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225
290화 남자여! 웅지를 펴라!
***
“크, 큰일이옵니다!”
프라임 론 아가드 공작의 복귀를 기다리던 황실의 대전으로 전령이 창백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대전에 모여 있던 귀족 중 하나가 호들갑을 떠는 전령에게 목소리를 놓였다.
터그람 왕국 점령을 마친 프라임 공작의 복귀로 인해 이제 마음이 좀 편해지는가 싶었는데 큰일이라고 하니 좋은 기분은 아닐 수밖에 없었다.
“투먼 제국에서 남하하고 있사옵니다!”
“이런 정신 나간 놈들!”
“허, 이번엔 또 얼마나 달라고 그러려나.”
“이래서 야만인들과의 협정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귀족들이 다들 혀를 차며 한마디씩 던졌다. 그때 쏜튼 폴리어 후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자세히 보고 하게.”
아직 황제가 자리에 오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빠르게 보고를 받고 정리하려 했다.
“사, 삼만으로 추정되는 병력이 국경을 돌파하여…….”
삼만이라는 숫자에 쏜튼 후작은 물론이고 다른 귀족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력시위 치고는 많은 숫자였다. 그리고 또 문제는 국경을 돌파당했다는 말이었다.
“국경을 돌파당해?”
다른 귀족 중 하나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초원 부족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망루를 일정간격으로 설치해 놨기에 사전에 알릴 수 있도록 해 놨다. 그럼에도 돌파 당했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시, 심지어 보급기지까지 괴멸을 당했다고 합니다. 아울러 인근 기병부대 세 곳이 야습으로 인해 전멸을 당한 듯 하옵니다.”
이제야 상황이 심각해 졌음을 안 귀족들이 부르르 떨며 이를 갈았다.
“이번에는 단단히 마음먹은 듯 합니다!”
“이건 따져야 합니다! 침범하지 않기로 하고 이게 무슨 개짓거립니까! 아무리 야만인이라 해도 도의가 있지!”
“야만인들에게 도의를 왜 찾습니까.”
귀족들이 분기에 차서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급보이옵니다!”
“급보입니다!”
그때 전령들이 연이어 달려왔다. 한번에 오면 좋겠지만 각 서신을 담당하는 술법사들이 다르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미 충격적인 소식을 한번 들은 귀족들이었지만 불안감은 있었다.
“투먼 제국에서 온 서신이온데, 약속은 지켰노라고…….”
“뒤통수를 쳐 놓고 무슨 개소리!”
귀족 하나가 열분을 터트렸다. 하지만 전령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합의는 남부 정벌에 한해서이며 터그람 왕국의 정벌은 마무리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옵니다.”
“허? 남부란 말을 모르는 작자들인가?”
누군가가 허탈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때 전령은 창백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지금 상황은 남부 정벌이 아니라 남부로부터의 침략을 받는 상황이므로 동일시 않겠다는 말이 덧붙어 있었사옵니다.”
“으음.”
몇몇 귀족들이 신음성을 흘렸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적들이 반격을 해 온 상황부터는 이미 정벌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던지 침략을 당하는 그림은 맞았다.
그때 뒤따라 들어온 또 다른 전령에게 쏜튼 후작이 물었다.
“뭔가.”
“처, 첩보이옵니다. 투먼 제국 내에서의…….”
“첩보? 첩보를 왜 여기로 가져오는가.”
첩보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말한다. 그리고 엄연히 첩보를 다루는 기관은 따로 있었다. 그걸 대전으로 가져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게 투먼 제국에서 대대적인 침략을…….”
전령의 말을 끊은 귀족 하나가 열불을 터트렸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 이미 국경을 넘어서야 보고를 올려?”
투먼 제국에서 암약하는 첩자들에 대한 분통이었다. 한숨을 쉰 쏜튼 후작이 전령의 말을 채근했다.
“그래. 일단 마저 보고하게.”
“그 수가 수십만에 달한다는 보고이옵니다.”
순간 대전에 정적이 흘렀다.
수십만.
분명 국경을 침범한 숫자는 약 삼만으로 추정되는 숫자라 하였다.
그런데 방금 첩보라고는 하지만 수십만에 달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보내온 것이다.
“분명 수십만이라 했느냐?”
“그, 그러 하옵니다.”
쏜튼 후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삼만과 수십만은 다르다. 거기에 초원을 무대로 돌아다니는 전사들 수십만은 곧 수십만의 기병이라는 말과 같았다.
안 그래도 남부 동맹군 수만의 기병에 의해 지금 골이 아픈 상황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시작이었다. 연달아 달려 들어오는 전령들을 보며 귀족들은 얼굴이 점점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
시에라 제국이 전쟁의 불길 속에 뒤덮인 상황에서도 데본 영지는 평화로웠다. 영지 자체도 곡창지대인지라 많은 양의 곡물을 전략물자로 넘기고도 여유가 있었다.
병사들의 숫자도 이런 비옥한 대지를 가진 영지 치고는 적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영지민들도 농사를 하는데 있어 필수요소였기에 병력징발 대상에서도 멀었다.
몸은 고되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제일 바쁜 것은 영주일지도 몰랐다.
“끄응.”
데본 영지의 영주인 히드만 파라 남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황실의 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부인이 바로 황실의 인척이었기 때문이었다. 남들이라면 다 부러워 할 만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가 황실의 끈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가진 능력은 있기는 한데 가문의 힘이라 할 만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혈혈단신이나 마찬가지.
그래서 선택이 된 것이다.
물론 이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작 전쟁이 일어나니 바빠 죽을 지경이었다. 영지에서 생산하는 모든 것을 황도로 올려보내기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를 담당하는 관리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손대야 할 것은 많았다.
“미치겠군. 자꾸 뭘 달라고 그러는지.”
옆 영지에서 온 서신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 인근을 호령하는 가르히 데얀 백작령에서 날아온 서신이었다.
그 영지는 크기는 크지만 곡물 수급력이 떨어져 데본 영지의 곡물을 수입해 가야 생존이 가능했다. 그런데 황실에서는 자꾸만 곡물을 보내라 하고 그쪽은 그쪽대로 달라고 하니 죽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쪽이 이쪽을 건드릴 리는 없지만 골 아프게 만들 거리는 많았다.
그렇다보니 우선 순위를 두는데 있어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죽겠네.”
히드먼 남작이 뻣뻣해진 목을 이리저리 젖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 어떻게 알았지?”
“뭐?”
순간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히드만 남작이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이 강하게 틀어 막혀졌다.
“읍! 으읍!”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이의 팔을 잡아챘지만 마치 단단한 뿌리내린 나무마냥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런 히드만 남작의 동공에 꽁지머리를 한 이국먹인 외모의 사내가 비추어졌다.
“안녕. 난 웅삼이라고 해. 반갑지만 바로 이별해야겠구나.”
웅삼이라는 이름에 히드만 남작의 동공이 더욱 커졌다. 모를 수 없는 이르밍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투투툭!
가슴팍을 가르고 들어오는 칼날에 그의 커다래진 동공에 물기가 서렸다. 죽는다는 건 알 거 같았다. 다만 그게 무서웠던 것이다.
아픔도 잠시 그의 목이 축 늘어졌다.
“바쁘네. 다른 쪽도 잘 하고 있나 모르겠네.”
계웅삼은 칼에 묻은 피를 그의 옷에 비벼 닦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값나가는 게 있거나 중요해 보이는 서류가 있으면 털어가기 위해서였다.
창고 쪽은 이미 몇 명이 가 있었다.
이런 곳일수록 먹을 게 많았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털어야 했다. 이제는 나눠 줄 곳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투먼 제국에서 남하하는 병력들에게도 먹을 게 꽤 필요했다. 그렇게 안을 뒤적거리던 웅삼이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곳 말고도 밤중에 돌아야 할 곳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홀로 남은 히드만 남작이 눈물을 떨군 채 입을 벌리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죽음이 억울했나보다.
그럼에도 창밖의 풍광은 평화로웠다. 어둠속에 간간히 켜져 있는 불빛이 더없이 평온했다.
***
“히드만 이 창남 놈은 왜 답변이 없는 게야!”
데얀 백작령의 맹주인 가르히 데얀 백작은 노성을 터트렸다. 전쟁 이후 갑자기 곡물 수급이 어려워졌던 것이다. 잠깐은 이해할 수 있다지만 기간이 점점 길어지게 되니 이게 문제가 되었다.
병력이 먹어 치우는 군량도 적지 않았다.
물론 방법은 있었다. 화도로 병력을 파견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영주들이 그렇게 했었던 적은 있었다.
충성의 의미로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전공과는 거리가 먼 곳을 전전하거나 혹은 희생양으로 활용되다가 돌아왔다. 일부는 오명도 얻었다. 그렇게 후작에서 남작까지 곤두박질친 영주도 있었다.
그 꼴만큼은 보기 싫었다.
지금 제국은 대영지를 가진 전통적인 대영주의 힘을 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기를 들기도 어려웠다.
제국은 제국이었으니까.
그때 그의 기사단장이 달려들어 왔다.
“백작님!”
“뭔가.”
“히드만 남작이…….”
“그 창남놈이 왜! 또 없다고 징징대던가!”
“주, 죽었습니다!”
순간 가르히 백작의 입이 다물어졌다.
“죽어?”
잠시의 침묵 후에 확인차 던져진 질문에 기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뿐 아니라 총집사장과 몇몇 주요 관리들도 암살을 당했습니다. 우리도 방비를 해야…….”
“어서 기사단을 준비해!”
“예?”
“몰라? 전시 아닌가! 인근 영지의 부재시에는 해당 지역의 변경백에게 관리 책임이 있다는 걸!”
“아!”
“빨리 움직여라!”
기사단장이 나가자 가르히 백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아니라 왜 데본 영지일까.”
암살이 분명했다. 그것도 목적이 있는 암살. 문제는 데본 남작령은 곡창지대라는 것 외에는 특별난 것이 없었다.
“누굴까.”
습격을 감행한 이가 누구일까 고민을 해봤다.
이쪽 지역은 이전에는 시에라 왕국 시절의 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무색하다. 병합된 지 오래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변두리 지역에서 일부 반란의 소요가 있다는 말은 있었지만 이곳은 그럴 일이 없었다.
“가우리?”
걸리는 것은 그것 하나다.
“설마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서인가?”
마음이 급해졌다. 이쪽도 곡물이 필요했다.
가르히 백작은 기사단과 기병들을 이끌고 데본 남작령으로 달려갔다.
“쯧.”
데본 남작령에 도착한 가르히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대로 보급창고가 털렸다. 다행인 점은 아직 창고로 들어오지 않은 다량의 곡물은 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가르히 백작에게 술법사가 달려와 입을 열었다.
“급보이옵니다!”
“뭔가.”
“티모시 남작이 암살당했습니다!”
“…….”
그 말에 가르히 백작이 멈칫했다.
뭔가 이상했다. 티모시 남작 역시 인근 영지였다. 거기에 중요한 철광이 있는 곳이다.
“이곳처럼?”
“예. 관리들도 다 죽고 보급창고가 털렸사옵니다.”
“철광과 대장간은?”
“그쪽은 무사하답니다.”
그 보고를 받은 가르히 백작의 표정이 묘해졌다. 곰곰이 생각하던 가르히 백작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것 봐라?”
뭔가 냄새가 났다.
자신의 야심을 간질거리는 냄새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