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46
강철의 열제 146화
“공주님이 궁을 빠져나가셨습니다!”
“뭐!”
당황한 표정으로 보고하는 기사의 말에 테리칸 후작과 알세인 왕자가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빠져 나가는 것을 보기만 했느냐!”
“그것이, 공주님이 직접 길을 열라 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누님이?”
알세인 왕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보고를 하던 기사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유니아스 공주님이 가우리 열제님의 뒷자리에 앉아서…….”
“어디에 앉아!”
순간 모든 이들의 눈빛이 몰렸다. 그 눈빛 중에는 을지 형제의 것도 포함되어있었다.
“고조 바람 나셨구만 기래.”
“클클, 눈 맞았어야.”
그들은 뭐가 즐거운지 낄낄거리고 있었고, 남로셀린 귀족들은 그들의 모습에 더더욱 황당함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테리칸 후작역시 의외로 빠른 진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 *
다그닥 다그닥.
경쾌한 말발굽소리가 향하는 곳에는 여기저기 불길이 오르고 있었고, 노랫가락이 흐르고 있었다.
“노오세 노세. 젊어서 노세에~.”
“이런 망할! 놀다 뒤지겠다!”
“킬킬킬.”
유쾌한 듯 술을 기울이며 춤을 추는 그들은 가우리 병사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귓가로 말발굽소리가 들려오자 자연히 고개가 돌아갔다.
“누가 오는데?”
“그러게. 누구여?”
어스름한 빛 때문인지 쉽게 알아볼 수 없던 그들은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에야 눈을 부릅뜰 수 있었다.
“헉!”
“열제 폐하이시다!”
순식간에 외쳐진 목소리에 병사들은 놀던 동작을 멈추고 모두 한쪽으로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만천(萬天)의 지존이자 만인(萬人)과 만물(萬物)을 포용하시는 열제 폐하께 예를 올리나이다!”
“워어.”
다각 다각.
순식간이지만 일제히 일어나 예를 올리는 병사들의 모습은 지금까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아직도 뒤쪽에는 자세를 잡았다가 한쪽 무릎을 꿇어가며 고진천을 향한 외침이 계속 되고 있었다.
“아!”
유니아스 공주는 그 모습에 감탄한 듯 탄성을 흘렸다.
먼저 말에서 내린 진천이 유니아스 공주를 안아 내리며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계속 놀아.”
“충!”
그의 외침에 병사들이 소리 높여 화답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감탄하던 유니아스 공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었다.
“아무리 놀라고 했어도…….”
유니아스 공주의 입에서 허탈한 음성이 흐르자 진천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노는 것엔 왕후장상이 따로 없는 법.”
진천이 말은 그리 했지만, 병사들이 이리 하는 것은 그들에게 진천은 이세계로 넘어오기 전에는 바라볼 수조차 없던 열제라는 인식보다는 전장을 같이 누비는 전우로서의 인식이 더 강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진천역시 그렇게 이들을 이끌어왔었다. 다만 간간히 섞여 앉은 매의 군단 병들만 우물쭈물 할 뿐이었다.
“여기 앉으십시오!”
텅!
백발이 살짝 내려앉은 병사가 술통을 들고 달려와 유니아스 공주 앞에 내려놓자, 공주가 미소를 지으며 앉았다.
“술!”
“어서 술 가져와라!”
진천이 짧게 말하자 병사들이 앞 다투어 술통을 가져왔고, 음식을 가져왔다. 빈 잔에는 술이 넘치고 빈손에는 고기가 들렸다. 진천을 대하는 병사들의 모습에는 가식이 없었다.
한 병사가 외쳤다.
“가우리를 위해! 열제 폐하를 위해!”
“와아아아!”
한사람의 외침은 수십 수백 그리고 수천으로 퍼져갔다. 그들의 환호에 진천이 술잔을 들며 외쳤다.
“삶을 위해!”
“마시자아아아!”
진천의 외침에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잔을 비워나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느새 술잔을 거머쥔 유니아스 공주가 웃음을 지으며 조금씩 술잔을 비워나갔다.
“어디보자아!”
스르릉.
연거푸 잔을 비우던 진천이 흥이 돋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환두대도를 뽑아들었다.
불빛과 달빛이 어우러진 환두대도의 차가운 도신에 병사들의 눈이 집중되었다.
진천의 몸이 흥겹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천의 도가 흥겹게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입에서 흥겨운 가락과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다.
장부로 태어나,
전장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마주하고 삶을 갈구하네.
에이야아 허이야아.
에이야아 허이야아.
장부로 나서,
전장에 몸을 누여,
죽음을 동무삼아 삶을 노래하네.
에이야아 허이야아,
에이야아 허이야아.
이 거친 세상에,
전장에 몸을 누이더라도,
후회가 있으리오.
회한이 있으리오.
내 옆의 친우와 함께 나서,
내 가족, 내 나라, 내 이웃을 지켰으니…….
그 얼마나 즐거운가!
그 얼마나 행복한가!
저승동무 어깨 둘러,
후회 없다 외치노라!
에이야아 허이야아,
에이야아 허이야아.
에이야아 허이야아,
에헤라야아 허이라야아!
수천이 즐거이 부르는 노랫소리.
진천의 몸이 비상한다.
휘둘러지는 그의 환두대도는 비록 살육의 도구일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아름다운 생명의 도구이며 축제의 도구였다. 한차례 휘둘리는 노래와 검무가 끝이 나자 병사들은 계속 술잔을 마주쳐갔다.
“왕이란 무엇인지 아는가?”
한차례 검무를 추고 난 후 병사들을 향하고 있는 진천에게서 뜬금없는 질문이 흘러 나왔다. 병사들의 웃음과 노랫소리가 밤공기를 뒤흔들고 있었지만, 유니아스 공주에게는 진천의 목소리가 마치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명확히 들려왔다.
그녀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고 금보에 싸여, 화려한 궁에서 자라나 순서가 되면 높은 의자에 앉는? 그것은 왕이 아니다.”
진천의 목소리가 거세짐에 따라 병사들의 노랫소리는 점점 수그러들고 있었다.
“왕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란 걸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그 대상이 모호했지만, 말 속에는 진천의 철학이 분명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유니아스 공주는 점점 그의 목소리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니, 유니아스 공주뿐만 아니었다.
그를 따라 이 신세계에 발을 함께 디디었던 병사들, 하루를 연명하던 화전민들, 그리고 전란에 이리저리 쓸리다가 합류한 병사들과 힘없는 나라에서 목적 없는 전쟁을 해온 매의 군단 병사들에게까지 그의 목소리는 흘러들었다.
어느 사이에 끼워져 있었는지 그의 손가락에 끼어있는 통역아이템은 그의 목소리를 한쪽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남로셀린 병사들에게까지 들려주고 있었다.
“왕은……, 백성을 이끄는 자가 아닌 백성 앞에 실천하는 자!”
커다란 의지가 퍼졌다.
그의 손에 있는 환두대도가 천천히 허공을 향해 들렸다. 이윽고 그를 바라보는 병사들을 향해 내려온 환두대도의 끄트머리.
“너희는 누구냐!”
진천의 질문이 병사들에게 쏘아져갔다.
누군가가 외쳤다.
“가우리의 창이며 칼입니다!”
진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잘 들리지 않는다. 너희들은 누구냐!”
“가우리의 창이며 칼입니다!”
누군가의 목소리는 전염처럼 번지어 수백 수천의 목소리로 변했다.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은 진천은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후려치며 물었다.
터엉!
“나는 누구냐!”
“가우리의 열제 이십니다!”
“틀렸다!”
진천이 눈을 부라리며 부인하자, 다른 한쪽에서 다시 외침이 흘러나왔다.
“가우리의 방패입니다!”
그때서야 진천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외쳤다.
“나는 가우리의 방패다! 너희는 누구냐!”
“가우리의 창이며 칼입니다!”
“우와아아아!”
해일처럼 일어나는 환호.
지켜보던 유니아스 공주는 그의 거대한 등을 바라보며 전율을 느꼈다.
“내가 백성들의 살림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머리가 있었다면, 몸소 가우리의 농부가 될 것이고 소를 치는 목동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알맞은 것이 무력이기에, 이들의 창이며 방패가 되었다. 나머지는 사람을 볼 수 있는 눈.”
진천이 환두대도를 도집에 넣고 황홀한 표정을 하고 있는 유니아스 공주에게 다가오며 말문을 열었다.
“알겠소, 알세인 왕자?”
“네?”
갑자기 무슨 말인가 하며 되물었지만 진천의 눈은 그녀의 뒤를 향하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알세인 왕자와 바이칼 후작을 위시한 기사단이 멍하니 서 있었다.
파밀리온 유니아스 로셀린 공주와 고진천이 갔던 방향으로 다가오던 알세인 왕자 일행은 커다랗게 울리는 노랫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노랫소리의 중앙에서 검무를 추는 진천과 그를 바라보는 유니아스 공주.
알세인 왕자는 누이를 찾으러 온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바이칼 후작이나 테리칸 후작역시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어 흘러나온 왕에 대한 질문.
병사들과의 문답은 알세인 왕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라면 저렇게 당당히 물을 수 있을까?’
부러웠다.
‘난 무엇을 할 수 있지?’
저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그런 무리로만 보았다. 하지만 힘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세인은 이러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왔으면 앉도록 하시오.”
“아!”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알세인 왕자가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진천은 앞으로 다가온 알세인 왕자에게 커다란 대접을 내밀었다.
“이 잔은 가우리의 열제로서 그대 남로셀린의 알세인 왕자에게 주는 선물이오.”
“아, 고맙습니다.”
병사들에게나 주어지는 독한 술이었지만, 알세인 왕자는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도록 조심하여 받았다. 잔이 다 채워지자, 진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이 되시오.”
알세인 왕자는 고개를 들어 진천을 바라보았다.
“수도를 회복해야 왕에 올라서겠다는 것.”
진천의 시선과 알세인 왕자의 시선이 얽혔다.
“어불성설이오. 지금 남로셀린에게 필요한 것은 왕이오. 구심점이오. 자신의 나라에 책임을 지시오.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요.”
“말씀이 지나치오!”
“테리칸 후작.”
테리칸 후작이 뒤에서 나서자 알세인 왕자가 팔을 들어 제지했다. 알세인 왕자의 눈빛을 받은 테리칸 후작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알세인 왕자는 천천히 잔을 들이켰다. 평소 마시던 것보다 독하고 썼는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끝까지 들이켰다.
“쓰군요.”
알세인 왕자는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진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였다. 처음 수도가 함락되고, 겨우 빠져나온 후 접한 아버지의 죽음과 형의 죽음은 어린 그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현실이었다.
일가가 몰살하고 남은 것은 누이와 자신뿐.
잠자리에 들 때면 꿈에서 죽은 부모님과 형의 모습이 맴돌아 며칠을 잠도 못 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피가 마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 잔 더 하겠소?”
“주십시오.”
진천은 묵묵히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잔을 받은 알세인 왕자는 좀 전보다는 익숙하게 술잔을 들이켰다. 입가를 타고 술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자리가 이 술처럼 썼다.
왕이 되어야만 한다는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전쟁은 남로셀린의 미래를 점칠 수 없게 흘러만 갔고, 죽어간 부모님의 모습은 점차 왕위에 있던 자신의 목 위로 칼이 떨어지는 꿈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자신은 수도를 회복 하고 나서 왕위에 오른다고 했던 것이다.
“시원하군.”
고개를 드니 진천의 모습이 들어왔다.
술을 독채로 마셨는지 입 주변에 물기가 흘렀다. 진천의 눈길은 병사들을 향하고 있었다.
“왕은, 나라가 기울거나 흥하더라도 왕이오. 백성이 단 하나라 하더라도, 왕 자리에 앉았으면 책임을 지는 것이 왕이오. 그 의무를 다 했을 때 존경의 대상과 추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오.”
“…….”
“왕이 되시오.”
또다시 나온 말이었다. 이번엔 그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다. 알세인 왕자의 고개가 숙여져 올라오지 못하는 모습에 아무도 말을 붙이지 못했던 것이다.
“나야 살아온 곳이 전장이다 보니 내가 이들에게 보여줄 것은 힘밖에 없었소. 다른 것은 귀찮아서 다 수하들에게 맡겼지.”
“…….”
대답 없는 알세인 왕자에게 진천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알세인 왕자에게는 바이칼 후작의 무력과 테리칸 후작의 지혜가 있으니 더 편하지 않겠소? 내 보기엔 알세인 왕자가 할 것은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보오.”
알세인 왕자의 어깨가 작게 들썩이고 있었다.
“……되겠소.”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왕이 될 것이오.”
알세인 왕자의 작은 다짐이었다.
# 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