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333
403화 함정에 빠지고…….
* * *
“킁.”
“뭐냐, 이거?”
“함정?”
삼두표가 사방을 뒤덮는 검은 기운에 인상을 찌푸렸다.
기율도 마찬가지로 미간을 모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와중에 몽류화가 던진 한마디는 둘의 염장을 질렀다.
“몰라서 묻는 거 같냐?”
“킁, 대가리는 장식이지?”
“왜이래? 내가 적이냐? 잘하면 치겠다!”
셋이 아웅다웅하는 사이 주변을 둘러싸는 기색이 느껴졌다.
“크으으.”
“크흐.”
그제야 주변을 다시 둘러본 류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잘하면 침 흘리겠다. 반쯤 벌리고 크흐크흐 거리는 게.”
“그건 그런데 입고 있는 거 봐라. 소울아머 아니냐? 숫자 보니 좀 소름 돋는데?”
류화와 기율이 연달아 한마디씩 던졌다.
“야, 두표야.”
크허엉!
두표가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자신의 말이 씹혀 버린 기율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아, 저 자식은 대화가 연결이 안 돼! 대화가!”
“저놈은 맨날 짐승이랑 어울리다 보니 사람이랑 대화하는 법을 까먹은 거 같다.”
둘은 그 말을 주고받은 뒤 동시에 달려들었다. 물론 두표가 싸우는 방향이었다.
함정에 빠진 이상 따로 노는 것보다는 셋이 함께 하는 것이 나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중만은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어어어?”
검은색으로 물든 사방을 보며 당황 반, 꿈인가 생신가 하는 표정 반으로 사방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변에는 묵갑귀마대 세 명이 긴장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뀌익!”
“뀍!”
고르고 고른 오크전사들 오십여 명이 흉성을 퍼트리며 무기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주변으로 서른이 넘는 인간병기들이 있었다.
물론 오크전사들이 인간병기들과 싸워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전에 싸운 인간병기들은 소울아머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것들은 그걸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 우리 함정에 빠진 건가?”
중만의 중얼거림에 묵갑귀마대원 셋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듯하오.”
“그러니 개념 좀 챙기시고.”
“그런데 우리가 왜 함정에 빠진 거지?”
묵갑귀마대원들은 허탈함 반 어이없음 반이었다.
“아마 이거 바이칼 공작님을 노린 것인 듯하다.”
“아아.”
원래 우중만은 본진 쪽에 있었다. 하지만 고윈의 지휘에 따라 전진을 거듭했다.
바이칼 공작의 위치를 대신했던 것이다.
물론 그가 바이칼 공작을 대신할 위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만의 호위로 붙은 오크전사들의 전력은 달랐다.
상당히 강력했던 것이다.
오크는 야성의 종족.
중만이 그들이 벌이는 전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전의가 살아 오른다.
그 때문에 중만의 위치 역시 전진배치 되었던 것이다.
그 덕에 바이칼 공작이 빠져야 하는 함정에 그가 빠진 것이다.
물론 바이칼 공작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함정에 빠졌지만 말이다.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지한 중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보단 덜 당황하네?”
“그러게.”
“흠.”
세 명의 묵갑귀마대원들은 그런 중만이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자 중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이 세상에 끌려와 오크 우리에 던져졌을 때 충분히 당황했네.”
“풉!”
“큽!”
“푸웁!”
오크 우리라는 말에 셋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당시 며칠 만에 앙상해진 중만의 모습을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가 당황해서 날뛰었다면 오히려 곤란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저것들 상대할 수 있겠는가?”
애써 불안감을 숨긴 중만이 슬쩍 물어보자 세 명의 묵갑귀마대원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흐음. 많은데.”
“솔직히 소울아머 유저를 일대 일로 상대하기는 좀 어렵수.”
“그렇긴 한데.”
그들의 시선이 오크전사들을 향했다.
두려움 없는 모습.
여느 오크들과도 비슷했지만 중만의 주변을 지키는 오크전사들은 더했다.
오크들 입장에서는 최고의 지위가 바로 오크로드를 지키는 자리인 것이다.
그런 만큼 강한 개체만이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거기에 묵갑귀마대원들의 체계적인 다구리를 맞아 가며 실력을 쌓았다.
이미 야생의 오크와는 차원이 달라진 존재였다.
물론 이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오크는 몬스터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유사인종으로 봐도 되지 않는가 하는 시선도 있었다.
그런 첨예한 대립을 종식시킨 건 진천이었다.
‘잘못되면 중만이만 때려잡으면 된다.’
순간 다들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 그 소리를 들은 중만이 하얗게 질리며 오크들의 교화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말이다.
그런 오크전사들이었다.
그 덕에 소수지만 묵갑귀마대에 비견될만한 전력이 완성된 것이다.
어쩌면 그 짧은 시간에 오십이나 되는 강력한 전력을 만들어 낸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그 공이 중만에게 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이 달리자 중만의 능력이 발휘되었다.
원래 정치인 일 때도 능한 게 감언이설에 국민농락이었다.
그걸 대가로 배를 불렸는데, 배를 불일 일이 사라지고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능력이 발휘되니 반쯤은 사이비 교주가 되었다 할 수 있었다.
마치 오크들의 해방을 이끌어 낸 구세주이기도 했고 말이다.
한때 중만이 한탄했다.
자신이 지금처럼만 했다면 서울에서 끌려올 일도 없었고, 또 대통령도 노려봤을 것이라고 말이다.
다들 그 말에 피식피식 웃기는 했지만 나름의 정치력은 입증된 것이다.
물론 그 덕에 이 함정에 대신 빠지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그럼 붙어 볼까?”
묵갑귀마대원들의 말이 신호가 되었는지 오크전사들과 소울아머를 입은 인간병기들이 서로를 향해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흐음.”
연휘가람이 손으로 검은 구를 툭툭 쳐 보았다.
뭔가 딱딱하지는 않는데 그를 밀어내는 반발력이 꽤 컸다.
휘가람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창백한 얼굴을 한 카버 왕국 마법사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날 여기 가두려 했다고? 이 어설픈 함정에? 풉, 이런 거에 누가 갇히지?”
휘가람이 피식 웃으며 묻자 마법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때 한 마법사가 가지고 있는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고진천을 가뒀다! 삼인방도 마찬가지다! 바이칼 공작으로 추측되는 인물도 성공했다! 나머지는 어떻게 되었는가!]
“…….”
휘가람의 얼굴에 어설픈 미소가 서렸다.
“물론…… 나름 잘 꾸며서 갇힐 수도 있겠지?”
생각과 다른 대답이 내뱉어졌다. 진천이 갇혔다는데 어쩌겠는가.
심지어 다른 이들도 말이다.
‘그런데 바이칼 공작을 가둬? 아…….’
이곳에 없는 이를 가두었다는 말에 휘가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피식하니 웃음을 흘렸다.
누군지 알 듯했다.
이전에 작전 회의할 때 그 빈자리를 어떤 식으로 채울 것인지 그 방안을 논의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연달아 음성이 울려왔다.
[계웅삼이 아니야! 초인이 또 있다! 실패! 실패!]
[제라르도 아니다! 이곳도 실패다!]
새로 탄생된 초인들이다.
거둬 먹여가며 키웠으면, 밥값을 해야 하는 법이다.
그들을 계웅삼과 필리언 제라르의 위치에 배치했다.
물론 그들의 시늉만 내는 쪽으로 말이다.
다행히 둘은 피한 듯 했다.
당연했다.
이들이 예측을 한 것은 웅삼과 제라르였다.
행동 양식이 같을 수는 없었다.
특히 웅삼의 경우 특별한 전투 위치가 없었기에 있었어도 걸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휘가람이 환두대도를 고쳐 잡으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번엔 난 마법사들이랑 싸워야 하나?”
툭 하고 말을 내뱉은 휘가람이 주변을 훑었다.
거의 백은 되어 보이는 술법사들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휘가람의 시선이 다시 마법사들을 향하자 그들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그들에게 지금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었다.
“계웅삼과 제라르로 추측했던 이들은 또 다른 초인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자리를 피했사옵니다. 그리고 연휘가람 역시도 함정을 피했사옵니다.”
“그래도 절반은 가두었군.”
마법사의 보고에 프라임 론 아가드 공작이 별로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고진천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우리의 절반.
물론 그 하나의 힘이 진짜로 그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우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절반이라는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자, 가두었으니 반격을 해 볼까?”
프라임 공작이 드디어 칼을 빼 들었다.
가든 퍼시발 후작은 전투는 뒷전이고 시선을 고정한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젠장. 아까 기어 나왔을 때 잡았어야 했어.”
“너무 티를 내셨습니다.”
“반가워서 그랬지.”
헨리 퍼시발 백작의 핀잔에 가든 후작은 입맛을 다시며 투덜대었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또다시 투덜거렸다.
“쯧, 갑자기 뭔 함정인지. 이름값이 아깝군.”
“이름값을 적절히 이용한 겁니다.”
가든 후작은 한마디 한마디 꼬투리 잡는 헨리 백작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헨리 백작이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왜, 억지로 끌고 오니 심사가 꼬였나?”
가든 후작의 말에 헨리 백작이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을 게 없는 전쟁이잖습니까.”
“쩝.”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국 가든 후작에게는 남을 게 없는 전쟁이긴 했다.
어쨌든 토벌은 실패했고, 북부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물론 서로 공을 세우기 위한 귀족들의 암투에 밀린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헨리 백작은 그게 가든 후작의 탓이 아님에도 갑갑했던 모양이었다.
“어쩌시겠습니까.”
“어쩌긴 딱 보니 전황에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틈을 봐야지.”
“끄응.”
아직까지도 집념을 버리지 않은 그의 모습에 헨리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든 후작에게 주어진 계획에 제대로 똥칠한 고윈이라는 자가 미운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후작이나 돼 가지고 백의종군이랍시고 여기까지 와서 전투에 끼어든다는 게 영 모양새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그의 가문의 병력을 놔두고 왔다는 것이다.
참전하는 형식을 띄웠으면 아마 미끼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헨리 백작과 호위 몇 만을 대동한 채 왔으니 그럴 걱정은 없었다.
다만 모양새가 안 좋다는 점 하나다.
어쩌면 이게 가든 후작이 출세와는 동떨어지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때 헨리 백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과연 쉽게 전황이 바뀔지 모르겠습니다.”
“왜?”
가든 후작이 묻자 헨리 백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함정의 형식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적들의 운용형태를 보면 우리 시에라 제국에 비해 밑이 아닙니다.”
“그야 저쪽도 제국이니…….”
가든 후작의 말에 헨리 백작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끊었다.
“아닙니다. 저쪽의 운용방식을 제가 알지는 못하지만, 제국의 규모와 힘에 맞는 방식이 아닙니다.”
“응?”
“강자를 제대로 상대해 본 운용 방식이라는 겁니다.”
“강자를 상대해 본 방식? 그들은 그쪽에서 최강이라 불렸다며?”
가든 후작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자 헨리 백작이 입맛을 다시며 답했다.
“그건 그런데 누구나 질 것이라는 전쟁을 뒤집고 최강으로 올라섰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즉 우리에게는 까다롭다는 이야깁니다. 허세가 없으니까요.”
헨리 백작의 말에 가든 후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공감되는 이야기였다.
허세가 없다는 말은.
제404화
제국은 제국의 허세가 있다.
제국이라는 이름값 때문이었다. 사실 그 때문에 지금 상대방에게 휘둘린 감도 있었다.
최강대국이라는 이름에 선입견을 가졌던 것이다.
시에라 제국이 최강대국이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선입견이었다.
지금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 역시 그랬다.
전술에 뛰어나다고만 했지, 그 안을 자세히 살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히 기마전술 같은 경우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 같으면서도 유기적이며 또 상당히 전술적으로 작은 힘으로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쪽으로 발달되어 있었다.
자신의 피해는 최소화 하면서 적의 피해는 최대화 하는 면도 있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전력적으로 불리한 국가들에게서나 보이는 특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특성과 강력한 힘을 동반한 적을 보니 질릴 정도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 병력의 차이는 적은 차이가 아니었다. 특히 대회전을 펼칠 때에는 더더욱 큰 차이였다.
그러나 훈련의 차이를 봤을 때 이건 절대적일 수가 없었다.
일반 병력이나 기사들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카말 왕국이나 필리어리 왕국의 경우만 봐도 시에라 제국의 아래라 볼 수 없었다.
시에라 제국 이상으로 무장에 충실한 국가가 필리어리 왕국이었다.
물론 돈의 규모로 따지면 시에라 제국이 더 부자는 맞았다.
하지만 이 큰 땅덩이를 생각했을 때 그 무장이 공평하게 돌아가느냐는 또 아니었다.
반면 필리어리 왕국은 제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마르지 않는 샘물은 아니었지만 그걸 바탕으로 병사들의 장비를 충분히 보강해 왔던 것이다.
장비도 녹슬고 깨어지는 것이지만 한번 갖추고 유지보수에 신경을 기울이면 오래갈 수 있다.
처음 맞출 때 큰돈이 들지 이후에 큰돈이 드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런 튼튼한 장비를 바탕으로 병사들의 질을 높여 온 곳이 필리어리 왕국이었다.
그리고 카말 왕국은 그야말로 처절하게 살아남아 승리를 쟁취한 국가였다.
삼국동맹이기에 필리어리 왕국의 도움을 받아 장비면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또 국가적으로도 항상 불안한 상황이었기에 먹고 마실 것을 아껴서 병사들의 무장을 충실히 해 온 곳이 또 카말 왕국이었다.
미친놈 운운하지만, 바사 왕은 검소했다.
변경백 출신에서 왕이 되었다면 거들먹거릴 법도 한데 절대 그렇지 않았다.
왕이 그러한데 휘하 귀족들은 또 어떻겠는가.
국가 자체가 항상 전쟁을 준비하는 나라가 바로 카말 왕국이었다.
그렇기에 터그람 왕국의 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시에라 제국의 귀족들은 쾌재를 불렀었다.
배부른 터그람이 배고픈 카말보다 상대하기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두 왕국의 기사나 병사들의 전력은 시에라 제국의 아래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모아 놓은 병력의 절반 이상은 사실 징집병에 불과했다.
상비군의 상당수가 초반 전투에서 소모되었던 것이다.
이전의 전쟁 경험과 내전을 통해 키운 병력들이 초반에 대거 소모되어 버린 탓에 지금의 병력을 그들에 비교하기에는 창피한 부분이 많았다.
그 때문에 프라임 공작이 시간을 끌면서 병사들의 훈련에 매진했었다.
그 덕에 그나마 지금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전반적으로 우왕좌왕 하는 모습만 보게 될 뻔했다.
이는 가든 후작도 토벌을 할 때 비슷하게 겪었던 문제 아닌가.
“그래서 함정을 판 것이지.”
가든 후작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마따나 프라임 공작이 함정을 판 밑바탕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그리 생각하니 흉을 봤던 게 조금은 창피한 느낌이 들었다.
“쩝.”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진형이 바뀌기 시작한 것을 보니 함정이 어느 정도 성공을 한 듯합니다.”
“죽였나?”
“그건 아닌 듯합니다. 상대방에도 마법사들이 있어 그건 어렵다는 소리는 들었지요.”
“그건 어디서 들은 건가?”
사실 가든 후작의 가신이지만 지금 이 진영에서는 딱히 하릴없는 신세였다.
지휘회의에 참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런데 꽤 유용한 정보를 접하고 있는 모습에 가든 후작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 봬도 지휘부의 참모들 중에 저를 존경하는 친구들이 꽤 있습니다.”
“……존경씩이나?”
“칼질은 못해도 머리는 잘 굴리잖습니까. 그리고 지휘부의 상당수는 북방에서 온 친구들도 많고 말입니다.”
“하긴 중앙에서 온 참모들이 터그람 정벌 때 싸그리 죽었다지? 그리팔 공작의 수 때문에.”
“예. 그래서 자세하진 않아도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일정 시간 가둘 수 있는 함정이라 하더군요. 거기에 함께 인간병기를 투입시키고 말입니다.”
인간병기라는 말에 가든 후작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솔직히 나쁘지 않은 효율을 가지고는 있지만 쓰는데 있어 찝찔함이 없을 수 없었다.
다만 대륙 최강이라는 위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된다.
그 때문에 이렇게 써먹는 것이지만 말이다.
어차피 전 대륙을 다 해 먹었는데 남은 곳들이 힘을 합쳐 봐야 뭘 하겠는가.
“그거가지고 그들을 잡는다고? 듣기로는 소울아머 유저도 몰살시키는 괴물들이라던데?”
가든 후작의 말에 헨리 백작이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기사출신들이랍니다.”
“응?”
“그 함정에 동원된 인간병기들 말입니다.”
기사출신이라면 좀 다를 수 있었다.
일반 노예나 백성들을 인간병기화 했을 때도 기사를 찜 쪄 먹는 괴력을 보였다.
그런데 기사라면 어떻겠는가.
그럼에도 조금 미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때 헨리 백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창고에 처박혀 있던 초기형 소울아머를 입혔다고 합니다.”
“그 불량품을?”
제어장치가 없는 소울아머.
그것 때문에 초반에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희생되었는가.
하지만 인간병기 자체가 소모성인 존재다.
“머리를 잘 썼다고 해야 하나? 쏜튼이겠군.”
“예.”
그때 마법사들이 안절부절 못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주변에 포착되었다.
“함정은 성공했다지 않았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좀 이상한데요?”
작전이 잘 되어가는 상황에 왜 마법사들의 안색이 저리 하얗게 될 이유가 없었다. 헨리 백작이 다가가 입을 열었다.
“여기 가든 퍼시발 후작님을 보시는 헨리 백작일세. 아직 문제가 있나?”
가드 후작을 살짝 팔아먹으며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인가’가 아니었다.
‘아직 문제가 있나?’라며 물었다. 살짝 넘겨짚은 것이다.
그러자 마법사들 중 하나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연락이 두절입니다.”
순간 헨리 백작이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정돈하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직도?”
“예. 황성은 물론이고 본국도…….”
마법사들은 주저하면서도 솔직히 말했다.
지금 그들은 만일의 사태를 상상해야만 했다.
만약 본국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들은 어디도 갈 곳이 없었다.
“습격인가…….”
헨리 백작의 중얼거림에 마법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적진에 몇몇 초인들이 부재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몇몇 초인?”
“계웅삼과 제라르 그리고 대마법사인 리셀까지 보이지 않는 듯 합니다. 함정이 발동할 때 가장 우려했던 것이 대마법사인 리셀이었습니다만…….”
“그렇군. 참 그러고 보니 개전 첫날 날뛰었던 그 말론 왕국의 소울아머 유저들도 보이지 않는 듯한데?”
“그, 그렇습니다.”
“이런, 큰일이군.”
헨리 백작이 마법사들을 향해 위로하듯 말하자 그들의 안색은 더더욱 나빠졌다.
“걱정 말게. 갈 곳 없으면 우리 가든 후작님을 찾아오면 되네. 중용해 줄 것이야. 아니지. 자네들 지금 임무가 있나?”
“아, 아직은 대기입니다.”
“위험하니 자네들에게 호위를 붙여 주지.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너무 위험하군.”
그렇게 말하곤 가든 후작에게 되돌아갔다.
“호오위이?”
“호위도 필요 없다고 안 끌고 오려 하셨잖습니까.”
“끙.”
“혹시 몰라서 그럽니다.”
“자세히 듣지 못해서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나?”
가든 후작이 조용히 묻자 헨리 백작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가든 후작이 자신의 호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친구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게. 제국의 중한 손님이니까.”
“알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들은 탓에 호위들은 군소리 없이 마법사들을 향해 갔다.
가든 후작의 호위인 만큼 로우급 유저둘이 포함된 기사 전력이었다.
순간 마법사들의 얼굴에 약간이지만 안도의 빛이 감돌았다.
그들에게서 떨어진 헨리 백작은 가든 후작에게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도에 사단이 난 듯합니다.”
“뭣!”
순간 가든 후작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표정 거두십시오.”
“으음.”
“그리고 저들의 나라에까지 연락이 닿고 있지 않는다고 합니다.”
헨리 백작의 말에 가든 후작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만약에 황제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 전쟁을 이긴다고 해도 이기는 게 아니었다.
“개판이 될지 모르겠는데.”
“이미 개판 아니었습니까?”
“아아.”
대영주들의 독립을 말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인 건가?”
“그냥 일단 상황에 맞게 대처해야지요.”
헨리 백작은 가든 후작에게 그리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지금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눈을 빛내며 생각했다.
‘대영주들도 독립하는 마당에 우리라고 못할 게 있는가?’
헨리 백작의 마음속에 조금씩 야망이 자리 잡았다.
“얼굴이나 보면 좋겠는데.”
여전히 고윈에게 집착하는 가든 후작을 보며 헨리 백작은 쓴 웃음을 머금었다.
* * *
“크워어억!”
헬리오스 바이칼 공작의 롱소드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인간병기의 몸통을 갈랐다. 하지만 피가 뿌려지면서도 인간병기는 빠르게 돌아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하지만 상대는 바이칼 공작이었다.
다리를 뒤로 당기며 롱소드로 인간병기의 목을 따 버렸다.
툭, 데구르르르.
인간병기의 머리통이 굴러가면서 그의 몸통에서 푸른 불길이 솟구쳤다.
“어이쿠 깜짝이야!”
소울아머를 입은 탓에 생기가 소진되는 불길이었다.
이게 영 어색했던 바이칼 공작이었다.
“후우.”
바이칼 공작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상당수의 호위들이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반면에 아직도 소울아머를 입은 인간병기들은 수가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이러다가 애들 다 죽이겠군.”
씁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맴돌았다.
소울아머 유저보다 더 강하지는 않았다. 거칠고 투박함 덕에 틈이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소울아머 유저보다 위험했다.
목숨을 도외시했기 때문이었다.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려도 달려드는 그들의 행동에 호위기사들도 당황하며 하나둘씩 쓰러졌던 것이다.
“이건 생각 못했군.”
바이칼 공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모두 한곳으로 뭉친다!”
그의 명령에 길을 뚫고 가던 호위기사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달려드는 인간병기들이 있었지만, 이미 어느 정도 그들의 전투방식에 적응이 된 호위기사들은 빠르게 바이칼 공작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방어에 치중하라.”
“후작님?”
“하지만 시간이…….”
“다 죽을 셈이냐?”
바이칼 공작이 서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는 막아라. 공격은…….”
바이칼 공작의 몸에서 살기가 솟구쳤다.
맹수와 같은 표정을 지은 바이칼 공작이 성큼 나서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한다.”
제405화
소울아머를 입은 인간병기와 바이칼 공작의 전투를 보던 카버 왕국의 소울아머 유저들 입에서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고작 몇 안 되는 인간병기였다.
그나마 시에라 제국과 교류를 위해 체류 중이었던 술법사들의 보호를 위해 따라붙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벌써 다 소진된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십여 기에 불과하지만 그것들이 바이칼 공작에게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남은 것은 강제로 소울아머 유저가 된 이들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이칼 공작의 기사들을 꽤 줄였다는 점이었다.
바이칼 공작이 시선을 그들에게 돌렸다.
“온다!”
바이칼 공작이 땅을 박차고 나가자 땅거죽이 폭발을 했다.
바닥이 움푹 파이면서 사방으로 돌과 흙이 튀었다.
그와 동시에 강렬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콰차앙!
“막아?”
바이칼 공작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그가 나아가며 휘두른 일격을 소울아머 유저가 막아 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격은 끝이 아니었다.
퍼엉!
바이칼 공작의 뒤이은 발길질에 소울아머 유저의 몸뚱이가 마치 투석기라도 쏘아 보낸 것처럼 튕겨져 나갔다.
콰콰쾅!
순간 뒤쪽에 있던 소울아머 유저 몇이 날아오는 동료에 의해 맞아 나자빠졌다.
강렬한 일격을 날린 바이칼 공작이 낮은 각도로 쏘아지듯 공중으로 살짝 떠올랐다.
이어 역으로 쥔 롱소드를 그대로 내리찍었다.
콰직!
“케으으!”
“더럽다. 침 묻히지 말거라.”
그렇게 으르렁 거리듯 한마디 씹어뱉은 바이칼 공작이 벌려진 입에 박혀 들어간 롱소드를 비틀어 당겼다.
촤아악!
입을 중심으로 한쪽이 잘려 나가 너덜거렸다.
그럼에도 소울아머 유저는 숨이 끊어지지 않았는지 버르적거리며 무기를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바이칼 공작이 그런 어설픈 공격에 당할 사람도 아니었다.
또 이미 한 번의 접전을 통해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빠악!
바이칼 공작이 롱소드를 한쪽으로 그어 빼내면서 그대로 발로 덜렁이는 머리통을 걷어찼다.
우직!
살이 뜯겨지며 소울아머 유저의 머리통이 달려드는 또 다른 소울아머 유저의 안면을 강타했다.
“크엑!”
안면을 맞아 비틀거리는 소울아머 유저에게 달려간 바이칼 공작이 그대로 롱소드를 내리그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소울아머 유저가 무기를 들어 막으려 했다.
본능적인 반사 신경이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계산했는지 바이칼 공작의 롱소드는 무기를 들어 막으려 했던 팔뚝을 그대로 잘라 버렸다.
소울포스의 보호도 의미가 없었다.
서걱!
그와 함께 바이칼 공작이 옆으로 튕기듯 빠져나왔다.
퍼퍽! 퍽!
동시에 팔뚝이 잘려 나간 소울아머 유저의 몸에 두세 개의 칼날이 박혀 들었다.
동료 소울아머 유저가 바이칼 공작을 노렸던 공격에 오히려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내몰린 소울아머 유저에게 동료애는 없었다.
“크억!”
순간 잘못 공격을 했던 소울아머 유저들이 신경질적으로 칼을 뽑아내었다.
그러자 온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소울아머 유저가 비틀거렸다.
그런 상황임에도 소울아머 유저는 쓰러지지 않고 반대 손으로 떨어진 무기를 쥐어든 채 바이칼 공작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공격에 대한 본능은 있을지라도 한계는 명확했다.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그의 몸이 푸른 불빛으로 휘감겼다.
동시에 거의 실시간으로 쭈그러져 가는 소울아머 유저의 모습.
마치 순간 나이를 수십 년 이상 먹어가는 것과 같아 보였다.
그렇게 푸른 불길에 휩싸인 소울아머 유저가 몇 걸음을 걷다가 덜그럭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움직임은 없었다.
그 모습에 카버 왕국의 소울아머 유저들은 흠칫 놀랐다.
이런 말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어차피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바이칼 공작은 잠시 움츠렸다가 달려드는 소울아머 유저들을 막아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일격 일격은 강력했다. 하지만 소울아머 유저도 수월하지는 않지만 나름 잘 막아 내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공수가 뒤바뀐 상황.
“죽어라!”
사방에서 소울아머 유저들이 흉성을 터트리며 바이칼 공작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방진을 형성한 기사들이 움찔거렸다.
누가 봐도 바이칼 공작이 위기에 빠진 듯했기 때문이었다.
“도우러…….”
“아니.”
기사들 중 하나가 어두운 안색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들을 지휘하던 선임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지만…….”
“지금 많이 화나셨다.”
그 선임기사는 바이칼 공작과 많은 전장을 누볐던 이였다.
그가 지금 바이칼 공작의 분노한 눈빛을 보았던 것이다.
“크아악!”
괴물과 같은 울림이 바이칼 공작의 입에서 울려 퍼졌다.
카라라랑!
괴성을 터트린 바이칼 공작이 롱소드를 크게 휘둘렀다.
각기 다른 궤적으로 날아드는 공격들이 한 번의 휘두름으로 연달아 튕겨 나갔다.
그와 동시에 바이칼 공작이 손을 뻗었다.
콰직!
그가 뻗은 손아귀가 지척에 있던 소울아머 유저의 안면을 덮었다.
이어 손아귀가 독수리의 발톱마냥 안면을 움켜쥐었다.
콰드득!
“끼에에엑!”
갈고리처럼 쥐여진 바이칼 공작의 손가락 두 개가 소울아머 유저의 눈알 두 개를 후벼 파며 들어갔다.
안구가 터지며 피눈물이 흘렀다.
남은 손가락은 소울아머 유저의 하관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안면을 잡힌 소울아머 유저가 무기를 휘두르려 했으나 바이칼 공작이 한발 빨리 움직였다.
“끄아아!”
바이칼 공작이 안면을 움켜쥔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소울아머 유저의 육중한 몸뚱이가 붕하며 떠올라 휘둘리기 시작했다.
터터텅!
“크엑!”
“케에에!”
소울아머가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푸른빛을 뿌렸다.
그 때문에 오히려 그 어떤 병기보다도 단단한 병기가 되어 휘둘러졌던 것이다.
그렇게 한 바퀴 휘두른 바이칼 공작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한복판에 집어던졌다.
그러자 구겨지듯 처박힌 소울아머 유저가 몸부림을 쳤다.
그렇게 주변의 적들의 포위를 풀어낸 바이칼 공작이 입을 열었다.
“너냐?”
그때 바이칼 공작의 시선이 한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아수라장에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소울아머 유저.
그를 바라보며 바이칼 공작이 눈을 빛냈다.
‘괴물이다.’
바이칼 공작이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제국전쟁에서 초인들이 대거 죽어 나가면서 세대교체가 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이.
무신이라 불리는 이.
물론 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의 소울아머 유저라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더불어 그의 최후를 직접 마무리하여 공을 세울 마음에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랬는데 지금 바이칼 공작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물론 아직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병기들은 소진 되었지만 소울아머 유저들은 아직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포위를 뚫어낸 바이칼 공작의 모습을 본 지휘관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그럼 그렇지.”
갑주의 색이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기저기 갈라진 갑주에서 연신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너냐?”
지휘관을 정확히 알아본 그의 시선에 이들을 지휘하던 이가 순간 다시 흠칫했다.
하지만, 상황은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지휘관이 입을 열었다.
“다 늙은 퇴물이 호기를 부리는구나.”
“큭큭큭!”
“어차피 이 마법은 대법사 이상의 능력자가 없다면 깨지 못하지. 물론 바이칼 공작 그대가 깰 수 있게 놔둘 생각도 없고.”
그의 말에 바이칼 공작이 얼굴에 튄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난.”
손을 털어내자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그가 살광을 뿌리며 말을 이었다.
“네놈들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
숨이 턱 막혔다.
한마디 한마디가 뱉어질 때마다 이 좁은 공간을 채우는 살기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뿜어져 나오고 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목숨을 도외시한 소울아머 유저들이 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소울아머 유저들이 일제히 한걸음씩 뒤로 물러섰던 것이다.
“이, 병신 같은 것들이! 네놈들의 가문을 생각해라!”
그 소울아머 유저의 외침에 물러섰던 소울아머 유저들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그 모습에 바이칼 공작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뭔가 강압적인 느낌.
나름 필사적이지만 뭔가 어색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소울아머를 입었지만 뭔가 힘을 주체 못하는 모습에서 이들이 정상적인 전력이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권력싸움이나 그간 전쟁에서 패배한 가문의 이들인 건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많았다.
그때 지휘관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가슴의 소울스톤을 돌려라! 짧지만 지금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다! 가문의 생존뿐 아니라 공을 세우는 거야!”
지휘관이 바이칼 공작의 살기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악다구니를 썼다.
지휘관의 목소리에 소울아머 유저들이 서슴지 않고 가슴에 있는 소울스톤을 돌리려 했다.
그때 바이칼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거 돌리면 죽는 건 아나?”
순간 소울아머 유저들의 몸이 흠칫하며 굳어졌다.
“보아하니 소울아머를 처음 입어 본 듯한데. 우리 기사들이 소울아머를 입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바이칼 공작의 말에 그들의 동공에 혼란이 찾아왔다.
사실 이유는 벽을 넘는 데에 있어 방해가 된다는 점이었다.
그뿐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에서 오히려 전체적인 실력이 감소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시에라 제국과 다른 왕국들의 소울아머 유저들을 상대하고 나서 느낀 단점들이었다.
사실 당장 전력에는 소울아머만 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미래와 바꿀 수는 없었다.
차라리 시간을 두고 좋은 쪽으로 활용한다면 모를까.
그러나 이런 전쟁에서 활용을 하게 되면 그 유용함 때문에 소울아머에 잠식될 수 있었다.
그걸 우려했던 것이다.
그 순간 소울아머 유저들은 소울아머를 입은 상태에서 죽은 이들이 푸른 불빛에 휩싸여 죽어 가며 고목처럼 말라 버리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실 이전부터 소울아머에 대해 알았다면 모를까, 이들은 처형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갇혀 지내던 이들이었다.
당연히 흔들릴 만했다.
그때 지휘관이 으르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적의 말을 믿을 것이냐? 나도 소울아머를 입고 있단 말이다!”
그의 말에 흔들리던 이들의 눈빛이 자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바이칼 공작의 말도 끝나지 않았다.
“그럼 너부터 돌려봐라.”
“뭐, 뭣?”
“소울아머 그 자체는 생명력을 담보로 힘을 증폭시키는 것이지. 보아하니 자신들의 힘에 휘둘리는 것이 오늘 처음 접한 듯한데…….”
바이칼 공작이 비릿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더 큰 힘을 얻는다면 소모되는 생명력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 너부터 돌려 봐라. 내 네놈에게는 싸움을 걸지 않아 주지.”
“이…… 이!”
순간 지휘관은 반박하지 못하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지휘관이 이를 악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놈들 가문을 생각하라! 차가운 감옥에서 썩어 가는 모습을! 네놈들의 부인 혹은 딸들이 노리개가 되어 평생 네놈들을 원망 할 것이다!”
그 말에 소울아머 유저들은 이를 빠득 갈았다.
어차피 현실을 안다 해도 방법은 없었다.
눈앞의 바이칼 공작을 쓰러트려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소울아머 유저들에게서 사생결단의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