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44
강철의 열제 144화
“어차피 우리가 이번에 노획한 화살 등은 철만 수거하기도 번거롭고, 거기에 가죽 갑옷 등은 필요가 없으니 싼 값에 넘기는 게 이득이다.”
노획한 화살은 가우리 군의 맥궁에는 맞지 않았다.
크기가 작은 단궁에 이곳의 커다란 활에나 쓰는 화살은 크기가 맞지 않았고, 가죽 갑옷의 경우 동물가죽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인 것들은 몬스터를 아예 가축으로 키우는 그들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물품이었다.
“매의 군단 물품도 맘 같아선 팔아넘기고 싶지만, 일단 귀국길에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남겨 둬라.”
“…….”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말을 하는 고진천을 보며 고윈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 * *
“물량이 상당 합니다.”
연휘가람이 내민 서류를 보던 헬리오스 바이칼 후작은 놀란 눈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루이 테리칸 후작이 서류를 넘겨받았다.
“허어…….”
테리칸 후작도 탄성을 내뱉었다.
물량도 물량이지만 가격도 시중가에 비해 싸게 책정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했다.
팔만이라는 북로셀린 군대의 군수물자의 량이 적을 리가 있겠는가?
서류에 적혀있던 물량과 품목을 보던 테리칸 후작의 뇌리 속에는 가우리라는 나라가 점점 부국이며 강국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이런 정도의 물량은 일개 무리가 하루 이틀 동안에 준비할 만한 양이 아니었다.
서류를 내려놓은 테리칸 후작은 알세인 왕자에게 말을 건넸다.
“동부군을 새로이 무장시킬 수도 있는 물량입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알세인 왕자도 어릴 뿐 바보는 아니었다. 제법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휘가람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의 실수를 인정하고, 또한 먼 길을 달려와 도와준 귀국에 대해 우리가 보답하는 의미에서 연회를 열겠소.”
알세인 왕자가 말을 꺼내자 테리칸 후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다시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그런 테리칸 후작의 의도를 알아차린 알세인 왕자의 모범 답안은 이내 막힐 수밖에 없었다. 휘가람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휘가람은 심각한 표정을 유지하며 천천히 운을 뗐다.
“이 자리에 제가 혼자 온 것은 이미 열제 폐하와 제장들이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제가 설득을 하여 이렇게라도 온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떠나다니? 도착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찌 그런 소리를 하시오.”
테리칸 후작은 펄쩍 뛰며 휘가람의 말을 받았다. 그러자 알세인 왕자도 그의 말을 거들었다.
“실수를 씻을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나시면 어찌하오. 휘가람 경이 설득을 해 주시오.”
“일단…… 간언은 해 보겠습니다. 병사들도 사실 좀 쉬어야 하는 상황이니 한번 말씀을 올려보지요.”
휘가람이 힘겹게 답하자 알세인 왕자는 짐짓 근엄하게 명을 내렸다.
“테리칸 경은 가우리 병사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조치를 하시오. 그리고 시종장!”
“예.”
“국빈에 대한 연회를 준비하라! 소홀히 해선 아니 된다!”
알세인 왕자가 휘가람을 의식해 보란 듯이 명을 내리자, 테리칸 후작과 시종장이 허리를 숙여 대답을 했다.
“휘가람 경, 꼭 부탁하오. 이렇게 끝내기엔 내가 미안하지 않소.”
“노력해 보겠습니다.”
휘가람이 알세인 왕자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받으며 일어나자 테리칸 후작이 함께 일어났다.
“저도 이만 준비를 하러 나가보겠습니다.”
“그리 하시오.”
“아, 휘가람 경. 혹 가우리 국의 열제께서는 혼인을 하셨는지…….”
테리칸 후작의 뜬금없는 질문에 흔들린 것은 알세인 왕자의 눈빛이었다. 그의 유일한 혈육인 유니아스 공주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테리칸 후작의 질문은 휘가람에게도 의외였는지,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열후로 내정된 분이 계시옵니다만, 아직 정식으로 혼례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허허, 어서 혼약을 하셔야겠습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알세인 왕자를 잠시 바라보던 테리칸 후작은 휘가람보다 먼저 빠져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바이칼 후작과 궁정 마법사만이 남은 홀에는 알세인 왕자가 이마에 손을 얹고 앉아있었다.
‘유니아스 누님…….’
* * *
군영에 돌아온 연휘가람은 고진천의 앞에서 군례를 올렸다. 휘가람의 얼굴에 비친 미소를 본 진천은 일이 잘 되었음을 감지했다.
“뜻대로 이루었습니다.”
“고생했다.”
진천이 고개를 까딱이며 치하하자 휘가람은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하온데, 남로셀린 측에서…….”
“밥 한 번 먹자고 그러나?”
“예.”
휘가람은 피식 웃었다.
연회나 잔치나 결국은 밥을 먹는 것이니, 진천의 표현도 틀린 것은 아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진천은 주변을 슬쩍 살폈다. 을지부루와 우루가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잔치 마다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가지 뭐. 그러고 보니 이 동네 잔칫집에는 가본 적이 한 번도 없군.”
“알겠습니다. 가겠다고 전하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가운데 시종의 목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계웅삼이 안으로 들어왔다.
“충!”
“포장 잘했냐?”
“예, 완벽하게 재포장 하였습니다.”
만에 하나 북로셀린의 물건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안 되었기에 넘겨줄 활과 화살, 가죽 갑옷 등의 물자를 일일이 뒤지고 다시 포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남로셀린에서 술과 음식들을 잔뜩 가져왔습니다. 어찌 합니까?”
“적당이 먹고 놀아.”
“알겠습니다.”
진천의 허가가 떨어지자 웅삼이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한쪽에 있던 휘가람이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이 입을 열었다.
“흠, 그러고 보니……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아까 열제 폐하의 혼인 여부를 묻는 것이 아무래도 유니아스 공주와의 정략혼이라도 생각 하는 것 같습…….”
“유니아스 공주라면 아침에 이곳의 대전에서 보았던, 왕자의 오른편에 앉아있던 순백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치마를 입고서 탐스러운 갈색머리에 말 젖같이 투명한 피부를 가진 여인네가 아니냐?”
“……말 젖은…….”
한쪽에 있던 고윈은 여인의 피부를 말 젖에 비유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충언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굳어진 얼굴로 말을 줄줄이 뱉어내는 진천의 모습에선 무언가 알 수 없는 의지마저 엿보였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휘가람이었다.
“……짧은 시간에 자세히도 보셨습니다.”
“크흠.”
휘가람의 말에 진천은 그제야 느낀 듯 천천히 고개를 창 밖으로 돌리며 나름대로 변호를 하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긴 무슨. 대전에 여인이라고는 왕자의 왼쪽 뒤편에 서있던 연푸른색 옷을 입은 금발머리의 호리호리한 여인과 그 공주로 보이는 여성 왼편에 시중을 들던 연한 갈색 머리에 약간 귀염직한 얼굴을 가졌지만 의외로 가슴이 풍만하고 허리가 잘록했던 여인, 그리고 입구 왼편에 과일을 나르고 있던 어린 시녀 셋뿐이 더 있더냐.”
“…….”
“길케…… 많았습네까?”
진천의 말에 휘가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부루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몰랐다는 듯이 놀라하고 있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웅삼은 고개를 푹 숙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목숨 걸고 막고 있었다.
‘열제 폐하, 자세히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분석까지 하셨사옵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진천은 천천히 팔짱을 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피곤하군. 있다가 깨워라.”
“…….”
그 말을 끝으로 모로 누워 잠을 자는(?) 진천이었다.
“하긴 독수공방이 기셨디 않네?”
“기래도 열후님의 허락은 맡아야디.”
을지 형제의 대화가 조그맣게 오갔다. 고윈의 목소리도 끼어들었다.
“허락을 맡아야 합니까?”
“기럼!”
고윈은 다시 당연 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맡으면 되지 않습니까?”
“음, 고조 짧은 대답만 시킨다면 가능 하디만, 이제야 기다 걸을 때쯤인데…….”
부루가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고윈으로선 아직 을지의 나이와 존재를 정확히 알 수 없던 탓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부호를 얼굴에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진 부루와 우루의 대화는 열심히 오가고 있었다.
“혹시 아네? 고조 엿이라도 쥐어 드리면서 물어보면 어칼기야?”
“기것도 기렇지만. 설마 그러시갔네? 치졸하게.”
움찔.
돌아누운 진천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내래 좋은 생각이라고 판단했는데…….”
“니보라우 부루. 열제 폐하가 강쇠네! 기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릴 해가면서 하실 리가 없잖네!”
움찔 움찔.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누워있던 진천의 몸이 떨렸다.
그 모습에 불긴한 예감을 느낀 휘가람이 먼저 자리를 피하자 눈치 빠른 웅삼도 조용히 자리를 떴다. 물론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위기감지가 뛰어난 고윈 역시 그들의 뒤를 따랐다.
끄아악!
살려주시라요!
그들이 나온 뒤 원인을 알 수 없는 비명이 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남로셀린의 핵심귀족들과 파밀리온 알세인 로셀린 왕자는 다가오는 연회시간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얼굴로 의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때 한 기사가 심각한 얼굴로 들어와 무언가를 보고하고 나갔다.
“무슨 일이오?”
알세인 왕자가 묻자, 보고를 받은 베르스 남작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우리의 열제와 그 일행이 있는 곳에서 갑자기 누군가 두들겨 맞는 비명이 터져 나온답니다.”
“허어!”
“그런 흉포한…….”
“으으음. 그리도 분노가 컸던가…….”
베르스 남작의 말에 귀족들은 놀라며 심각한 표정이 되어갔다.
누군가 흉포하다는 말을 하자 알세인 왕자의 얼굴이 허예졌다. 그리고 동시에 옆자리에 있는 자신의 누나를 바라보았다.
파밀리온 유니아스 로셀린 공주.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있었다. 이 자리에 자신이 나온 이유를 이미 짐작 하고 있었는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테리칸 후작의 침중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알세인 왕자에게 한 말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알세인 왕자와 유니아스 공주를 동시에 향하고 있었다.
“테리칸 후작…….”
알세인 왕자의 말끝이 흐려졌다.
노귀족인 테리칸 후작도 알세인 왕자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이제는 둘만 남은 왕가의 핏줄.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이 나지 않았고, 이들에겐 가우리가 필요했다.
사락.
“누님…….”
알세인 왕자의 여린 어깨에 유니아스 공주의 손이 올라갔다. 열여덟의 나이였지만 두 살 어린 알세인 왕자에게는 커다란 의지가 되고 있는 그녀였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알세인, 연회 때 내게 가우리의 열제란 분을 소개시켜 주지 않겠니? 그날 잠깐이지만 호감이 가더구나.”
유니아스 공주의 포근한 음성은 슬프게만 들려왔다. 이미 상황을 알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다.
알세인 왕자의 목소리가 떨리듯이 흘렀다.
“누님…….”
“오, 공주님!”
하지만 반대로 귀족들은 공주가 자처하고 나서자 오히려 얼굴이 환해지며 반기는 모습들이었다. 하루 이틀 만에 가우리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뒤바뀌는 상황, 그것은 그만큼 남로셀린의 현실이 어떠한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가우리가 조금 약하다 싶었을 땐 흡수해서 쓰려 했고, 강하다는 결과가 나오니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현실. 대륙에서 외면을 받는 국가의 현실은 슬플 뿐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좀 더 신중할 수도 있었고, 또한 자세히 알아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그들에게는 여력이 없었다.
그나마 테리칸 후작과 다른 귀족들이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지는 않았기에 이렇게라도 움직이는 것이다.
“걱정 말렴.”
유니아스 공주는 알세인 왕자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었다. 그 모습에 바이칼 후작과 테리칸 후작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약함을 저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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