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241
306화 대지를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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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벗어나면 뛰기 힘든 중년에 은퇴 준비하던 양반이 지원군의 전부?”
필리언 제라르가 내뱉은 촌철살인에 하일론과 레비언 고윈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뛰는 건 잘 합니다. 도끼질이 이제 좀 시원찮아서 그렇지.”
“차라리 은퇴시켜 주십시오.”
하일론이 피시시 웃으며 대꾸했고 고윈은 세상 다 산 양반처럼 중얼거렸다.
“나 이거야 원 참.”
제라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이 둘의 능력을 폄하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실질적인 병력의 지원을 기대했던 그였기에 한숨을 내쉬었던 거였다.
“일단 우리는 선발대라 보시면 됩니다.”
“응?”
하일론의 말에 제라르의 눈이 반짝였다.
“이후로 무려 삼천이 추가 됩니다.”
“개마기병?”
“오크전삽니다.”
“…….”
하일론의 대꾸에 잠시 할 말을 잊었던 제라르가 확인하듯 물었다.
“중만이네 애들?”
“애들이라고 하기엔 다들 한 덩치 하잖습니까.”
“맞군.”
“맞습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웃고 있는 하일론을 보며 제라르는 한방 치려다 말았다. 쳤다간 골로 갈 맷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겨대로 쓰면 그만이지만, 애써 길들여 놓은 놈들 학살하는 꼴밖에 안 될 건데?”
오크들의 괴력이나 흉포함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삼천이라는 숫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하일론은 고개를 내저었다.
“수성에 쓸 겁니다.”
“응?”
“제가 씁니다.”
“누구 맘대로!”
그나마 삼천이다. 오크들 정도라면 충분히 강력한 한방이 될 수 있었다. 당연히 제라르가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하일론이 뒤돌아보며 마법사에게 말했다.
“저 열제께 통신을…….”
“전시에 떨어진 명령은 어떻게든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할 필요는 없었군요. 허허허.”
“웃지마라. 나이도 젊은 놈이.”
“그렇긴 합니다만, 외모는 제가 더 먹어주잖습니까.”
“젠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초인의 육체로 인해 아직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제라르였기에 중년의 나이에 돌입한 하일론에 비해 새파랗게 보였다.
“영감은 어따 쓰지?”
“후우.”
한쪽에 풀이 죽어 있는 고윈을 본 제라르가 중얼거렸다. 당연히 한숨이 나왔다. 고윈에게서 말이다.
“쯧. 뭐 방법을 만들어 왔을 테니 여기 왔겠지. 설명 좀 해봐.”
“수성 병력에서 만을 더 빼드리겠습니다.”
“수성에서 만을?”
“예. 그 부족분을 오크전사로 매울 겁니다.”
“흐음.”
왠지 설득력이 있다.
전위로도 유용하지만 오크들의 기동력은 딱히 좋지 못했다. 몸뚱이가 무거워 기병으로는 어렵다. 말을 안 잡아먹으면 다행이다.
물론 무거운 장비 입고 뛰는 건 일반 병사보다 낫다.
그래서 돌격병이다.
그런데 수성에서의 활용도는 더 무궁무진할 수 있었다. 수성에는 힘쓰는 일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말을 잘 듣는 가정하에 성벽위에 오크들이 버티고 있으면 꽤 나쁘지 않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때 하일론이 말을 이었다.
“오크 전사가 삼천이지만, 일반 오크를 더 끌고 올 겁니다.”
“무슨 수로 길들이고?”
“약육강식입니다. 오크전사는 우리가, 그리고 일반 오크는 오크전사가. 물론 추가로 천 정도 뽑아 와서 수성용 병기에 활용할 예정이지요.”
“흐음.”
꽤 그림이 좋아진다.
“거기에 두발소도 끌어올 겁니다.”
“미노타우르스?”
“예.”
“역시 힘쓰는 일에 쓸 거지?”
“예.”
더는 묻지 않았다. 수성에는 항상 기대 이상의 결과를 보여주는 이가 하일론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제라르에게 하일론이 입을 열었다.
“전 뚫리지 않게 막을 겁니다. 아니 다른 성도 말이지요.”
“그렇다 치고 나머지는?”
“본대와 실랑이를 벌이셔야지요.”
“저 영감은?”
제라르가 다시 고윈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어떻게 활용하나 싶었던 이다.
“방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실랑이를 벌일 거라고 말입니다.”
“하아아아.”
하일론의 말에 고윈이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제라르는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난?”
“성벽에 들러붙은 적들을 처리하시면 됩니다.”
“…….”
침묵하는 제라르를 보며 하일론이 물었다.
“오천 정도면 되겠지요?”
하일론의 물음에 제라르가 고윈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삼만 오천으로 약 팔만은 될 적 병력에 가져다 바치자?”
“허허 고윈님의 별명을 아시잖습니까.”
신랄한 평가에 하일론이 웃으며 대답했다.
“알긴 알지. 전장의 매. 용병술은 귀신같고 분위기 파악은 저리가라인 양반.”
“그렇지요. 그 능력 때문입니다.”
“용병술?”
제라르가 묻자 하일론이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분위기 파악은 저리가라인 능력 말입니다.”
“하아아아아아.”
제라르가 고윈을 바라볼 때 고윈은 다시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매처럼 높게 떠서 전장을 살핀다는 그의 능력에 붙은 별명이 전장의 매다. 그리고 또 다른 능력이 바로 이거다.
눈치보고 안 될 전투 내빼는 데에 선수.
하이안 왕국의 얼마 안 되는 병력을 보존하기 위한 생존전투의 달인이 바로 그였다. 그게 필요한 시점이었다.
“고윈 경 원래 칼을 든 자의 로망은 전장에서 뼈를 묻는 거라네.”
제라르가 나름 아름답게 포장해주자 고윈이 대답했다.
“제 로망은 침대에서 자다 가는 겁니다.”
“복상사?”
“그냥 자다가 죽는 것 말입니다아아!”
“목소리 보니 든든하군. 다들 준비하자고!”
제라르는 고윈의 울부짖음을 뒤로하고 한결 편한 모습으로 뒤돌아섰다.
배 이상의 병력을 상대로 쫓고 쫓기는…… 아니 적당히 깔짝거리다가 쫓겨 다니는 스릴 넘치는 역할을 맡게 된 고윈의 절규는 길게 이어졌다.
그 절규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웨에에에엑!”
“우웩!”
“크워억!”
함성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비위 틀어지는 소리가 대지를 적셨다. 물론 소리만 적신 것은 아니었다.
먹었던 것들이 걸쭉하게 변해서 대지 위에 시큼한 양분을 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는 라임 십팔 왕자도 있었다.
삼만 오천여 병사들이 연쇄구토를 벌이는 와중에 고윈이 꼬장꼬장한 외침을 터트렸다.
“이 아까운 음식을 왜 뱉나! 뛰어! 또 뛰어! 각 제대별로 깃발 보고 뛰랬지 물 잔뜩 처먹은 돼지마냥 뒤뚱거리라 했나!”
“크웍!”
쾡한 얼굴의 고윈이었다. 하지만 목소리 하나만큼은 날이 바짝 서 있었다.
이들은 매의 군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처럼 만들어야 했다. 짧은 시간 안에 말이다.
“휴식!”
먹은 것을 다 게워내고 반쯤 미치도록 굴리고 나서야 주어지는 찰나의 휴식.
라임 왕자의 얼굴은 반쪽이 되었다.
물론 그가 원한 그림은 이게 아니었다. 수성하는 쪽에서 결코 굴하지 않는 일루이먼 왕국의 깃발을 보여주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수성 쪽이 좀 더 안전할 것 같다는 개인적인 바람도 있었지만, 결국 이쪽으로 끌려왔다.
이유는 단순했다.
미끼는 원래 먹음직스러워야 한다는 거다.
어찌되었든 일루이먼 부흥군의 중심은 라임 왕자가 되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적들도 그를 최우선으로 노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합류했던 것이다.
너브러져 숨만 간신히 이어가던 라임 왕자가 곁에 앉아서 물로 목을 축이는 이에게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리 뛰, 뛰어야 하는 건가.”
그의 질문을 받은 이는 중년의 병사였다. 이 훈련에는 매의 군단 소속 병사 천여 명이 투입되어 있었다.
물론 이 병력 역시 고윈이 부득불 우겨서 겨우 지원을 받아낸 이들이었다. 일종의 조련사들인 것이다.
라임 왕자의 질문을 받은 매의 군단, 군단병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말 정도는 제칠 수 있어야지요.”
“……말이 말 같아야 놀라던가 말던가 하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던 라임 왕자가 다시 그를 보았다.
여전히 쓴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왠지 안쓰러운 시선을 동공에 담고 있었다. 라임 왕자의 눈동자가 미친 듯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인가?”
“예.”
“…….”
라임 왕자는 순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마치 머리가 멍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내 속 깊은 곳에서 끌어오른 외침이 그의 입을 타고 터져나왔다.
“그게 말이 되는가! 어찌 사람이 이런 무장을 하고 말을 따돌린단 말인가!”
라임 왕자가 분노를 담아 이 훈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성토했다. 하지만 군단병은 착잡한 얼굴을 하더니 하늘을 살짝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되더군요.”
“……뭐?”
“하니까 되더군요.”
하늘을 응시하며 내뱉은 말.
라임 왕자는 다시 할 말을 잃었다. 그 표정은 가끔 주변 노인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예전에 그랬지.’
마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표정.
“그게 어찌…….”
“전마가 아무리 뛰어봐야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일부 품종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상당수가 그렇지요. 안 잡히고 잘 뛰는 게 이번 훈련의 목적입니다.”
“저, 전투 훈련은 어떻게 하고!”
라임 왕자가 억울하다는 듯 외치자 군단병이 다시 답했다.
“우리 매의 군단의 모토가 있었습니다.”
“그, 그게 뭔가?”
라임 왕자가 불안한 시선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군단병이 조용히 읊조렸다.
“전투도 살아야 한다.”
“…….”
“이 훈련의 목적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살아서 튀는 겁니다.”
라임 왕자는 누운 채로 하늘로 시선을 향했다.
그의 동공에는 금세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어 눈물이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뒤통수로 흐를 때 즈음 듣기 싫은 외침이 들려왔다.
“휴식 끝! 일어나 이 게으름뱅이들아!”
옆에서 안쓰럽다고 말을 해주던 군단병이 순간 안면을 바꾸고 흉악한 얼굴로 누워 있는 병사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하며 일으키기 시작했다.
라임 왕자도 맞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개새끼!”
물론 정말 작은 목소리로 말이다.
***
카버 왕국의 마법사들이 가지고 온 보고를 받은 가든 퍼시발 후작은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전부인가?”
“전붑니다.”
하늘을 훌훌 날아다니는 마법사들이기에 적의 상황을 훤히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져온 정보는 극히 적었다.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원하네만.”
그의 말에 마법사가 피곤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답했다.
“벌써 넷이 당했습니다.”
이곳에 25명의 마법전단원이 와 있다. 그 중에 정찰 중에 당한 인원이 넷이었다.
“쯧.”
마법이 전쟁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대륙에서는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든 후작은 꽤나 기대했던 모양인지 아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각 성에 나뉜 병력을 합하면 약 이만 정도 잡으면 되겠군. 결국 병력을 나눈다는 거군. 이런 선택인가.”
예상했던 부분 중 하나였다. 마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대의 영역은 이중에 특정할 수는 있습니다.”
마법사가 바닥에 놓인 지도에 표기를 했다. 그걸 본 가든 후작이 인상을 다시 찌푸렸다.
마법사가 표기한 지역 역시 예상했던 곳들이었다.
“병력을 나눠?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방안을 선택했다는 건데.”
가든 후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능성을 점쳤던 병력 배치기는 하지만, 제일 뒤로 미루어 놨던 병력 배치였다.
하나로 뭉쳐서 덤비거나 아예 다 틀어박혀 일부 별동대를 돌리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었다. 물론 만에 하나 이렇게 나눌 수 있다는 판단을 하기도 했고 말이다.
만에 하나 말이다.
그런데 그 만에 하나의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