔했다.
바로 남부정벌을 위해 쓰일 것이 뻔했다. 왜냐면 북부를 경계하며 단련된 정예를 이런 상황에서 썩힐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방비에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
차고 빠지기에 능한 투먼 제국의 전사들을 신병들로 쉽게 막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폐하, 우리가 준비를 하면 아마 시에라 제국도 눈치를 챌 것입니다. 그것도 염두하셔야 하옵니다.”
이쪽이 시에라 제국의 상황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이쪽의 상황을 항상 살피고 있었다. 시에라 제국의 첩자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일단 전쟁을 준비하면 보급이 움직인다.
일이만 가지고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충분한 병력이 있어야 했고 그런 병력이 소모할 물자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물자 자체야 비축된 것을 쓴다 해도 이동하는 순간 눈에 띄인다. 그렇다고 첩자를 일일이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왜 유목민족이겠는가.
돌아다니니까 유목민족이었다.
물론 돌아다닌다 해도 매번 움직이는 길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모든 부족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 부족은 상행을 목적으로 초원을 횡단하기도 했다. 상단자체가 하나의 부족인 경우다. 그렇게 예외적인 부족들을 흉내 내고 돌아다니는 첩자들이 다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일부 적의 첩자들을 파악해 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들을 쳐내는 순간 시에라 제국에게 경고를 해주는 꼴이 된다.
“이거 고민이 길어지겠구먼.”
“문제는 또 있습니다. 정말 그들이 싸워줄까가 문제입니다.”
“흐음.”
그것도 문제다.
아직 저들을 못 믿는다는 것. 만약 투먼 제국이 참전을 해서 밀고 내려가는 동안 강화를 맺거나 병력을 물리면 투먼 제국은 바보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도 이런 기회를 그렇게 소모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지만 상황이 조금 모호했다.
카말 왕국이나 필리어리 왕국은 지금 한계까지 위저짜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가우리가 참전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상황도 없었을 뻔했다.
실제 필리어리 오아성에 노블기사단이 나타났었다는 소식을 들은 투먼 제국이 얼마나 긴장을 했었는가.
최대한 피해를 입기를 바라고 있는데 전쟁답지 않게 순식간에 모든 것이 정리될 뻔 한 것이다.
그렇기에 싸우는 시늉만 하고 숨고르기를 할 수도 있었다. 오히려 투먼 제국과 시에라 제국이 서로 피해를 주고 전쟁을 멈출 때까지 회복에 집중할 수도 있었다.
“시에라 제국 내의 상황을 좀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구먼.”
“알겠사옵니다.”
쿠리한이 허리를 숙여 답했다.
그때까지 뒤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론바르에게 티부르 황제가 입을 열었다.
“왜 아무런 말이 없는 겐가.”
“제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옵니다.”
“이런. 제국 최고의 칼이 그런 말을 하면 되겠는가.”
“제 임무는 폐하를 지키는 것이옵니다.”
론바르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들이 장담한 대로의 힘이 있을까?”
“손을 섞어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순간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린 론바르의 눈이 빛났다.
그 눈빛에 감돌고 있는 것은 바로 호승심이었다. 바로 무덕을 향해 전사의 기질이 드러난 것이다.
“허허헛! 그게 그렇게 되나?”
“사신단 무장들의 대련이야 가끔 있었지 않았사옵니까.”
“하긴 그렇긴 하지.”
전사의 나라라 불리기도 하는 투먼 제국인 만큼 사신들이 올 때 간혹 무를 겨루기도 했다. 물론 친선이기에 적당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을 통해 상대의 기질을 가늠하기도 했다.
티부르 황제가 슬쩍 론바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보니 다른데 생각이 가 있었구먼.”
“죄송합니다.”
티부르 황제의 말에 론바르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클클. 뭐 나쁠 것 없지. 그리팔이 있으니 아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생각할 지도 모르지. 아니지.”
티부르 황제가 무덕을 떠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예상을 하고 그런 이가 온 것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허허허.”
티부르 황제가 뭔가 재미난 것을 찾아낸 양 웃음을 터트렸다.
***
터그람 왕국의 정벌을 마치고 복귀중인 프라임 론 아가드 공작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기가 차군.”
프라임 공작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는 이가 없었다.
기가 찬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환영인파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제국의 영토에 들어왔음에도 마음 놓고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황량해. 대체 뭐하는 놈들인지.”
프라임 공작이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그들이 지나는 곳은 작은 영지였다. 그런데 지나가는 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실 폐허라 해도 좋은 상황이었다. 가끔 굴러다니는 시체는 죄다 반쯤은 알몸이었다.
누가 보면 도적을 만나 죽은 시신으로 알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시체들이 사방에 늘어져 있었다.
마을은 더했다.
텅빈 것은 물론이고 뭔가 꺼내진 흔적만 남아 있었다. 일부 병사들이 들어가 보니 피신이라도 간 듯 뭔가 바리바리 싼 흔적들만이 남아 있었다.
영주성은 그 몰골이 더 심했다.
일반 민가가 피신 간 것 같은 흔적이라면 영주성은 완전히 탈탈 털린 흔적이 선명했다. 뭔가 걸렸을 벽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었고, 일부 벽은 뚫어낸 흔적도 있었다.
물론 그 안쪽은 뭔가가 있었는지 숨겨진 공간만이 남아 있었다.
“전문가의 솜씨입니다.”
그 모습을 본 전직 전문털이범 출신 병사 하나가 혀를 찼다. 영주쯤 되면 비자금을 숨기기 위한 공간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둘러보니 싹 다 털어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저지른 이들이 바로 가우리군이라는 것이다.
“떼강도란 말이 맞군.”
후작이 된 쏜튼 폴리어의 서신에 있던 표현이 바로 떼강도였다.
그 말대로 정말 철저하게 털어간 것이다.
“못 가져갈 만한 것은 태우고 갈 법도 한데 정말 하나도 남김 없이 턴 모습이구나. 다른 의미로 대단하다. 대단해.”
기가 차다 못해 이젠 감탄까지 흘러나올 정도였다.
프라임 공작이 목격한 영지만 세 개다. 그런데 그런 곳의 공통점이 황량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듣던 것보다 더 심각하게 털린 것이다. 이건 뭐 땅만 있지 알맹이는 하나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얼마나 끌려갔다고?”
“아직 정확하지는 않으나 벌써 십오만 가량에 달한다 하옵니다.”
“푸하핫!”
프라임 공작의 입에서 대소가 터져 나왔다.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이다. 십오만이라는 인구가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증발했다는 것은 말이다.
북방의 초원의 부족들도 털러 내려와서 백성들을 끌고 가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지금까지 피해를 합쳐야 천 남짓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이건 뭔가 싶을 정도다.
“이번에 새로 안 사실이지만, 미적떼도 조직적이면 이 정도로 할 수 있구먼.”
프라임 공작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정말 궁금해. 얼굴 좀 보고 싶구나. 황제라는 작자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기에 이런 짓을 하지? 초원의 거렁뱅이라 불리는 투먼 제국도 대놓고 이런 짓을 하지는 않건만.”
투먼 제국도 가끔은 이런 짓을 하러 오지만 그래도 최소한 일반 초원의 부족인 척 변장이라도 한다. 그런데 이건 완전 무장한 채 털고 움직이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정말 뒤통수를 맞아도 제대로 맞은 것이다.
“빨리 움직여야겠군. 이러다간 땅만 남고 백성은 죄 털려버릴 수 있으니 말이야.”
프라임 공작이 실성한 사람처럼 피실 피실 웃음을 흘리며 말을 몰아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