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67
강철의 열제 167화
제51장 불타는 남 로셀린
곡식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황폐한 잡초만이 듬성듬성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생기가 돌아야할 사람들의 눈에는 초점이 잡히지 않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
풀썩.
대열 한쪽에서 하나의 인영이 실 끊어진 마리오넷처럼 힘없이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을 뒹굴었다.
“하, 할아버지!”
땟국물이 잔뜩 얼굴에 끼인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쓰러진 인영을 잡고 뒤흔든다. 떨리며 열리는 노인의 입술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 곧 따라가마. 먼저…… 가거라.”
힘없는 목소리, 생명을 쥐어짜는 듯한 음성에는 더 이상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노인은 흐릿한 눈을 들어 한쪽에서 자신의 최후를 바라보는 젊은 아낙을 바라보았다.
“내 손주를…….”
노인의 마지막 희망을 담은 애원에도 여인은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돌려 외면하며 자신의 아이를 끌고 한걸음씩 나아갈 뿐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장면이 익숙한 듯이 최후의 힘을 쥐어짜며 싸늘하게 식어가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붙잡고 울고 있는 아이를 외면하고 한걸음, 한걸음 지나쳐갔다.
노인의 시체와 함께 남겨진 아이는 아마도 짐승의 먹이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알면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걸음을 옮겨간다.
노인과 아이의 모습이 자신들의 미래가 될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음과 가까운 것. 죽음을 지나치는 것.
그것이…… 전쟁이다.
“전하…….”
알세인 왕은 자신을 따르는 대열해서 이탈해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땅위로 몸을 누이는 자신들의 백성들을 보고 있었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었다.
“알았다. 가자.”
길을 재촉 하는 호위 기사들이 이끄는 데로 말이 걸어가는 데로 알세인 왕은 다시 나아갔다.
신성제국의 힘을 등에 업은 북 로셀린의 총공세로 한쪽 전선에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은 남 로셀린이라는 거대한 둑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연이은 패배.
동부의 무신도 파상적인 공세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북 로셀린은 연이은 패배에 전략을 바꾸었다. 전선을 넓게 형성해서 전 방위로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 로셀린에게는 그만한 전선을 유지할 전력이 없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오랜 시간을 압박하며 공세를 가했다. 결국 신성제국의 거대한 힘이 또다시 그들을 도운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가시면, 알트렝 요새가 나옵니다.”
“알겠소.”
언제나 든든해 보이던 헬리오스 바이칼 후작의 얼굴에는 피곤이 잔뜩 묻어있었다. 왠지 그 모습이 알세인 왕에게는 인간다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가셔야 합니다!’
피맺힌 절규.
‘내가 어디를 간단 말이오!’
꺾이지 않는 목소리.
한사코 임시수도를 지키고 있겠다는 알세인 왕.
‘가셔야 다시 일어섭니다!’
보내려는 노귀족 테리칸 후작.
결국 알세인 왕은 떠났고, 테리칸 후작은 몇십 년 만에 자신의 갑주를 다시 입었다. 누군가는 병사들과 남아 적을 막아야 했다.
‘허허. 삼십 년 만에 몸 좀 풀겠습니다, 전하.’
갑주를 입고 기우뚱거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남 로셀린에 남은 두 개의 기둥 중 하나가 그렇게 꺾어졌다.
왕은 떠나고 충신은 죽었다. 하지만 알세인은 왕의 자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단 하루의 배움이었지만, 그것은 알세인 왕에게 있어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고진천.’
강철 같은 믿음을 주는 사내.
알세인 왕은 그렇게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그는 당당했지만 자신은 당당하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슬펐고 아쉬웠고 한이 되어갔다.
뿌우우우!
멀리서 알세인 왕을 영접하는 알트렝 요새의 뿔 고동 소리가 울려 퍼져왔다. 백성들의 죽음을 밟고 걸어온 왕을 영접하는 소리가…….
알세인 왕과 함께 피난 온 백성들은 지친 몸을 하고 알트렝 요새에서 미리 준비 해 놓은 천막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갔다.
배고픔과 피곤에 절은 그들에게 주어진 식사는 풀뿌리가 주원료인 알 수 없는 스프와 두 조각씩의 비스킷이 다였다.
그나마 따듯한 국물이 뱃속을 채우자 먼 길을 왔던 사람들의 얼굴이 오랜만에 포만감으로 변했다. 그리고 남은 두 조각의 비스킷이 금방이라도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눈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갉아 먹었다.
이렇게 부실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어느 누구하나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오면서 본 광경은 이 풀뿌리로 만든 스프도 마시지 못하고 굶어죽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먹고 있는 이 보잘 것 없는 음식이 생명을 이어주는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요한 밤이었다.
먼 길을 떠나온 피곤함 때문인지 요새 벽 위에서 경계를 서는 병사들 외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 광경을 창가에 서서 처연히 바라보는 파밀리온 알세인 로셀린 왕에게 헬리오스 바이칼 후작이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늦었습니다. 주무시지요.”
“…….”
바이칼 후작의 말에도 알세인 왕은 조용히 어둠에 쌓인 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던 알세인 왕에게서 고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이칼 후작.”
“예.”
바이칼 후작은 알세인 왕의 부름에 담담하게 답했다.
“이 전쟁…….”
고요함.
“가능성은 있소?”
너무도 고요한 밤이었다.
“…….”
알세인 왕의 대답에 바이칼 후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모든 생명이 꺼진 듯한 너무도 고요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뿌우우우우!
길게 울리는 뿔 고동소리에 알세인 왕은 잠에서 깨어났다. 피곤함 때문인지 그의 눈가는 검게 물들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알세인 왕자는 창가로 달려갔다. 뿔 고동소리가 너무 멀었다.
뿌우우! 뿌우우! 뿌우우우우!
세 번을 연속해서 울린다.
여전히 멀리서 들리는 뿔 고동 소리에 알세인 왕자는 떨리는 눈빛을 하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아니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멀리서 까맣게 몰려오고 있는 북 로셀린 군사들.
뿔 고동 소리를 몰고서 달려드는 북 로셀린 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알세인 전하!”
소란스러운 요새를 바라보는 알세인 왕의 침실로 달려 들어온 호위 기사가 북 로셀린의 출현을 알렸지만, 이미 알세인 왕 또한 눈으로 확인 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결국 알세인 왕이 피할 시간을 벌어주었던 테리칸 후작이 무너졌다는 것을 뜻했다.
“갑옷을 준비하라!”
제법 청년 티가 나는 알세인 왕의 명령이 떨어졌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이 요새마저 무너지면 바다만이 남을 뿐이었다. 바다로 나가면 어디로 가겠는가?
화려한 은빛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알세인 왕은 요새 벽으로 향했다.
“돌을 더 쌓아 놓아라!”
“더 빨리 움직여! 싸우지도 못하고 돼질거야!”
요새에서는 적을 막아 내기 위한 준비로 분주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 백성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움직였다.
그 비장함에 알세인 왕은 굳게 마음을 먹고 성벽 위로 향한 계단을 올라갔다.
“전하, 여기는 위험합니다.”
알세인 왕이 요새 벽 위에 나타나자 바이칼 후작이 달려왔다.
그의 걱정스러운 말에 알세인 왕은 가만히 손을 들어 그를 저지하고는 적진이 잘 보이는 망루로 다가갔다.
“생각보다 적은 수로군.”
알세인 왕이 담담히 말하자 바이칼 후작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선봉대가 먼저 온 듯싶습니다.”
“그런가…….”
적은 수라고는 하지만 요새를 공략하기에는 충분한 숫자였다. 적어도 이만은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요새의 방어병력은 팔천. 일반 백성들을 더하면 오만이 넘어가는 숫자였지만, 피골이 상접한 백성들에게 칼을 들리기에는 무리였다.
“엇!”
적진을 살피던 궁정 마법사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역시 오랜 전투로 인해 피로가 쌓인 듯 피곤함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잠시 단발마를 지른 궁정 마법사는 알세인 왕에게 다가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전하.”
“베르셀 경, 말하시오.”
베르셀 궁정 마법사는 알세인 왕의 말에 잠시 주저 하다가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수인을 맺었다.
“미러 이미지!”
알세인 왕의 앞에 적진을 비춘 거울이 허공에 나타났다.
“개, 개만도 못한 놈들!”
알세인 왕의 입에서 분노로 점철된 욕이 튀어나왔다.
기다란 장대에 벌거벗겨진 채 항문에서 머리통까지 꿰어진 시체들이 매달려있는 장면이 나타나 있었다.
그 시체들의 가장 앞에는 앙상한 몸을 하고 있는 테리칸 후작의 시체가 보란 듯이 매달려 있었다.
“어찌 일국의 제상의 시신을 저리 훼손한단 말인가! 최소한의 도의도 잊은 놈들인가!”
불같이 노하는 알세인 왕의 모습에서 처절한 슬픔을 읽어낼 수 있었다. 바이칼 후작역시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뿌우우우우!
“적이 진군해 온다!”
뿔 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며 북 로셀린의 진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희에게 쉴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 같습니다.”
“오냐 오라! 여기에 모조리 묻어주마!”
알세인 왕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이 만이라는 숫자가 대오를 갖추고 다가오는 모습에서 알트렝 요새의 병사들은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적의 여유에 마음이 쫓기는 까닭이었다.
“침착하라! 투석기는 공격을 준비 하고 내 명령을 기다려라!”
바이칼 후작의 호령소리에 투석기들이 일제히 당겨졌다.
이어 밑에서 준비를 마치고 올라온 실렌 베르스 남작이 궁수들에게 외쳤다.
“궁수들은 투석기 공격이 끝날 때까지 벽에 붙어 대기한다!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면 군령으로 다스리겠다!”
베르스 남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궁수들이 벽에 몸을 낮추며 바짝 붙었다. 그때 망루에서 관측병의 외침이 들렸다.
“사정거리에 들어왔습니다!”
천천히 다가오던 북 로셀린 진영에서 투석기들이 몸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적 투석기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발사하라!”
바이칼 후작이 투석병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일제히 칼을 휘둘러 당겨진 줄을 끊어냈다.
쐐에에엑!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바위들이 허공으로 날았다. 바위들이 비행을 하는 가운데에도 북 로셀린 진영에서는 사정거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투석기를 밀고 당기며 전진 해오고 있었다.
허공에서 힘을 잃은 바위들이 땅을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콰앙! 콰콰쾅!
지축을 흔들며 떨어진 바위에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의 몸이 떡이 되었다. 약간 거리가 있었던 탓인지 날아간 바위에 비해 적의 피해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재장전!”
“으야아아!”
베르스 남작이 투석기의 지휘권을 넘겨받아 외치자 투석기를 잡아당긴 병사들이 열심히 돌을 날아 올렸다.
“준비 되는대로 무조건 발사하라! 한 발이라도 더 날려야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
쾌액!
베르스 남작이 외치는 가운데 바위들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다른 투석기들에서도 바위들이 날아올랐다.
“명중! 적 투석기 열 대중 세 대가 맞았습니다.”
관측병의 희망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행이 요새에는 투석기가 상당수 비치되어 있었다.
“또 명중입니다!”
하늘이 돕는지 이어진 공격에 또 다시 두 대의 투석기가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적의 투석기가 발사되었습니다!”
“모두 벽으로 붙어라!”
지휘관들이 벽으로 몸을 기대며 경고를 하자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몸을 벽으로 밀착 시켰다. 그리고 북 로셀린의 투석기에서 발사된 물체들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젠장! 바위가 아니다!”
베르스 남작이 이빨을 갈며 외쳤다.
빠바바바박!
쏟아져 내린 것은 어른 주먹보다 약간 큰 돌비였다. 다섯 대의 투석기에서 쏘아진 것 치고는 많은 양의 돌비가 쏟아진 것이다.
머리를 숙이고 있던 베르스 남작이 바이칼 후작에게 외쳤다.
“적이 그대로 밀고 들어올 모양입니다!”
“우리도 바위를 내리고 자갈로 바꾼다!”
성벽을 먼저 파괴할 줄 알았던 북 로셀린의 투석기는 직접 요새 내부의 병사들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자갈돌들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퍼석!
“제리!”
“끄아악!”
자갈돌이라지만 먼 거리를 날아온 힘은 투석기를 장전해가던 병사의 머리를 터트리고 지나가기에 충분했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병사들이 몸의 일부를 맞고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어서 쏴라!”
명령을 내리는 사이 북 로셀린의 방패병들이 선두에서 돌격을 시작했다. 자신의 몸보다도 더욱 큰 방패만을 들고 달리는 것이었다.
#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