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401
474화 전쟁 그 후
가든 후작에게 전투에 패해 포로가 되어 패잔병을 이끌고 왔다는 오명은 없었다.
후작이지만 정식 지휘를 맡은 바도 없었고, 오히려 토벌 사령관에서 밀려났음에도 백의종군했다는 당당함이 있었다.
또 그가 있어 학살을 막을 수 있다는 변명거리도 있었고 말이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이들도 죽은 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게 편하다.
오히려 그 쪽이 살길이라 생각했는지, 죽은 프라임 공작의 일가들이 줄줄이 잡혀 왔다.
심지어 프라임 공작 일가의 주요 인물들은 쏜튼 후작이 죽는 날 목이 잘려 항복 예물로 담겨 왔으니 말 다했다고 봐야했다.
심지어 손자라는 이유로 어린아이의 목까지 담아 왔으니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든 후작이 현실적인 논의를 언급하며 언급된 이트리온 백작 이외에도 황성에 남아 있는 일부 귀족들 몇을 더 참석시켰다.
당연히 살아남은 귀족들은 가든 후작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소통창구가 된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사전에 계획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협상장에 선 시에라 제국의 귀족들은 안방임에도 잔뜩 눌려 있었다.
이쪽은 가우리의 황제를 비롯해 하이안 동맹의 핵심들이 있었고, 승전국의 지위를 가진 카말 왕국의 바사론 카말 왕과 필리어리 왕국의 헤머튼 리어 왕을 비롯한 귀족들이 자리했다.
그뿐 아니었다.
일루이먼 왕국을 비롯한 독립을 선언 후에 남부 연합군에 모든 것을 걸었던 롬 왕국과 수장과 귀족들이 있었으니 그 수만 해도 적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그리팔과 함께 따라온 투먼 제국의 관료들까지 있었으니, 그들은 제대로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시에라 제국은 갈가리 찢겨졌다.
이미 투먼 제국이 점령한 북부 지역과 더불어 그들이 평소 탐내 왔던 곡창지대가 함께 전리품으로 넘어갔다.
남부로는 카말 왕국과 필리어리 왕국이 사이좋게 영역을 넓혔다.
그 영역이 오히려 이전 터그람 왕국과 필리어리 왕국이 전성기 때 얻고 있던 영역을 훨씬 넘어섰다.
이미 그 지역에 남아 있던 왕국은 흔적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가능했던 일이다.
시에라 제국이 점령지의 인원들이 이리저리 뿌려 놓은 까닭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일루이먼 왕국과 롬 왕국이 영토를 넓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위로는 데얀 왕국이 마찬가지로 영토를 넓혀 자리를 잡았고 말이다.
그러고도 남은 땅덩이는 넓었다. 그렇기에 가우리와 로셀린 그리고 말린의 영토가 사이좋게 자리를 잡았다.
너른 황금들판과 광산들이 위치한 주요 지역들이었다.
특히 일부는 마나석 광산들도 산재해 있었으니 알짜 중에 알짜였다.
그럼에도 그것을 무어라 할 이들은 없었다.
이 전쟁은 그들 없이는 승리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며 가우리의 무력에 대해 아군이면서도 두려워할 정도였으니 어느 누가 반발하겠는가.
그리고 투먼 제국과 남부 연합군이 차지한 지역 사이에는 이제는 왕국으로 격하된 시에라 왕국이 겨우 존속할 수 있었다.
한때는 대륙의 칠 할을 차지했던 시에라 제국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쪼그라들대로 들어 일할이 채 되지 않았다.
물론 반대 의견도 없잖아 있었다. 그동안 시에라 제국의 이름에 억눌려서인지 대륙 위에서 그 이름을 싹 지우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그들의 반발은 조용한 곳에서 웃으며 설득한 연휘가람 덕에 가라앉았다.
“투먼 제국은 막기 쉬울 것 같습니까?”
“…….”
당연히 다들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투먼 제국과의 사이에 시에라 왕국을 존속시키는 것이 났다는 거였다.
그렇기에 일 할에 모자라지만 여전히 넓은 영토를 부지할 수 있었던 거다.
또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가든 후작의 망명이었다.
“후작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데요!”
“다 망한 나라에서 무슨 무소불위! 막말로 제국 시절에도 시도 때도 없이 내려오던 투먼 제국이야! 그걸 누가 막겠어!”
“하, 하지만…….”
“넌 그날 프라임 공작이 떡이 되는 꼴을 보고도 말이 나오냐?”
“…….”
가든 후작의 말에 헨리 백작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막말로 가우리 직할이라지만 땅덩이가 시에라 왕국보다 적디?”
“그건 아니죠.”
“거기에 총독 자리면 왕이나 다름없잖아. 그리팔 그 양반이 재상해 준다고 하고.”
원래 총독 자리는 그리팔에게 제의되었던 거다.
그게 항장이나 마찬가지인 가든 후작에게 넘어온 거다.
파격이라면 파격이었지만, 이건 자신감도 있었다.
그날 그 광경을 보고도 덤빌 리가 없다는 자신감 말이다.
“어차피 내 영지도 가우리 영역이야. 거기에 좋은 땅도 붙여서 인정해 준다는데, 차라리 이게 나아. 이번에 안 건데…….”
가든 후작의 눈에 체념의 빛이 살짝 감돌았다.
그걸 눈치채지 못할 헨리 백작이 아니었다.
“때론 뱀 대가리보단 용꼬리가 나을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하, 하하하…….”
헨리 백작의 입에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시에라 왕국은 오래가지 못할 수 있어. 너도 알지?”
남은 귀족들만 봐도 불 보듯 훤했다.
결사 항전을 통해 시간을 끌다가 항복을 했으면 이 정도로 나라가 절단나지 않았을 거다.
가든 후작이 수장이 되어 협상에 임했음에도 다른 귀족들이 눈치를 보며 다 퍼주자는 데 만정이 다 떨어졌던 거다.
거기서 마음을 아예 접은 거다.
“위에서 누르고 아래에서 힘이 갖춰지면 방패 역할도 오래 못 간다. 이건 왕국으로 존속이 아니라 거대한 국경선으로 남은 거야. 물론 남은 바보들은 이 와중에도 교역을 통해 다시 성세를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 버릇 못 준다고 이 상황에서도 자리 보존 후에 교역을 할 꿍꿍이를 비치는 꼴에 가든 후작이 칼을 뽑아 들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적이 아니라 아군이 되면 얼마나 재미있겠냐?”
가든 후작이 히죽 웃었다.
천생 무인이었다.
“일단 열제 폐하는 답이 없으니까, 그 밑에 있는 양반들하고 칼 좀 섞어 봐야겠다. 기왕 이쪽 사람 된 거 서열 정리는 해 놔야지. 그 동네 그거 하난 마음에 들어 힘이 있으면 대우해 주는 거.”
“하아.”
가든 후작의 꿍꿍이는 따로 있었던 거다.
“좋잖아? 당분간은 뭔 일이 있을 리도 없고. 또 운영이야 재상 양반이 알아서 할 거고. 난 그동안 못한 구경이나 다니면 되지. 흐흐흐!”
가든 후작의 말을 들은 헨리 백작은 그의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이 꼴이 나지 않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더는 치료 불가능이니까.
그리고 다음날.
가든 후작은 당당히 도전장을 내던졌다.
대상은 을지우루였다.
그래도 활을 다루는 사람이니 할 만하다는 계산이 섰을 거다.
그리고 죽다 살아났다.
시간이 지난 뒤지만.
계웅삼과 제라르에게까지 깨지고 난 뒤에 삼인방과 동기를 먹게 되는 불명예를 얻었다.
* * *
“저러다 사고 나는 거 아닌가?”
한동안 몸져누워 있던 가든 퍼시발 후작이 고진천의 굳어진 표정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설마.”
“딱 보니 화난 표정 같은데.”
“아니니 걱정 말게.”
지금 가든 후작과 말동무를 해 주고 있는 이는 바로 레비언 고윈이었다.
소원 하나를 이루긴 했다.
바로 자신을 열 받게 만들었던 지휘관과의 조우다. 그 덕에 전쟁에 끼어들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사실 어쩌면 그 호기심이 아니었다면 아마 땅에 파묻혔을 거다.
프라임 공작이 패했다 해도 그걸 본 게 아니니 시에라 황실에서 유일하게 남은 강자인 그에게 시간이라도 끌라고 했을 거다.
그러면 아마 그는 그 명령을 귀찮아하면서도 받아들였을 거니까.
천만 다행이다.
대결해서 목숨을 잃는 건 아쉽지 않지만 프라임 공작 같은 꼴은 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어찌되었든 그 덕에 만난 고윈과는 의외로 죽이 맞았다.
연배도 비슷한 덕에 친구도 먹었고 말이다.
그런 둘의 시선에 잡힌 건 머리 하나는 더 작아 보이는 여인에게 쏘아붙임을 당하고 있는 진천의 모습을 목격한 거다.
“아무리 열후시라지만…….”
“저 표정은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으신 표정이라네.”
“저 표정을 하고 프라임 공작을 때려죽였는데?”
가든 후작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잔뜩 굳어진 얼굴에 미간에 주름이 져 있다.
“사실 비슷해 보이는데 좀 틀리다네. 우리나 돼야 구분할 걸세.”
지금 진천이 잔소리를 듣는 이유는 바로 전투 상황을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황제씩이나 돼서 적진에 파고들어간 건 둘째 치고 배에 구멍이 뚫리기까지 한 걸 가지고 따지는 거다.
주변에 있어야 할 을지우루나 대무덕 등 무장들은 이미 자리를 비웠다.
도망친 거다. 그들의 책임도 있으니까.
그때 진천이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는 앞에서 조잘조잘 떠드는 을지를 어깨에 들쳐 맸다.
“저,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말리긴.”
고윈이 실실 웃었다.
그 웃음을 본 가든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고윈이 입을 열었다.
“애 만들러 가시는 건데.”
“…….”
그 말에 가든 후작이 다시 그들을 보았다.
을지가 발버둥을 치고는 있었지만, 표정이 묘했다.
“아마 내일은 후궁께서 오실 걸세. 아마 당분간은 또 다른 전투를 벌이셔야 할 걸세. 이미 예상하고 마나석 침상을 마련했으니 뭐…….”
“끙.”
가든 후작은 그저 머리를 긁을 뿐이었다.
* * *
전쟁이 끝나고 카말 왕국과 필리어리 왕국은 축제의 분위기가 되었다.
승전과 함께 계웅삼과 제라르가 장가를 가게 되었다.
이참에 도망을 못 가게 만들겠다는 바사 론 카말 왕과 헤머튼 리어 왕의 결정이었다.
아직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우리의 새로운 직할지에 머물러 있었다.
나중에 다시 이 인원이 모이기가 쉽지 않으니 아예 승전 축제의 일환으로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거다.
이번 전투를 통해 가우리의 무력뿐 아니라 자신들의 사위들이 얼마나 강한지 제대로 보았으니 시간 끌기 싫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다른 왕국과 달리 자신들이 가우리와 얼마나 더 친한지도 보이고 싶은 사심도 있고 말이다.
이제 전쟁은 먼 이야기가 되었지만, 힘겨루기는 계속 될 것이 뻔했으니 조금이라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두 사람에게 롬 왕국과 데얀 왕국의 공주가 눈길을 보낸 것도 원인이었다.
두 왕국 역시 뒷배에 관심이 있으니 당연했다.
그중에 두 사람만큼 탐나는 이가 없었으니까.
거기다가 롬 왕국의 라이드 롬 왕과 데얀 왕국의 가르히 데얀 왕은 자신의 딸들에게 자신감도 있었다.
미모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평판도 좋았다.
전장의 미친년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이실라 공주나 사교계의 미친년이라 불리는 센시아 공주에 비하면 오히려 꿀릴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더 서두른 감도 있었다.
어찌 되었는 가우리 덕에 살아난 것도 모자라 승전국까지 되었으니 두 사람이 나 몰라라 한다고 해서 어디 하소연할 수 없으니 말이다.
“최대한 빨리 해치웁시다!”
“그럽시다!”
결혼식이 벌어지는 그날까지 두 왕은 긴장을 늦추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