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30
강철의 열제 130화
“크야아아!”
콰콰콱!
마치 바위덩어리가 굴러오자 갈대들이 누워버리는 것처럼 고진천이 나아가는 방향의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무너진 대열은 이어 닥쳐온 가우리 보병들의 돌입으로 인해 살아나기 위해 발버둥을 칠뿐이었다.
“뒤로 물러나라! 제 3저지선으로 합류한다!”
투구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고 이마가 길게 찢어진 채로 병사들을 통솔하는 세리안 헨슨 남작의 음성에는 절망감이 섞여있었다.
1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헨슨 남작은 후방에 있던 병사들의 해이해진 기강 때문이라 믿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빨리 뚫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1저지선이 뚫리는 모습을 본 헨슨은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검은색인지 붉은색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피를 뒤집어쓴 한 기의 기마가 1차 저지선을 관통 하고서 쉬지 않고 그대로 2차 저지선으로 돌격해 들어온 것이다.
어느 정도의 정비도 하지 않은 채 바로 달려오는 우를 범한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방어선이 정돈되어 있으면 공격 측은 대열을 정비하고 뛰어드는 것이 정상이었다.
‘가만……. 정면을 뚫었단 말인가?’
헨슨 남작의 눈이 점점 커졌다.
기병운용의 묘리를 벗어난 결과였다.
물론 정면으로 공격을 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통상 기병의 운용은 진의 가장 취약한 좌우 날개를 꺾는 것이 정상이었다.
게다가 지금 본진의 규모는 그들의 배를 상회하는 상황. 도저히 자신이라면 시도조차 안할 행동이었다.
헨슨 남작의 눈이 무너지는 1차 저지선의 좌우 후방을 살폈다.
무너져가긴 했으나 어떠한 적의 기마도 관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두두 두두두!
헨슨 남작의 시선이 다시 전방으로 돌려졌다. 다섯 개의 뿔이 달린 갑주를 찬 기마가 피 칠갑을 한 채로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대열이 무너지지 않은 채, 쐐기꼴로 최선두의 기마를 따라서 뚫고 나오는 검은 기마들…….
정비를 안 한 것이 아니라 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라는 의미였다. 죽어나간 1차 저지선의 병사들은 별 무소용이라는 뜻이었고, 지금 달려드는 기마들은 그 이상의 강력한 부대라는 뜻이다.
그 뒤는 지옥이었고, 헨슨 남작은 치를 떨며 병사들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누구 없나!”
“남작님!”
온몸의 갑주가 우그러든 채 힘겹게 달려오는 수련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당장 후작님께 달려가 3차 저지선도 못 막을지 모른다고 알려! 빨리!”
“알겠습니다!”
달려 나가는 수련 기사를 본 헨슨 남작은 자신의 임무를 마쳤다는 듯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등은 반으로 갈라져 피를 뿜고 있었고, 그 뒤로 우렁찬 음성이 뒤따랐다.
“늦추지 말고 계속 돌입 하라우! 고저 죄 죽여 버리란 말이야!”
을지부루의 광기에 찬 얼굴이 피에 취한 듯 번들거렸다.
북로셀린 군의 총사령관 말라인 퍼거슨 후작은 어이가 없었다. 2차 저지선이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그에게 처음으로 들려온 보고는 등에 화살을 고슴도치처럼 달고 죽어가는 수련기사의 3차 저지선도 위험하다는 전언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서 수수깡 부러지듯이 무너지는 3차 저지선이 보였던 것이다.
“후작님, 상황이 급박 합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어찌 세 겹의 저지선이 이리 허무하게 무너진단 말이냐!”
황당했다.
임시 지휘막사에서 말을 달려 도착하는 시간과 2차, 3차 저지선이 무너지는 시간이 비슷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퍼거슨 후작의 호통에 먼저 몸을 피해 달려왔던 3차 저지선을 맡은 하울 자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것이…… 적의 선두에 괴물이 있습니다.”
“괴물?”
한쪽 눈가를 찡그린 퍼거슨 후작이 반문했다.
“1차 저지선에 돌입할 때부터 단기로 달려든 기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마를…… 아무도 막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은 3차 저지선까지 되풀이 되었습니다.”
“단 한 기가 길을 뚫었다는 것이냐!”
퍼거슨 후작의 어이없다는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하울 자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
어이가 없었다.
퍼거슨 후작이 다시 물었다.
“그 자가 소드 마스터라도 되던가?”
“그게…….”
“오러를 줄기줄기 뿜으며 달려들기라도 하였냐는 말이다.”
“그건 아닙니다.”
자작의 목소리는 더더욱 기어들어갔다. 그와는 반대로 퍼거슨 후작의 음성은 높아져만 갔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하고 있는 건가!”
퍼거슨 후작의 호통소리에 하울 자작은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타일렌 남작은 막지 않고 뭘 했더냐!”
3차 저지선에서 가장 높은 무위를 지니고 있는 타일렌 남작을 말하자 하울 자작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열었다.
“그놈을 저지하러 달려들었으나 전사…… 하였습니다.”
“뭐라!”
타일렌 남작의 무위는 소드 오러 상급으로 군의 중요 제원이었다. 그런 그가 저지를 하지 못하고 전사했다는 말에 퍼거슨 후작의 얼굴이 신중하게 변했다.
“그 자의 무위가 어느 정도이기에 타일렌 남작이 전사했다는 말인가.”
다소 누그러진 음성과는 반대로 하울 자작의 얼굴은 참혹하게 변했다.
이상하게 여긴 퍼거슨 후작이 대답을 재촉했다.
“묻고 있잖느냐!”
“말에…….”
“말?”
다급히 나온 한마디.
하울 자작의 침통한 얼굴에서 대답이 흘러 나왔다.
“그 자의 말에 차여서 전사했습니다.”
“뭐?”
퍼거슨 후작의 반문에 하울 자작이 분한 듯 입을 열었다.
“그 자의 말이 날듯이 뛰어서 일격에 타일렌 남작을 죽였습니다.”
“말이…… 말이 되는가!”
“정말 말이 그랬습니다.”
퍼거슨 후작은 이미 전사한 타일렌 남작에 대해 더 이상 애통하다든지 아쉽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머저리라는 말만 삭일뿐이었다.
“아악!”
콰쾅!
그때 3차 저지선에서 굉음과 함께 병사들이 날아갔다.
“도망쳐!”
“사람 살려!”
패닉에 빠진 병사들이 거미새끼마냥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 모습에 퍼거슨 후작이 안색을 굳혔다.
“저 자인가?”
계속되는 비명소리가 어우러진 상황에서 퍼거슨 후작의 입이 열렸다.
“그렇습니다.”
후방까지 관통하며 나타난 사내의 갑주에는 다섯 개의 뿔이 피에 물들어 있었다.
* * *
고진천과 강쇠의 진격이 잠시 멈추었다.
“흐음.”
그의 주변은 아직도 뼈를 끊어내고 목숨을 취하는 소리로 아수라장이 되고 있었지만, 오연히 선 그에게로 다가서는 북로셀린의 병사들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기회를 잡은 듯 생존을 위해 이리저리 달릴 뿐 이었다.
“열제 폐하!”
“음.”
어느새 주변을 정리 했는지 을지부루와 우루가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진천은 자신을 부르는 그들의 음성에도 불구하고 전방을 주시했다.
“본진인가 봅네다.”
우루가 진천의 시선을 따라 전방을 바라보고 한마디 하자, 부루가 대부를 고쳐 쥐며 호탕하게 외쳤다.
“이대로 들이닥쳐서 조지는 겁네다!”
“저 깃발 화려하군.”
진천의 시선은 퍼거슨 후작이 있는 곳에 머물렀다.
화려한 깃발. 바로 북로셀린 군의 총사령관 기였다.
“저건 적의 총사령관 깃발이 맞습네다!”
남로군과 매의 군단에서 알려주었던 북로셀린 군 총사령관의 깃발이 눈앞에 있었다.
“잘 됐군.”
진천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어졌다.
머리를 자른다.
진천이 전쟁에서 가장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자신의 앞에 달려와 준 것이다.
“기런데 저 아새끼래 선두에 나서 있는 겁네까? 배포하난 좋디 않습네까?”
부루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주절거리자 옆에 있던 우루가 혀를 찼다.
“쯧쯧. 옆에서 보는 사람 복장 뒤집을 생각 아니면 고조 어깨 위에 있는 장식품 열심히 굴리디 말라우.”
“뭐이가 어드레!”
버럭 화부터 내는 부루였다.
그런 부루에게 우루가 콧김을 내뿜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보라우, 그동안 전방에는 대치가 계속 이루어졌으니 방비가 잘 되어 있을 거 아니네? 거기다가 전면으로 대치하던 정예가 공격해 온다면 맘 놓고 싸울 분위기를 맨들어야 하디.”
“길티.”
어느새 화낸 것도 잊고 우루의 말을 듣고 있는 부루였다.
“기럴라문 뒤가 편해야 하디 않네. 한마디로 빠른 시간 내에 우리를 정리 하갔다는 뜻이디.”
“쩝, 기렇군.”
부루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총사령관의 판단으로서는 훌륭했으나, 결국에는 늑대를 피해 범의 아가리로 들어선 결과인 줄은 모를 것이다. 범의 포효가 전장을 뒤흔들었다.
“크하아아아아!”
어느새 진천의 손에는 태양처럼 붉디붉은 깃발이 들려있었고 그 안에서 삼족오가 내려보고 있었다.
“돌격 앞으로!”
부루의 음성이 다시금 울려 퍼지자 진천을 선두로 묵갑귀마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입니다!”
“저 깃발이 뭘 상징하는 것이지?”
“저도 처음 봅니다.”
엄청난 기합을 내며 달려드는 가우리군을 보는 퍼거슨 후작의 음성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긴 전투를 이끌어온 노장의 여유인가?
“우리도 가지. 나를 따라라!”
퍼거슨 후작의 기마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호위기사단이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묵갑귀마대의 예봉을 향해 달려가는 북로셀린의 정예 기마들이었다.
제37장 전설의 한 구절
위이이잉!
과중하게 힘을 쓴 탓에 안색이 약간 창백해진 시아론 리셀은 마나가 공명하는 소리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아군이 귀환한다!”
밝은 빛에 휩싸이며 나타난 것은 연휘가람과 함께 떠났던 검수들이었다. 밝은 빛이 사라지자 리셀의 눈에 가장 먼저 뜨인 것은 웅삼과 그의 부축을 받고 있는 휘가람의 모습이었다.
“아니 무슨 일…….”
“불 때!”
리셀이 몸을 일으키며 웅삼에게 질문을 던졌으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웅삼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썅! 빨리 움직여!”
욕 소리가 갑자기 난무하는 가운데 리셀은 휘가람에게서 이상한 힘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대체 무슨 힘이지…….”
휘가람의 약간 푸르스름한 안색에 대한 안위보다는 의아함이 앞서는 리셀이었다. 그런 가운데 검수들과 대기하던 병사들이 나뭇가지들을 이리저리 쌓아놓고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빨리 불 붙여!”
마치 익숙한 듯이 움직이는 상황에 리셀과 마법사들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지켜만 볼뿐이었다.
타탁!
“누가 화력 좀 높여!”
“제가 하겠습니다.”
웅삼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자, 구경만 하던 마법사들이 마법을 이용하여 나무들이 쌓인 곳에 불을 붙였다. 나무가 모자라는 듯하자 검수들은 피에 절은 옷가지들을 벗어서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어서 모셔라!”
치부만을 가린 벌거벗은 검수들은 휘가람을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곳의 가운데에 옮겨다 놓고 도망치듯이 달려 나왔다.
치이익.
“크윽!”
“으으윽.”
검수들의 몸이 열기에 살짝 익은 듯 붉었고, 검은 머리카락들은 불길에 그을려 군데군데 허옇게 변해 있었다.
“이게 무슨 짓들이오!”
검수들이 그 뜨거운 곳에 휘가람을 놓아두고 도망치듯 달려 나오자 마법사들이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리셀만은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변화는 오래지 않아 나타났다.
치이이이!
“헉!”
“저게 뭐지?”
치이이이익!
휘가람과 불기둥 사이에서 갑자기 수증기가 뿜어져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마법사들의 눈이 놀란 토끼마냥 휘둥그레졌다.
“제길! 탈것이 모자라다. 더 가져와, 당장!”
웅삼의 목소리가 검수들의 지친 몸과 자리를 지키던 병사들의 어리둥절한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러는 가운데 리셀의 입술이 떨리듯이 움직였다.
“저…… 정령?”
휘가람의 몸 주변으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푸른 기운이 주변을 둘러싼 화마와 싸움을 하듯이 퍼져나갔다.
분명 마법은 아니었다.
주술이라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순수함.
순수한 자연의 힘.
정령이라 불리는 것들의 향기가 휘가람에게서 배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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