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180
강철의 열제 180화
샤우 환 밀리오르 황제의 기묘한 미소가 대전에 모인 귀족들의 불안감을 증폭 시키고 있었다. 역대 신성 제국의 황제 중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 그의 한마디에 따라 이번 일의 향방이 정해진다.
“연방제국의 우유부단한 늙은이는 어쩔 것 같은가?”
연방제국의 비쉬 더 칸 황제를 일컬어 하는 말이다.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된 신성제국과는 달리 연방제국은 각 연방의 귀족들의 합의하에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어찌 보면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피로 일어선 신성제국과는 달리 뒤늦게 세워진 연방제국으로서는 대륙에서의 생존전쟁에 대한 힘의 결집과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였다.
“연방제국에서도 이미 연방의회에 안건이 넘어갔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후훗.”
한 귀족의 보고에 밀리오르 황제가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한쪽의 마법사를 향해 눈짓을 하였다. 그러자 미리 언질이 되어있는지 마법사가 한쪽 벽면으로 다가가 수정구를 들고 주문을 외웠다.
“움 타아!”
푸르른 빛이 벽에 투영되자 바로 대륙의 지도가 그려졌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밀리오르 황제가 귀족들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뭔가 느껴지는 것이 없는가?”
황제의 말에 귀족들은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슈엥 공작이었다.
“제국의 힘을 널리 떨쳐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슈엥 공작의 조심스러운 발언에 밀리오르 황제가 양손바닥을 부딪혀갔다.
짝, 짝, 짝.
세 번의 박수소리.
밀리오르 황제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가 그려진 벽으로 다가가 섰다.
“역시 슈엥 공작이군.”
“황제께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황제의 치하에 슈엥 공작은 허리를 숙였다. 침을 삼키고 있는 귀족들을 둘러본 밀리오르 황제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으며 입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이것들 보라고. 휴. 이 지도가 말이지…… 변함이 없어.”
안타까운 듯한 목소리로 한숨까지 쉬어대는 밀리오르 황제. 그를 향해 귀족들은 숨을 죽이며 시선을 집중했다. 그들의 눈빛을 느낀 밀리오르 황제가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뜨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는 이 대륙의 지도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전쟁의 선언.
패도적인 황제 밀리오르의 눈빛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뒤쪽에 서 있던 근위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아귀에 잡혀드는 소드의 차가운 감촉.
그르릉.
아이가 작대기를 들고 걸음을 걷듯, 밀리오르 황제가 근위기사의 소드를 바닥에 끌며 벽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카칵!
소드의 차가운 날 위로 핏빛 오러가 맺히며 벽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카카카칵!
“흐으음.”
마치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이며 밀리오르 황제는 핏빛 오러로 지도를 고쳐 나갔다. 벽에서 돌 부스러기가 튀며 귀를 거슬리게 하는 소리가 계속 흘러나왔지만,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이나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름다운 백색의 대리석 벽면은 흉측하게 변해갔지만, 밀리오르 황제의 눈빛에는 빛이 일렁였다.
“크크크큭!”
자신의 작품이 맘에 들었음인가?
밀리오르 황제는 소드를 거두며 벽을 바라보고 서서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벽에는 그의 야망이 그려져 있었다. 신성제국과 하이안 왕국 사이의 국경선이 사라진 대신 연방 제국과 국경선이 맞닿아 있었다.
“그동안 대륙이 너무 평화스러웠지 않는가?”
밀리오르 황제의 미소 섞인 질문에 아무도 말을 못하고 있었다. 세 제국의 중립지역인 하이안 왕국이 신성제국으로 흡수 된다면 연방제국을 향한 침공의 교두보가 세워진다는 의미!
“크하하하핫!”
즐겁다는 듯이 대소를 터트리는 밀리오르 황제에게 귀족들은 침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 뿐 아니라 평소에 황제의 말에 항상 동의를 표해오던 슈엥 공작마저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전까지 암묵적으로 치러왔던 로셀린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한마디로 하이안 왕국을 병합한다는 것은 대륙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폐하.”
“오, 슈엥 공작.”
황제의 웃음이 잦아들자, 잠시 놀라 말을 못하고 있던 슈엥 공작이 한걸음 나와 조용히 읍을 하기 시작했다.
“황제폐하의 위대하신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우리가 하이안 왕국을 칠만 한 명분이 적어, 자칫 하면 양대 제국의 합공을 받을 지도 모릅니다.”
“맞아.”
어느새 웃음기를 지워낸 밀리오르 황제는 슈엥 공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자칫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걱정하던 슈엥 공작과 귀족들은 다음에 나올 대답을 기다렸다. 그들의 바람을 알았는지 밀리오르 황제는 지도의 한쪽을 소드로 짚었다.
“로셀린…….”
한 귀족의 음성이 조용히 흘러 나왔다.
소드 끝에는 통일 로셀린 왕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밀리오르 황제는 소드를 근위기사에게 넘기며 자신의 자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입술을 열었다.
“어차피 레간쟈 산맥에 나라가 있던, 산적이 있던 알 바가 아니지. 섬나라 놈들이야 어차피 꿈도 못 꾸겠지만 연방제국과 우리는 달라. 어떠한 명분을 내세우든지 레간쟈 산맥 안을 뒤집어 볼 것이란 말이지. 하지만 연방제국이나 우리는 서로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 거기에 해상제국이 끼어들지는 못해도 방해는 할 수 있으니 말이야. 아마도 해상제국은 우리의 신경전을 틈타 떡 하나만 달라고 조를 것이 뻔한 일이니.”
턱을 괴고 앉은 밀리오르 황제의 설명은 이들도 예상하고 있는 것 이었다. 그리고 다음 나올 설명도 이제는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하오면.”
슈엥 공작이 조심스럽게 묻자, 밀리오르 황제가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남 로셀린 왕가의 잔당토벌.”
실로 교묘한 끼워 맞추기였다. 어차피 가우리란 무리에 그들이 있던지, 없던지 상관없다. 단지 연방제국보다 선점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할 뿐이었으니까.
“마법사. 카델을 불러.”
통일 로셀린 국왕 카델 딘 롯시니에게 그동안 지원해주었던 빚을 받을 때였다.
* * *
“사신이 와?”
베라 한 왕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단 하나의 단어로 정의 내리기에는 힘든 상념이 짧은 시간 속에 그의 얼굴을 휘감고 지나갔다. 그가 이렇게 놀란 이유는 바로 가우리의 사신이 국경 수비대에 소식을 전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방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하이안 국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결과가 나오든 하이안 왕국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는 베라 한 왕이었다.
가우리의 사신이 국경을 통과했다는 소식이 들어온 지 이틀째 되던 날 연방제국과 신성제국 그리고 해상제국의 조차지에 있는 사신들이 수도에 도착했다. 따로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정보가 빠른 게 아니라는 것쯤은 길가의 강아지도 알 것이다. 열흘의 시간이 흐르자 가우리의 사신이 왕궁에 도착함을 알려왔다.
“으음.”
베라 한 왕의 심기가 어지럽다는 것쯤은 그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당연했다.
일국이 다른 국가의 사신을 처음 맞이하는 자리에서 타국의 사신들이 버젓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기가 불편한 것은 베라 한 왕과 한 두 명의 귀족일 뿐, 중앙귀족원 수석 페리스만 공작이나 부수석 이와엔 후작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서있었다.
“가우리국 사신 입장하옵니다!”
궁내부장의 목소리가 대전을 울리자 모든 이들의 눈길이 입구를 향했다. 그와 동시에 궁내부장의 목소리가 다시 외쳐졌다.
“가우리국의 태대형(太大兄) 연휘가람 입장하옵니다.”
생소한 직위를 들은 귀족들과 사신들은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도 입구에서 눈을 띠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입구에서 은백색의 머리를 한 사내가 들어서자 베라 한 왕의 눈이 약간 흔들렸다. 그러나 그 뒤를 따라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한, 그것도 북부 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내들이 뒤따라 들어오자, 흔들리던 눈동자는 크게 뜨여졌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선두의 연휘가람을 필두로 네 명의 사신단이 뒤따라 들어와 도열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베라 한 왕의 눈에는 부러움이 섞여들었다. 넓게 펴진 가슴에는 당당함과 자부심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거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제국들의 사신들과도 확연히 달랐다. 선두에 있던 휘가람이 천천히 예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가우리의 태대형(太大兄) 연휘가람 하이안 왕국의 베라 한 왕께 예를 올립니다.”
예를 올리는 형태는 달랐지만 정중함이 묻어나오는 모습이었다.
연휘가람이 고개를 들어 대전을 살폈다.
어색함.
베라 한 왕과 귀족들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한쪽에 특이한 복색을 한 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눈에 보아도 하이안 왕국의 귀족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증거로 그들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허리를 뻣뻣이 세우고 약간 오만한 눈을 하고 있었다.
“태대형이라 함은 어떠한 직위를 뜻하오.”
베라 한 왕의 질문이 떨어졌다.
휘가람은 내심 베라 한 왕의 질문에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이곳에 오기 전에 파악해서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차분히 질문을 던진 베라 한 왕에게 휘가람이 천천히 답했다.
“이곳의 공작이나 공왕에 준하는 지위를 말 합니다.”
휘가람의 대답은 바로 부작용을 가져왔다.
“무엇이! 공왕이라니? 그런 망발이 어디 있는가!”
“…….”
휘가람은 어이없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미리 파악했던 하이안 왕국 같았다. 화를 내며 큰소리로 외친 자는 화려한 복식의 귀족이었다. 아마도 제국의 인원일 것이다. 휘가람은 바로 대답하지 않는 대신 눈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타국의 귀족이 자신들의 왕이 직접 묻는 상황에 끼어들어 소리까지 지르는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휘가람의 눈이 베라 한 왕에게 도달 하자, 베라 한 왕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를 지른 귀족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 말을 무시 하는가! 왜 대답이 없나!”
선뜻 대답이 없자 다시 화려한 복장의 귀족이 윽박질러 들어왔다. 그때서야 휘가람의 입이 열렸다.
“여기 왕께서 직접 물음을 꺼내셨는데, 그대가 누구기에 함부로 끼어든단 말인가.”
정중하면서도 엄한 목소리.
오히려 휘가람이 그를 꾸짖는 말을 하자 내부의 공기는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휘가람은 이어서 베라 한 왕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다시 말을 붙였다.
“제가 주제넘게 하이안 국왕 전하 앞에서 결례를 범했습니다.”
베라 한 왕은 휘가람의 예를 받으며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그러나 제국의 사신들이 베라 한 왕의 눈앞이라 하여 조심할 인간들이 아니었다.
“감히 대 신성제국의 귀족에게 뭐하는 짓거리인가. 레간쟈에 있다는 야만인들의 무리는 그리 가르치던가!”
처음부터 말을 꺼내던 신성제국의 하인즈만 백작은 하이안 국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휘가람을 향해 비웃음과 조롱을 담았다. 그러나 가만있을 휘가람이 아니었다.
“감히 하이안 왕국의 왕이 계신 자리에서 타국의 귀족이 함부로 끼어들고 소리를 치는 가! 야만인이 아니면 다 그런가?”
이 말은 하이안 왕국의 귀족들이 했어야 하는 말이었다. 휘가람의 호통에 오히려 황당해하는 그 귀족을 향해 하이안 왕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쯤 하시게, 하인즈만 백작.”
“저희 신성제국은 절대 저들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 의견에 동의 하오.”
“그렇소. 해상제국의 뜻도 마찬 가지요!”
신성제국의 하인즈만 백작이 하이안 왕의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가우리를 부정하자 연방제국과 해상제국의 귀족들이 뒤따라 동조했다. 지금 이 자리는 엄연히 가우리와 하이안 간의 자리였지만 어느새 객이 날뛰는 형국이었다.
‘아주 경극을 해라.’
‘킁, 생각보다 더 합니다.’
휘가람의 뒤에서 그 꼬락서니를 보던 몽류화가 혀를 차며 작은 소리로 주절거리자, 그 옆에 있던 삼두표 역시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그들의 행동을 바라보던 하이안 왕국의 귀족들은 말을 꺼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가고 있었다. 하이안 왕국에는 외교권이 있으나 마나한 것이다. 애초에 하이안 왕국이 강해서 중립지역이 된 것이 아니었다. 삼대 제국이 서로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일종의 경계선이나 마찬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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