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378
451화 지치지 않는 자
공기가 무거웠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분위기의 중심에는 진천이 있었다.
그 곁에는 그와 함께 버티는 이들이 있었다.
다들 지친 듯 어깨를 들썩이고는 있었지만 궁지에 몰린 자의 표정은 아니었다.
지친 것은 사실이지만, 상기된 표정이다.
가르히 왕과 롬 왕, 그리고 한쪽에 라임 왕. 그들의 곁에 있는 묵갑귀마대원 몇.
그 중앙에 진천.
십여 명도 안 되는 인원이었지만, 그 인원 주변에 죽어 나간 인원은 이백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기사와 병사들은 물론이고 소울아머 유저와 로우급 유저도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성과 때문인지 세 명의 왕들은 다들 저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그들을 보며 엡소드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분명 기회는 있었다.
롬 왕이나 가르히 왕이 지역의 패자라 하지만 실력면에서는 엡소드를 이기지 못했다.
거기에 엡소드 혼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물론 크고 작은 상처들로 온 몸이 도배가 되어 있긴 했다.
소울아머라 하지만 상대하던 이들 중에도 소울아머 유저가 섞여 있던 탓에 상처를 안 입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결정적인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진천이 불쑥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회가 한 번 날아갈 때마다 이쪽의 전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었다.
“마치 휘두르는 칼에 모가질 들이 미는 것처럼 만들다니…….”
그의 시선은 진천을 향하고 있었다. 무언가 화려한 기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이지 단순한 기술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더 감탄스러웠다.
순수한 감탄이다.
꼭 칼질을 팔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발로 눈으로 할 수도 있다.
디디고 있는 발의 자그마한 각도 변화 그리고 시선이 향하는 방향, 이 모든 것이 공격이다.
그를 상대하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몰리고, 몰리다가 당하는 순간에야 아는 거다.
하지만 적이다.
반드시 베야 할 적.
심지어 지금 그는 포위된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지치기는 한 건가?”
엡소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숨을 몰아쉬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진천이 다른 이들을 방패로 삼거나 시간을 끌며 싸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장 많은 움직임을 보인 것도 진천이었다.
나머지 인원이 방어를 통한 역습을 주로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진천은 오로지 공격 또 공격을 고수했다.
그를 상대하던 엡소드마저 지금처럼 숨을 고르기 위해 물러서는 것과는 달리 지금까지 쉼 없이 싸우고 있었다.
그때 진천이 입을 열었다.
“구경났나?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움찔거리지 말고 덤벼라.”
그리고는 엡소드를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그만 쉬고 오라는 듯.
엡소드가 이를 악물며 손을 들었다.
“공격하라.”
그의 명령에 지금까지 잠시 숨을 고르던 기사들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함성이 울려 퍼졌다.
엡소드가 외쳤다.
“놈도 사람이다! 충분히 지칠 시간이 되었다! 그의 몸을 보아라! 칼 한 자루 안 들어가던가!”
자잘한 상처가 온몸을 뒤덮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자잘하다는 것이 문제지만.
허나 병사들의 눈에는 다 같은 상처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도 어쩌겠는가.
명령이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수 있는 정예다.
다시금 함성과 함께 진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걸 진천이 기다리지 않고 성큼 몇 걸음 나오며 마중을 했다.
먼저 발치에 떨어진 창대를 튕겨 올려서 잡아 휘둘렀다.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수 명의 병사들과 기사가 뒤섞여 한쪽으로 튕겨 나갔다.
그쪽에서 달려오던 이들은 자연스럽게 엉켜 나자빠졌다.
그때 진천의 몸이 그 엉켜 나자빠진 쪽으로 쏘아졌다.
방금 휘둘렀던 창대를 거꾸로 쥐고 작살 마냥 쿡쿡 찍어대자 엉켜 자빠졌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비명을 내질러 댔다.
다른 손의 환두대도로는 달려드는 이들을 후두려 했다.
날이 있음에도 그냥 때렸다.
쩍쩍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통이 터지고 갑주가 우그러들었다.
방패를 들이민 병사는 그것과 한 몸이 되어 벌렁 나자빠졌다.
투퉁!
진천의 발끝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바닥에 뒹굴던 방패 두어 개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게 떨어져 내리기도 전에 역으로 쥐고 콕콕 찍어 대던 창을 투창하듯 집어던진다.
콰두둑!
“아악!”
“악!”
서너 개의 비명이 그대로 겹쳐졌다.
창대 하나에 비명 숫자만큼 몸통이 꼬지처럼 꿰여 한꺼번에 나자빠진다.
그리고 그즈음 자유 낙하를 시작한 방패를 허공에서 집어 날렸다.
한 개 두 개 세 개.
방패들이 위협적으로 맴돌며 날아갔다.
콰직!
하나는 방패를 들어 올린 병사를 쪼갰다.
방패를 쪼개고 몸통을 쪼개며 박혔다. 그리고도 힘이 남아 몸통을 쪼갠 병사를 뒤로 튕겨 보냈다.
와르르!
마찬가지로 이쪽과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조금 다른 것은 와르르 무너진 대열 뒤로 이어서 던진 두 개의 방패가 더 있다는 것.
콰콰콱!
이번에 날아간 것은 몇몇의 몸뚱이를 스쳤다.
물론 스친 이들의 상황은 가관이다.
팔이 뒤러 덜렁거렸고 재수 없는 이는 머리가 덜렁거렸다.
그들의 뒤쪽에 있던 이는 방패로 튕겨 냈지만, 재수 없는 이 하난 그 튕겨난 방패에 면상이 찍혀 찍소리도 못하며 뒤로 벌렁 쓰러졌다.
나머지 하나도 비슷했다.
맨 앞의 기사가 맞았는데 자빠지는 건 그 뒤에 있던 이들까지 대여섯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타난 진천.
이번에는 기사가 흘린 롱소드를 꽉꽉 찍으며 착실하게 확인 사살을 시작했다.
그때 뒤쪽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특히 세 명의 왕.
그들의 소울포스는 확실히 흐려졌다.
많은 이들을 상대하다보니 한계치가 온 것이다.
이쪽은 조금이라도 쉬면서 비축한 반면 저들은 함정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힘의 낭비가 심했던 것이다.
그나마 묵갑귀마대원들이 호위를 하고 있어 대열이 무너지지 않는 것뿐이다.
그걸 보는 순간 엡소드가 튀어 나갔다.
방향은 진천과 세 왕의 사이.
마치 길목을 차단하듯 뛰어나갔다.
콰앙!
엡소드의 롱소드가 휘둘러지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음.”
입맛이 썼다.
그가 길을 차단하러 가는 순간 진천이 먼저 나아왔던 것이다. 소리는 한번이었지만 무기가 부딪힌 것은 세 번이었다.
스치고 지나치려던 진천을 향해 롱소드를 휘둘렀고 그게 튕겨져 나오는 순간 방향을 틀어 다리를 베어 갔다.
그걸 진천이 무릎을 굽히며 환두대도의 손잡이 끝으로 롱소드의 끝을 찍어 내렸다.
이어 찍어 내린 환두대도를 사선으로 엡소드의 목을 노리고 찔러 올렸다.
마찬가지로 엡소드가 찍어 내려졌던 롱소드를 당겼다.
반원의 궤적을 그리며 당겨진 롱소드가 찔러오는 환두대도의 끝을 튕겨 내었지만 엡소드의 얼굴이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미리 길을 막고자 했지만 결국 마지막 동작으로 두어 바퀴를 돌며 뒷걸음질을 쳤기 때문이다.
그 사이 진천은 투석기에서 쏘아낸 바위마냥 몸을 날렸다.
콰앙!
그가 몸을 날리며 내딛은 땅이 움푹 파였다.
물론 굉음이 퍼진 곳은 움푹 파인 땅이 아니었다.
진천이 몸을 부딪친 곳에서 울려 퍼진 소리다.
엡소드가 굉음을 따라 반사적으로 시선을 던졌다.
진천이 몸을 들이받은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사와 병사들이 부채꼴을 그리며 튕겨 오르고 있었다.
그 뒤의 병사들 역시 허공에 붕 뜬 모습.
마치 거대한 바위가 떨어져 그에 맞아 튕겨져 나아가는 대열의 모습과도 닮아 보였다.
그 사이를 진천이 파고들고 있었다.
엡소드가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달려 나갔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주변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런 빠름 속에서 진천의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흐르는 듯, 뒤쪽에 있던 병사의 뒷덜미를 잡아 다른 쪽으로 던지고 발로 바닥을 쓸며 후렸다.
서너 명의 병사들이 다리가 붕 뜬 채 비명을 지르려 입을 열었고, 그 사이 진천이 환두대도를 바닥에 쿡 찍어 넣더니 허공에 떠오른 기사와 병사의 발목을 하나씩 잡아 반 바퀴 돌려 던졌다.
“크아압!”
그들이 날아올 때 이미 진천의 뒤까지 따라붙었던 엡소드가 괴성을 터트리며 롱소드를 거칠게 휘둘렀다.
촤아악!
두 명이 네 조각이 되어 잠시 가렸던 길을 열었다.
피로된 장막이 일시적으로 엡소드의 앞을 가렸다.
그 사이 붉은 장막 건너편의 진천은 다시 뽑은 환두대도로 몇몇의 머리를 딴 모양이었다.
머리 두 개가 둥실 떠올라 있었고, 그걸 배경으로 삼은 진천이 한 병사의 가슴팍을 밟고 있었다.
우직!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가슴팍이 함몰되었다.
그걸 디딤 삼아 뒤로 몸을 돌린 진천이 크게 환두대도를 사선으로 휘둘렀다.
뭔가를 베는 소리가 이번에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가 그어 낸 환두대도의 궤적에 있던 기사들 셋의 상체가 사선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렇게 미끄러져 내리는 기사들을 스치듯 진천의 몸이 빙글빙글 돌았다.
피를 머금은 환두대도가 도신에 묻은 핏방울을 사방으로 뿌리며 위로 솟구쳐 오르는 모습이 마치 역류를 타고 오르는 물고기마냥 생동감이 넘쳤다.
그렇게 환두대도의 끝이 하늘을 찔렀을 때.
질린 얼굴의 로우급 유저 하나가 그 앞에 서 있었다.
“크아악!”
엡소드가 괴성을 내질렀다.
마치 날 보란 듯 괴성을 내지르며 진천의 등을 향해 쏘아져 갔다.
동작이 큰 만큼 엡소드가 다다를 시간은 충분했다. 무시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진천의 등짝에 비로소 한 칼을 먹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런 엡소드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다.
희미하지만 푸르스름한 기운이 담긴 롱소드.
롬 왕이 이를 악물고 휘둘러 낸 거다. 맞추겠다는 의지보다는 그의 방향을 꺾겠다는 느낌이 강했다.
무시는 못한다.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지 노려진 곳은 옆구리니까.
엡소드의 신형이 뒤틀어지며 그 공격을 흘렸다.
그러나 누군가 찔러 낸 창대가 다시 이어졌다.
다리다.
정확히는 길게 이동하고 있는 두 다리 사이.
마치 아이들이 친구 다리를 걸어 자빠트리는 장난을 치는 것처럼.
엡소드가 두 다리를 접으며 그것마저 피해 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진천의 등 뒤를 쫓고 있었다.
하늘을 찔렀던 진천의 환두대도가 흐릿해졌다.
그 순간 로우급 유저의 롱소드가 혼신의 푸른빛을 뿌리며 자신의 머리 위를 막아 갔다.
그 순간 진천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모습이 바뀌었다.
머리 위로 롱소드를 들어 올려 상단을 막은 로우급 유저와 달리 허리를 살짝 숙인 모습이다.
하늘을 찔렀던 환두대도를 양손으로 쥐고 아래를 향한 채로 말이다.
핏!
로우급 유저의 투구 위쪽이 갈라지는 순간, 진천의 고개가 뒤로 틀어졌다.
으드득!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엡소드의 이빨이 갈렸다.
허공에 띄웠던 발이 바닥에 닿는 것과 동시에 롱소드를 찔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몸통 한 가운데를 노리고.
그 순간 바닥에 내려왔던 진천의 환두대도가 바닥을 긁었다.
투투투!
이내 바닥을 벤다.
그와 함께 진천의 하체가 먼저 뒤틀어지며 상체와 따로 논다.
콱!
하체가 먼저 반 바퀴를 돌아 내딛는 순간 바닥을 환두대도가 반원을 그리며 바닥을 베었다.
발목을 따라 무릎과 허리가 돌고 어깨가 돈다. 뒤따라오던 환두대도가 바닥을 베며 따라오다가 그 도신을 드러낸다.
방금 무엇을 베었는지 증명이라도 하듯 뜨듯한 아지랑이를 뿌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