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384
457화 승냥이와 방관자
프라임 공작의 시선은 진천과 전방을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쪽.
아까 잠시 부딪혔던 노인.
그 노인은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라임 공작이 노인을 보다가 엡소드를 바라보았다.
마치 저 노인을 상대할 수 있을까 가늠하는 모습.
그러난 살짝 눈살이 찌푸려진다. 노인 하나만이 걱정되는 게 아니다.
그 주변의 노인들.
물론 그 노인들과 지금 눈이 마주친 노인과는 실력에 차이가 크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의 연계가 신경 쓰였다. 일반 기사들을 밀어 넣어 시간을 끄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리고 프라임 공작의 시선이 다시 진천을 향했다.
“흐음.”
지칠 법도 하건만 여전히 전투의 날이 무뎌지지 않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이곳의 전력이 막강하다는 점이다.
진영이 무너지는 것을 감수한 결정.
그 덕에 시에라 제국의 핵심 전력이 이쪽에 몰려 있는 점이다.
물론 외곽의 전력까지 모두 오지는 못했지만, 제대로 된 전력은 거의 다 모이고 있었다.
그래 봐야 이제는 소울아머 유저 몇이 전부다.
“몇? 푸흐흐.”
프라임 공작이 갑자기 너털 웃음을 흘렸다.
화수분처럼 솟구쳐 오르던 시에라 제국의 소울아머 유저들이 이제 몇이 전부라는 게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하이급 유저라 부르는 이들은 자신을 제외하고 둘이 전부다.
엡소드와 자신의 뒤에 있는 노블기사단의 노기사 한 명.
그때 다시 전방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이제 제법 눈에 들어오는 그들.
“황제군.”
그 선두 깃발에 달린 머리를 본 프라임 공작이 쓴 웃음을 머금었다.
황제가 죽었을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적들이 그런 허장성세를 보일 이유도 없었고, 통신이 재개된 이후 들은 소식도 있었다.
황제도 죽고 황실도 붕괴했다.
다행히 쏜튼 후작은 살았으나 그것뿐.
이겨도 이긴 전쟁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이기면 다른 의미로 새로운 기회를 가지게 된다.
시에라 제국의 철권통치.
그가 시에라 제국의 온전한 힘을 쥘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권력에 욕심이 넘쳐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운 목표가 생긴 지금 귀찮은 권력다툼 같은 걸 안 하게 된다면 그건 나쁠 게 없다.
오히려 이 시에라 제국의 힘을 하나로 뭉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때 프라임 공작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리그…….”
황제의 머리 옆에 매달려 있던 것의 정체를 안 것이다.
그리그였다.
“미치겠군.”
그의 제자들이면 충분하다 여겼다. 그런데 막상 전투가 벌어진 뒤 남은 것은 제자들의 머리통들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알 만한 사실은 지금이 최대의 위기라는 점이다.
황제의 머리와 그리그의 머리를 매단 이들이 점점 가까워져 온다.
그들이 이곳에 당도한다면 숫자의 이득은 없다고 봐야 했다.
프라임 공작의 시선이 다시 노인을 향했다.
‘장 노인이라 했던가?’
그 노인이 팔짱을 끼고 프라임 공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끼어들 생각 없다는 듯.
“믿을 만하긴 하지만, 이거 우습군.”
프라임 공작의 몸 주변으로 슬슬 투기가 끌어올렸다.
살기로 범벅된 투기.
“내가 그리 보인다는 건가?”
프라임 공작의 얼굴이 점점 분노로 물들기 시작했다.
“네놈들의 황제의 목을 먼저 취한 뒤 그 꼴을 보아 주지.”
프라임 공작이 다시 진천을 보았다.
그때 뒤의 하이급 유저가 입을 열었다.
“나서시는 겁니까?”
“이쯤이면 무르익었겠지. 티는 나지 않지만.”
“예.”
프라임 공작이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를 따라 하이급 유저도 이어 내렸다.
“주변을 막아라.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우리 황제의 목을 취한 뒤, 나머지를 취하겠다.”
명령은 빠르게 전달되었다.
그러자 로우급 유저들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다들 살짝 흥분한 얼굴들.
그들도 아는 거다.
지금은 소울아머 유저들이 거의 씨가 말라가는 상황. 물론 제국은 넓으니 뒤지면 더 나올 수는 있겠지만, 그 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 넓은 전장의 외곽에도 있겠지만 지금 이들은 핵심에 있다.
여기서 공을 세우는 자는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거라는 생각쯤은 다들 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더 기다리면 지겹기만 하겠지.”
프라임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프라임 공작이 가슴의 소울스톤을 돌렸다.
순간 소울포스가 그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본 하이급 유저가 잠깐 멈칫했지만, 그 역시 프라임 공작을 따랐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그도 알았던 것이다.
폭주하는 소울포스를 감추지 않으며 나아갔다.
“이제 오는군.”
진천이 한쪽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래. 네놈의 목을 따러 오시는 거다.”
엡소드가 으르렁거렸다.
그런 엡소드의 면상에 진천이 주먹을 후려갈겼다.
콰직!
이미 뭉개진 코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렇게 뒤로 비척거리며 물러서는 엡소드를 보며 진천이 피식 웃었다.
“개소리도 듣다 보니 정겨워지려 하는군.”
이어 진천이 크게 환두대도를 휘둘렀다.
그러자 주변에서 아웅다웅거리던 기사들의 몸뚱이들이 일제히 기울었다.
피분수가 큰 원을 그리며 뿌려졌다.
물러서던 엡소드의 눈앞에 피분수가 솟구쳤다.
“이익!”
“정신 차려라.”
무력감에 다시 분노를 흘리는 엡소드의 등을 받쳐 준 것은 프라임 공작이었다.
“죄송합니다.”
엡소드는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내 불찰이지. 이래서 함정까지 생각했거늘 네 사제들을 먼저 앞세웠구나.”
“아닙니다. 우리들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버티거라. 내겐 이제 너뿐이니…….”
“……!”
프라임 공작의 말에 엡소드가 그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프라임 공작의 눈가가 벌게져 있었다.
마치 흐르는 눈물을 참으려 하는 듯한 표정.
“그리그도…….”
“스승이 못났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역천이라도 했어야 했거늘, 한줌 충성심에 제자들을 희생시키다니…….”
프라임 공작의 처연한 모습에 엡소드가 울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 프라임 공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차라리 역심을 품었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내가 역적으로 남더라도 제자들을 먼저 보내는 일은 없었을 것인데.”
후회 가득한 음성.
붉어진 눈 한쪽에서 눈물이 맺혔다.
그 모습을 본 엡소드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자를 베고 일단 병력을 추스르면 되옵니다. 저들 역시 저자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나라 아니옵니까.”
카버 왕국으로 들은 이야기.
고진천이라는 존재는 가우리에 있어 최강의 장점인 동시에 약점이라고.
물론 그 휘하의 장수들 역시 막강하지만, 그들의 존재의의는 바로 그라는 이야기.
물론 지금 확인해 보니 그 휘하 장수가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의 사제들이 죽어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충분히 강력했다.
하지만, 만약 진천이 여기서 죽는다면 그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이쪽이 아닌 저쪽 대륙의 제국들이 다시 움직일 것이라 했다.
그 정도의 전쟁 억지력을 한 사람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미련 없느니라. 내 제자들은 내게 있어 전부였느니라.”
엡소드의 담담한 말에 엡소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노블기사단을 만든 것은 제자들이다.
힘이 있으면서도 물러서 있던 스승의 모습에 울분이 차서 한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실제 프라임 공작이 뒷방 늙은이가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최강이었고, 대적할 자가 없는 이었으니까.
그러나 시에라라는 제국이 만들어 낸 구도와 불합리 덕에 딱 거기까지였다.
그 구도가 최근 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황도 주변의 쓰레기들을 제거할 때 엡소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로운 세상도 꿈꾸었다.
또 스승도 새로운 목표에 처음으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그게 지금 무너지게 생겼다.
“스승님.”
“엡소드…….”
이를 악물은 엡소드의 눈동자가 잔뜩 충혈되었다.
그런 엡소드에게 프라임 공작이 어깨에 손을 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건네었다.
“우리 함께 가자꾸나. 저자 목 하나쯤은 전리품으로 가지고 함께 가자꾸나. 그래서 다음 생 있다면 원 없이 세상을 누리자꾸나.”
그때 엡소드가 천천히 자신의 소울스톤을 잡아 갔다.
“엡소드?”
“스승님, 이 제자들을 기억하소서.”
“엡소드!”
“황제가 되소서!”
처절한 외침과 함께 엡소드의 손이 가슴팍의 소울스톤을 돌렸다.
까드득!
더없이 강력한 소울포스가 엡소드의 온몸을 휘감았다.
목숨을 댓가로 지불한 엡소드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이 못난 제자 엡소드가 그 길을 열어 드리겠나이다아아!”
강력한 울음소리가 엡소드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그의 주변으로 강렬한 소울포스가 퍼져 나갔다.
힘의 안배 따위는 계산하지 않겠다는 듯 온몸의 소울포스를 뿌려대었다.
그것이 스승에게 전하는 마지막 선물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그렇게 강력한 힘을 뿌리며 엡소드가 뒤돌아 섰다.
피분수가 가라앉으며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진천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가 입을 열었다.
“역시 맞았군 승냥이가.”
“닥쳐라아아!”
엡소드가 달려 나갔다. 그리고 진천의 시선은 프라임 공작을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맞으며 프라임 공작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아주 살짝.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말이다.
프라임 공작이 중얼거렸다.
“전쟁이라는 것이 참 슬픈 게로군.”
그의 음성을 들으며 함께 온 하이급 유저가 엡소드를 따라 달렸다.
그 역시 충직한 기사로서 엡소드의 선택을 따르겠다는 듯 말이다.
그때 프라임 공작의 시선이 옆으로 흘렀다.
무언가를 찾는 듯.
그리고 그렇게 눈을 굴리던 프라임 공작이 한쪽에 못 박히듯 멈추었다.
“가든 후작! 그대는 이 시에라의 귀족이 아니던가!”
그렇게 외친 프라임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지는 느낌이었다.
“가든 후작! 그대는 이 시에라의 귀족이 아니던가!”
그 소리를 들은 가든 후작이 얼굴을 구겼다.
“저 승냥이 같은 놈.”
“너무 가까이 왔다고 했잖습니까!”
“젠장.”
주변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 그들이 가든 후작을 어찌 알겠는가.
고위 귀족일수록 얼굴 보기가 힘들다. 심지어 가든 후작은 북부를 전전하던 이였다.
당연히 얼굴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분위기라는 것이 있었다.
심지어 장 노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가든 후작이 얼굴을 구겼다.
“후우.”
가든 후작이 한숨을 내쉬자 헨리 백작이 걱정 어린 음성을 뱉었다.
“어쩌시려고…….”
“몸이나 잘 건사하게. 꼴같잖은 실력으로 나대다가 저기 던져진 머리 옆에 놓이지는 말고.”
“후작님!”
헨리 백작의 외침을 들으며 가든 후작이 일갈을 터트렸다.
“나 가든이 여기 있노라!”
그리고는 다시 조용히 중얼거렸다.
“프라임 개새끼. 물귀신도 아니고…….”
다가가는 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