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296
361화 혼란속으로
“병력을 물러?”
진천의 미간이 꿈틀 거렸다.
별로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실 지금 상황이 시에라 제국에게 좋지는 못했다.
하지만 벌써부터 병력을 물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일방적인 피해만 입은 상태니 말이다.
그들의 자존심을 봤을 때 낮은 예상치의 행동을 보인 것이었다.
“쯧, 패를 너무 일찍 가나?”
진천의 중얼거림에 어느새 다가온 휘가람이 말을 받았다.
“그 패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피해를 더 입었을 겁니다.”
“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시에라 제국 쯤 되면 이대로 병력을 물리는 것도 그리 좋지 못한 판단인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오늘 적들이 소모한 병력을 따지면 몇 만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 몇 만이 적은 수는 아니지만 적들의 총 병력을 봤을 때 미미하다는 거다.
하지만 사기 면에서 이렇게 떨어진 상황에 병력까지 물린다면 양쪽의 병력차를 생각했을 때 앞으로의 전투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처음 붙는 전투라면 이해하지만, 그동안 시에라 제국이 여러 작은 전투에서 패했던 모습을 봤을 때 악영향이 클 것은 분명했다.
제대로 된 판단이라면 적어도 물러가기 전에 뭔가 한 방이라도 날렸어야 했다.
그런데 조금 더 보아야겠지만 적들의 움직임은 완전 후퇴다.
전초전에서 패했음을 자인하는 행태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생각하던 진천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전과 확대에 주력한다.”
“지금은 그것이 최선이겠지요.”
잠시 후 남부 연합 진영에서 빠른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물러가는 시에라 제국군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하나라도 더 죽이겠다는 듯 말이다.
그런 남부 연합군의 의지를 읽었는지 시에라 제국군은 과감하게 흩어진 병력을 먹잇감으로 주고 완전히 병력을 물리는 데에 성공했다.
이날 시에라 제국군의 병력 피해는 팔만에 달했다.
그에 반해 남부 연합군의 피해는 수천에 불과했다.
대승이었다.
* * *
피처럼 붉은 저녁놀이 물러가고 어둠이 찾아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라임 공작이 막사로 다가오는 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제자들이었다.
“사기가 완전 바닥입니다.”
“젠장.”
에디와 그리그였다. 엡소드와 이븐 역시 표정은 밝지 못했다.
“당연한 거지.”
프라임 공작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마 지금쯤 황실도 난리가 났을 것이다.
단박에 적들을 때려 부술 줄 알았는데 앗 뜨거 하면서 병력을 물린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때 엡소드가 입을 열어 왔다.
“단순히 패배를 한 것보다, 없던 병력이 갑자기 나타난 사태에 대해 병사들이 두려움을 더 크게 가진 듯합니다.”
“나도 놀랐으니까. 당연한 거겠지.”
프라임 공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빌어먹을 카버 왕국 마법사 놈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막내 제자인 이븐이 시뻘게진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에디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들로써도 할 말은 있지. 함정을 파기 위해 태반이 뒤쪽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그래도 말입니다!”
둘의 목소리가 조금씩 더 높아지는 기미가 보이자, 엡소드가 나서서 한마디 했다.
“그만들 해라.”
“예.”
“끄응.”
에디가 고개를 숙였고 이븐은 억울한 듯 인상을 구겼다.
그때 에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만한 피해만으로 마무리 한 게 다행입니다. 자존심 세우기 위해 더 붙었다면 족히 몇 만은 더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대신 놈들도 몇 만은 죽였겠지. 오늘처럼 꼴랑 몇 천이 아니라.”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그리그가 말꼬리를 잡았다.
그때 프라임 공작이 정돈하듯 말문을 열었다.
“나도 맘 같아선 그러고 싶었지. 그런데 오늘만 전쟁 할 게 아니니까 참은 거다.”
프라임 공작의 말에 그리그가 고개를 숙였다.
오늘 가장 치욕을 느낄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프라임 공작이었을 것이니까.
“차라리 나쁘지 않게 되었지 않느냐?”
프라임 공작이 재차 입을 열며 질문을 던지자 다들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들을 끄덕였다.
“그건 그렇습니다.”
“놈들이 더 기고만장 할 게 뻔하니까요.”
그리그와 이븐이 거의 동시에 답했다.
그들이 함정을 준비하면서도 가장 신경 썼던 것이 과연 적들이 걸려들까 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로 함정으로 적들을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졌다.
적들은 자신감이 더 높아졌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속편하게 생각해라. 함정도 파는 마당에 병력 뺀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느냐?”
프라임 공작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다들 씁쓸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적어도 상대는 제국이라 불리는 나라가 주축이 된 연합군이니까.”
프라임 공작의 말에 다들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승승장구해왔기에 상대를 가벼이 여겼던 면도 있었다. 전투란 이길 때도 질 때도 있는 법인데 말이다.
“전쟁만 이기면 된다.”
프라임 공작의 말에 다들 한목소리로 답했다.
“예!”
* * *
“이상하단 말이지.”
고진천은 아직도 뭔가가 찜찜한 표정이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바사 론 카말 왕이나 필리어리 쪽 인사들은 꽤 상기된 얼굴이었다.
방어전이 아니라 프라임 공작이 직접 지휘하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탓이었다.
“놈들이 몸을 사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사 왕의 말에 몇몇 이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프라임이 이쪽에서 제일 강자라며? 그런데 이런다고? 자존심도 있는데?”
“그, 그야…….”
진천의 직설적인 질문에 다들 별다른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그때 수정구를 든 마법사가 달려 들어왔다.
“음?”
“오! 그리팔!”
오늘 제대로 된 전투도 못하고 소리만 지르다 김이 센 대무덕이 수정구에 나타난 얼굴을 보고 환한 얼굴로 반겼다.
[오늘 전투 결과를 봤습니다.]
“으허허! 그런가?”
[프라임 공작에 대해 다들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시작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나오는 그리팔의 말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해?”
바사 왕이 고개를 살짝 꺾으며 되물었다.
[예.]
최근에 프라임 공작의 병력을 상대했던 그리팔의 대답이었기에 허투루 들을 수는 없었다.
“자세히 말하도록.”
안 그래도 찜찜했던 진천이었기에 그리팔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지휘관이라는 이름만 달았을 때의 프라임 공작과 제대로 된 지휘를 하는 프라임 공작은 조금 다릅니다.]
“뭐가 다르지?”
진천이 되묻자 그리팔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명목상으로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는 전장을 산책삼아 누비는 게 바로 프라임 공작입니다.]
그리팔의 설명에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진천으로 시선이 몰렸다.
물론 진천은 딱히 별 반응 없었다. 틀린 건 아니니까.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는 확실히 지휘관으로서 역할을 할 줄 아는 이입니다.]
그 말에 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이름값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실리를 꽤 추구한다고 봐야 하옵니다. 물론 시에라 제국이 승승장구 하면서 그런 모습은 거의 없어졌었지만 제국 초기 전쟁 때만 해도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흐음. 나랑 비슷한 면이 있군.”
진천이 답하자 이번에도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물론 아까와는 다른 시선이었다.
불신 가득한 시선.
진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돌아보자 다들 재빠르게 시선을 되돌렸다.
바사 왕만 진천의 시선과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랐을 뿐.
하지만 진천은 다시 수정구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사기가 저하된다면 다음의 전투에서 불리해 질 것이 뻔할 텐데? 그대의 말대로라면 이런 것 정도는 생각할 줄 아는 지휘관이어야 하지 않는 가?”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그리팔의 말에 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리셀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적들의 진영에 마법사들이 많이 적기는 했습니다. 물론 얼마나 마법 전력이 끼어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큰 전투에 투입되었다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수였사옵니다. 물론 그 공백을 무지막지한 술법사들로 매웠지만 말입니다.”
무지막지한 술법사라는 말에 다들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쪽도 술법전단을 운용하면서 나름 닥닥 끌어 모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시에라 제국 술법사들의 숫자는 거의 세배에 육박하는 것 같았다.
[모쪼록 소신의 의견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옵니다.]
“도움이 되었다.”
진천의 치하를 끝으로 그리팔의 모습을 담은 수정구에서 빛이 사라졌다.
“이거 듣고 보니 더 찜찜해졌는데요?”
휘가람이 진천에게 말을 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승리로 기분 좋았던 바사 왕이나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단 병사들의 사기에 신경 쓰도록. 찜찜한 건 우리만으로도 족하다.”
진천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넉넉히 풀어서 먹이도록.”
“알겠습니다.”
다들 큰 목소리로 답했다.
* * *
“유니언 켄이 죽어?”
아메리 연방제국에 켄 공작의 죽음이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정말이야?”
“맞다니까!”
“허…….”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가 황도에까지 다다랐다.
거기에 기묘한 소문도 돌았다.
가우리 동맹의 병력이 지금 본국에 없다는 소문 말이다.
여러 가지 증거와 함께 꽤 근거 있게 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각지에서 벌어진 초인의 탄생은 그동안 웅크리고 있던 제국들의 웅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자극의 결과로 말린 왕국의 국경에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연방제국의 도발이었다.
처음에는 기병들의 잦은 월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요새 하나가 연방제국의 급습으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한명의 생존자도 없는 전멸이었다.
바로 프라임 공작이 이끄는 시에라 제국의 대군과 남부 연합군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바로 다음 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말린 왕국은 바로 군사를 일으켜 국경지대로 병력을 파병했다. 하지만 연방제국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었다.
무슨 이유로 도발을 하는 것이냐는 내용이었다.
“켄 공작이 죽었다는 것도 자작극 아닌가?”
“설마.”
사실 연방제국도 어이없기는 했다.
이참에 칠까 고민은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린 왕국의 요새가 무너지고 또 그들의 병력이 국경으로 밀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제국이다.
잠시 흔들리기는 했지만 대륙을 삼분할 하는 제국인 것이다.
연방제국의 남부지역에서 일제히 병력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말린 왕국을 이참에 무너트리자는 강경발언이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때를 맞추어 신성 제국령에 있던 국가들 중 일부가 손을 잡고 친로셀린 성향의 국가들을 향해 칼을 빼 들었다.
이 모든 사건들이 마치 잘 짜여진 각본처럼 움직였다.
시점도 교묘했다.
시에라 제국과 가우리를 중심으로 한 남부연합의 전투가 벌어지고 나서 하루 이틀 만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