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200
강철의 열제 200화
강요하지도 않는 가운데에도 무기를 놓아버리던 로셀린 병사들에게 항복하면 살려준다는 몽류화의 외침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이미 상당수가 무기를 버렸지만, 만류하는 귀족들마저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눈치를 볼 병사들도 없었다. 삶에 대한 보장이 선언되자마자 거의 모든 병사들이 무기를 집어던지고 떨리는 다리를 하고서 미소를 억지로 짓고 있었다.
“이럴 수가…….”
접전 중에 말위에서 굴러 떨어진 기사 하나가 그때서야 주변상황을 목격하고 허탈함을 느끼며 중얼 거렸다. 아직까지 싸우는 것은 몇 십도 안 되는 기사들과 귀족들 이었다.
그나마도 하나둘씩 말위에서 굴러 떨어지고 아니면 말과 함께 쓰러져가고 있었다. 그 외의 광경은 이미 모든 전투가 끝났다는 듯이 조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차가운 검날이 목에 닿는 것을 느낀 기사가 힘겹게 고개를 들며 분노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어찌 귀족들과 기사들을 이리 대하는가!”
기사의 물음은 왜 평민들에게 항복을 권유하고 받아들였으면서도 자신들에게는 그러지 않았느냐는 의미였다. 그러나 검을 들이대고 있는 가우리 기마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어왔다.
“무기를 버리지도 않고 우리에게 따지면 어쩌자는 거요!”
인상까지 팍 구기며 말하는 가우리 기마병의 말에 기사는 더 이상 할 말을 잊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고진천과 순수 가우리인들로 구성된 묵갑귀마대로서는 무기를 잡고 있는 것 자체가 저항을 의미하는 것 이었고, 저항의지를 보이는 적에게는 최선을 다해 싸워주는 것이 무장들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대륙에서는 이정도로 상황이 기울어지면 정중하게 전투를 그만 둘 것을 물어온다. 그러면 마지못해 검을 내리는 것처럼 싸움을 멈추는 것이 귀족들의 예의였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대부분이 대륙인 출신의 가우리 기마대는 거의가 평민이었고, 화전민에 심지어 북부 용병들이 대부분이었다. 용병으로 싸웠던 북부인 출신들이야 이런 관례를 알고는 있었지만 그들을 담당하는 중수들이 모조리 순수 가우리 인들이었기에 말없이 따랐던 것이다.
결국 모든 귀족이 사로잡히고 기사들이 낙마를 한 상황이 되자 전투는 완전 종결이 되었다.
가우리 측 사망자 사십오에 부상자 구십칠 명의 피해만 입은 이 전투는 로셀린 병사 만 이천의 죽음과 팔천의 부상자를 만들어 내는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이 전투에서 부상자가 사망자보다 적었던 이유는 로셀린 병사들의 신체가 극도로 약해졌었기 때문에 작은 충격과 상처에도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대 로셀린 전투에서 가우리 군이 입은 피해는 개문산성전투와 이번 전투를 합하여 총 천사백팔십이 명의 전사자와 이천사백이십칠 명의 부상자를 남겼다.
반면에 로셀린 칠만 대군 중, 살아남아 포로로 잡힌 수는 삼만 팔천 명에 달했는데 이중에 만 칠천가량이 부상자였고, 나머지 삼만 이천의 병력은 사망 내지는 실종처리 되었다.
며칠 후 전투가 있었던 곳에 도착한 보급부대는 무수하게 널린 시체와 핏자국만을 보고 부대를 되돌려 돌아가야만 했다.
* * *
길고긴 숲을 지나 신성제국의 땅이지만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마른 초원을 통과한 후에 나타난 푸르른 대지.
“드디어…….”
말 위에 가슴을 펴고 숨을 크게 들이키는 알세인 왕의 표정에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이 서려있었다.
“이 땅에 되돌아 왔군. 다시 되돌아 올 줄이야…….”
다시 오리라 항상 마음먹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니 느껴지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감상에 빠져있는 알세인 왕의 옆으로 다가온 바이칼 후작역시 많은 한이 서린 눈빛으로 너른 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역시 가슴이 뜁니다.”
담담한 감상이 바이칼 후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뒤에 도열해있는 만 오천의 남로셀린 병사들 역시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동료들의 주검을 뒤로하고, 또는 가족을 뒤로하고 가우리로 쫓겨 갔던 그들.
그들이 다시 잃어버린 대지를 찾기 위해 되돌아 온 것이다.
“그동안 마음속에 묻어놓았던 감정을 마음껏 풀어내실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알세인 왕과 바이칼 후작의 뒤로 다가온 고윈의 음성이 고요하게 흘렀다. 그 뒤로 나부끼는 매의 군단 깃발과 잘 벼리어진 칼날 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 매의 군단의 절반인 일만 정병.
“우리의 목적은 남 로셀린의 수복이 아닙니다.”
알세인 왕의 상념을 단호하게 끊어내는 한마디가 들려왔다.
“웅삼 경.”
알세인 왕이 뒤를 돌아보며 계웅삼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렀다. 말 위에 팔짱을 끼고 오연한 눈빛으로 너른 땅을 바라보던 웅삼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로셀린 전체의 수복입니다. 나아가 대 가우리에게 칼날을 들이댄 자들의 종말이 이 전쟁의 목적임을 아셔야 합니다.”
한자 한자 또박또박 끊어서 강조하는 웅삼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의 뒤에 도열한 만 오천 명의 군대.
도합 사만의 대군이 가우리로 침공해 왔던 칠만의 병력이 완전 괴멸된 날 로셀린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국경지역에 진체를 형성한 가우리, 남 로셀린 연합군의 지휘막사로 한 병사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대승입니다!”
“역시!”
“결과가 어떻기에…….”
병사의 보고에 계웅삼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웃음 지었다. 반면에 알세인 왕과 바이칼 후작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에 그 자세한 결과가 궁금했던 것이다.
기쁜 얼굴로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는 병사의 말을 듣는 순간순간 알세인 왕과 바이칼 후작의 얼굴표정은 놀람을 넘어서 경악으로 번져 나갔다.
“그럴 수가…….”
알세인 왕이 입을 벌린 채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바이칼 후작이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어찌 칠만의 대군을 격파하면서 오천도 되지 않는 사상자를 낼 수가 있는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눈빛이었다.
“제길 그나마 개고생을 한 보람이 있어 다행이군.”
그들과는 달리 웅삼이 투덜거리자 왼편에 앉아있던 삼두표가 특유의 웃음을 흘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흘흘흘, 어쨌거나 한 시름 놓았습니다.”
두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웅삼의 오른편에 앉아있던 부여기율이 말꼬리를 이어나갔다.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하일론 그 친구 이번에 큰 공을 세웠더군요. 캬! 내 밑에 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기율이 하일론의 옛 모습을 떠올려 보면서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이런 대승을 거둔 결과를 들으면서도 오히려 농담을 주고받는 그들의 모습이 알세인 왕과 바이칼 후작의 눈에 더욱 특이하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예전에 당과 싸울 때에도 수배에 달하는 적병을 물리친 일이 부지기수였음을 모르는 그들은 웅삼 일행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일단 본국의 일이 마무리가 되었으니 조만간 이차원군이 도착할 것입니다.”
약간의 소란스러움을 끊고 웅삼이 말을 꺼내자 알세인 왕의 얼굴에 자신감이 서렸다. 이미 북로셀린의 전력은 껍데기만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통일 전쟁 때 소모된 군사력만 해도 엄청난데, 이번에 원정의 대 실패로 더 이상 제대로 된 군대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 남 로셀린 지역의 지배를 위해 많은 수의 병력을 전국 각지에 흩트려둔 상황은 더더욱 악재가 되었다.
“그럼 내일부터 쉬지 않고 진군을 해야 하니 모든 병사들에게 일찍 휴식을 취하라고 하십시오.”
알세인 왕이 명령을 내리자 바이칼 후작을 비롯한 가우리 장수들이 군례를 올리며 대답을 하였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왔다.
한쪽에서 통일되지 않은 복장의 무리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초병이 달려와 보고를 하였고 이 사실은 지휘막사로 전달되었다.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막사를 나선 알세인 왕과 지휘부는 언덕에 서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일견 만 가까운 무리는 복장은 허술해도 병장기는 체계적으로 갖춘 것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 무리에서 몇 명만이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 깃발을 세웠다.
“베르스 남작!”
몇 년 전에 남 로셀린 의용군을 조직하기 위하여 가우리를 떠났던 베르스 남작인 것이다. 그가 지금 말을 달리며 펼치고 오는 깃발은 당시 알세인 왕자가 주었던 남로셀린 저항군의 상징이었다.
도착한 베르스 남작의 얼굴은 온통 수염으로 뒤덮여 있어 마치 산적과 같아 보였다. 이렇게 출정전날 베르스 남작의 일만 의용군이 합류를 마침으로서 오만의 대군이 형성 되었다.
베르스 남작의 합류는 이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병력도 병력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북로셀린 군의 동향과 배치였다.
“안 그래도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북로셀린 군대의 수는 이번 가우리에 대한 전쟁으로 많은 수가 차출 되어 겨우 치안만을 유지할 정도입니다. 거기에 무리한 전비 확보에 치중한 나머지 남 로셀린 각지에서는 반란의 기치가 걸리고 있으며, 북 로셀린의 백성들마저 국가에 대한 원망을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길게 설명을 늘어놓은 베르스 남작은 입이 마른지 입맛을 다시다가 미소를 지으며 마무리를 하였다.
“한마디로 지금이 최고의 기회입니다.”
순간 모든 이들의 눈에 빛이 감돌았다.
* * *
지난 전란의 피해를 아직도 다 복구하지 못한 참상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었다. 무너진 돌담과 성곽은 이미 제 구실을 하기에 힘들어 보였다. 그나마 안쪽에 지어진 목조건물은 병력이 주둔하는 데 있어 불편함이 적도록 하고 있었다.
“뭐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병?”
“그렇습니다. 남작님.”
레간쟈 산맥 쪽 신성제국과의 국경지역을 맡고 있는 아슬란 남작은 난데없는 보고에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젠장 결국 터진 것인가.”
안 그래도 전국각지에 남로셀린 인들이 들끓어 오르는 상황이었기에 아슬란 남작의 판단은 그다지 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고를 하는 기사의 안색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저, 남작님. 그 병력은 아무래도 폭동의 무리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체계적인 무기를 갖춘 것으로 보아 조직적으로 결성된 반군 같습니다. 거기에 숫자도 일만에 달한다는 보곱니다.”
“뭐? 일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아슬란 남작은 다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더니 땀이 약간 베인 이마를 문지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전 군을 출동시키도록 하게.”
요란한 종소리가 울리며 시끄러워진 진채 사이로 병사들이 뛰어나와 진영을 갖추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정렬한 군사들을 바라본 아슬란 남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명령을 내렸다.
“전군 진군하라! 우리의 목표는 남로셀린 반군 무리다!”
아슬란 남작의 커다란 외침에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걸음을 옮겨 나갔다.
뿌우우우!
길게 울리는 뿔 고동소리는 언덕 뒤편에 진영을 숨기고 있던 가우리, 남 로셀린 연합군에게도 들려왔다. 언덕 위를 지키던 병사가 달려와 북 로셀린 수비 병력의 출현을 알렸다.
소식을 듣고 언덕위로 올라간 계웅삼과 삼두표, 그리고 부여 기율은 순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허.”
웅삼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세어 나왔다.
“거참.”
기율의 입에서는 기가 차다는 웃음이 흘렀고, 두표는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키며 주절거렸다.
“무슨 배짱인지. 킁.”
그들의 시선 아래에는 북로셀린의 만 오천 병력이 언덕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만여 명의 베르스 남작의 저항군을 향해 잔뜩 위력시위를 하며 느릿하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저놈들 이 언덕 앞의 저항군만 보고 쳐들어오는 건 아니겠죠?”
기율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묻자, 웅삼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꼴을 보니 네 말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
일순 침묵에 잠긴 두표와 기율이었다.
웅삼의 판단대로 나태해진 북 로셀린 수비병은 언덕 아래의 저항군만을 보고 돌아갔던 것이다. 웅삼이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양옆의 두표와 기율의 어깨를 두르며 말했다.
“크흐흐흐, 첫 재물이 오는구나. 자 좌두표 우기율 준비ㅤㄷㅚㅆ냐?”
양옆을 번갈아가며 바라본 웅삼에게 둘을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음산하게 말을 맞추었다.
“당연히 싸그리 쓸어버려야죠.”
그들의 오가는 대화 속에서도 북 로셀린의 만 오천 대군(?)은 오만의 군세를 향해 용감히 발을 내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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