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202
강철의 열제 202화
바람은 불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고요하기까지 한 들판이었지만, 하이안 왕국 수비대 병사들은 마치 칼날처럼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벌판에 벌거벗겨져 내동댕이쳐진 듯 한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될까.”
긴장된 분위기는 이미 지나가고 이미 포기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젠장. 귀족들도 싸울 생각을 못하고 있는데.”
“칠만 명중에 살아온 인원들은 백 명도 되지 않는다며.”
수비병들의 대화에는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한 대화가 아닌 생존에 대한 대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미 통일 로셀린 병력의 전멸 소식은 퍼져있는 상태였다.
“그럼 나머진 다 죽었을까?”
“…….”
불길함이 수비병들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그들의 눈앞에 넓게 펼쳐진 막사들.
마치 보란 듯이 움직이고 있는 가우리 병력들의 모습은 당당함을 넘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전의를 잃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다른 것은 둘째 치고 이미 칠만의 대병력을 무너트리고 오히려 역으로 밀고 올라오는 그들의 힘은 이미 증명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들은 이야기 인데, 로셀린 병사들 중에서도 항복한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 안 건드리고 살려 줬다더군.”
“그래?”
한 병사의 말에 금세 화색이 돌기 시작하는 병사들이었다. 안도감을 느끼는 병사들 사이로 조심스러운 질문이 새어나왔다.
“그럼 저항 하던 병력들은?”
“…….”
한 병사의 질문에 안도감에 떠들어 대던 병사들이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질문을 받은 병사가 약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도망가는 자들까지 모조리 죽었다더군.”
병사들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전의가 남아있지 않았다.
일부러 널리 퍼트린 사실 중 하나.
투항이 아니면 죽음.
일부러 포로를 만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알아서 투항 하는 길 뿐이라는 것은 하이안 병사들 사이로 널리 퍼져 나갔다.
하이안 수비 병력이 있는 목책을 바라보고 있던 고진천이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연락은.”
고진천의 물음에 몽류화가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아직은 없었습니다.”
“음.”
아마도 하이안 왕에게 전달한 자신들의 요구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는 것일 것이다. 진천은 아무런 말없이 강쇠 위에서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가우리 진영은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하이안 왕국의 행동에 대해서 가우리 입장에서는 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전쟁을 수행할 때 가우리가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먼저 진군을 시작한 원정대 이외의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 붙여서 최소한의 피해로 적에게 최대한의 공포와 최대한의 전과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이안 왕국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중요했다. 실상 본국에는 최소한의 수비 병력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무리하게 뽑아내어 원정을 떠날 수 있는 것은 가우리가 적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 작용했다. 실상이 알려지게 되어 제국이나 다른 왕국이 장기전으로 전쟁을 시도해 온다면 가우리로서는 필멸이었다.
어쩌면 고진천으로서는 국가의 국운을 건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피할 수 없는 도박이었다.
이번 전쟁을 그의 의도대로 이끌어 낸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세력 이었다. 로셀린이라는 거대한 방패 막을 얻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옛날 가우리가 그래왔던 것처럼 주변 국가를 복속시켜 한 울타리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의 복안에는 하이안 왕국도 포함 되어있었다. 가우리의 무력을 보여준 이후에 하이안 왕국에 대한 각 제국들의 입김을 제거 하는 것과 동시에 로셀린과 마찬가지로 가우리의 울타리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이안 왕국은 반드시 가우리의 형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해상에서 힘을 키우는 제라르의 힘을 본격적으로 이용 할 수 있다. 바다를 장악하는 것이다. 가우리가 힘을 잃은 것 중 하나가 장악해 왔던 바다 길을 뺐기면서 부터가 아니었던가?
대륙 이상으로 중요한 바다를 연결해 줄 수 있는 하이안 왕국은 필수 조건이었다. 단지 지금은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이 오히려 독이기 때문에 진천으로서는 로셀린을 얻기 위한 일에 충실할 뿐이었다.
* * *
하이안 왕궁의 대전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의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절대 불가 이옵니다!”
“어찌 그런 치욕을 자청 한다는 말이 옵니까!”
중앙귀족원 수석 페리스만 공작의 노성과 함께 어울려 부수석인 이와엔 후작의 음성이 대전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두 분 경들께서는 최근 들어 의견이 척척 맞는가 보오.”
“아니…….”
“크음.”
베라 한 왕의 심드렁한 대꾸에 언성을 높이던 페리스만 공작과 이와엔 후작은 얼굴을 붉히며 잠시 말을 잊었다.
평소 신성제국과 연방제국을 등에 업고서 사사건건 부딪혀 왔었던 두 귀족이었기에, 그것을 비꼬는 국왕의 말에는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페리스만 공작이 조금은 차분해진 음성으로 베라 한 왕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가우리라는 나라가 우리를 어찌 가벼이 봤기에, 로셀린을 침공하러 가는 길을 열라는 말을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허가하시겠다니요. 저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하 제고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베라 한 왕은 두 귀족을 비롯해 한쪽에서 불쾌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귀족들을 보면서 무료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그들이 떠드는 것이 들리지 않는 다는 듯이 말이다.
그들의 발언이 끝나자 베라 한 왕이 느릿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가우리를 치러갈 때 로셀린 군대에 길을 열어주고 심지어 군량까지 보급해준 것은 자존심이 있는 행동이오?”
“그것과는 다른 일이옵니다!”
“뭐가 다르오?”
페리스만 공작의 반박에 베라 한 왕은 궁금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통일 로셀린 왕국은 신성제국의 인정을 받은 국가입니다. 그런 국가에 어찌 무도한 가우리를 비교를 하시 옵니까!”
“그래서 서신 한 장에 가우리를 치러가는 길을 열어주고 군량도 제공했다 이것이오?”
“군량은 돈을 받고 정당히 제공한 것입니다.”
“돈을 받기야 받았지. 그래서 그 돈을 받은 농민들이 족족 굶어 죽는 것이고.”
“…….”
베라 한 왕의 비아냥거림에 페리스만 공작은 순간 말문을 닫았다. 그러나 베라 한 왕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우리의 탐험 부대가 몰살될 위기에서 돌봐주고 이곳까지 공물을 보내오고, 친하게 지내자고 사신까지 보내왔던 가우리보다 신성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돈 몇 푼을 던져주며 우리 백성들의 피땀 어린 곡물을 강탈해간 통일 로셀린의 행동이 더 정당하다?”
“지금 전하께오선 대 신성제국의 위엄을 거스른 말을 하고 계십니다.”
베라 한 왕의 날카로운 질책에 페리스만 공작은 협박조로 되받아 쳤다.
“내 나라 백성들을 굶주리게 만드는 신성제국 보다는 차라리 가우리가 낫겠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점점 더 수위가 높아져 가는 베라 한 왕의 발언에 페리스만 공작은 목소리를 높여 나갔다. 그럼에도 베라 한 왕은 침착하면서도 비꼬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는 경은 신성제국의 귀족이오, 아니면 하이안 왕국의 귀족이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이안 왕국을 위해 항상 온 몸을 받쳐 충성하는 신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이옵니까?”
팽팽해진 대전.
페리스만 공작은 베라 한 왕을 향해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고 있었고, 이와엔 후작은 흥미로운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 가운데에 베라 한 왕이 페리스만 공작을 향해 더욱 차분 해진 음성으로 그의 분노에 답을 해 주었다.
“미안하오. 페리스만 공작,”
“크흠.”
베라 한 왕의 사과에 페리스만 공작은 헛기침을 흘리며 가슴을 폈다. 그러나 베라 한 왕의 답변은 끝나지 않았다.
“난 그저 경이 우리 하이안 왕국을 위해 뛰어다닌 일의 결과로 인해 백성들이 굶어 죽어 나자빠지고, 나에게 온 가우리의 사신단을 향해 이 대전에서 제국의 귀족들이 소리를 질러대고, 왕궁 주변에서 가우리 국 호위들을 향해 개떼처럼 제국의 기사들이 칼부림을 하였기에 잠시 착각을 했나보오.”
“전하!”
전혀 사과나 착각의 말이 아니었다.
페리스만 공작의 노성이 터져 나왔지만, 베라 한 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처연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다시 말을 했다.
“공작의 노고를 몰라준 이 무능한 왕을 욕하시오. 내 그대에게 해 줄 것은 그대가 편히 쉬게 해 주는 것뿐이라 생각 되오.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로셀린에 팔아넘긴 보급품의 대금도 미처 다 못 받았지만 그 부분은 더 이상 경에게 짐을 지우진 않을 것이오.”
“그게 무슨…….”
베라 한 왕의 돌발 발언에 페리스만 공작은 말문을 미처 이어나가지 못했다. 너무도 의외의 발언인지라 모든 귀족들이 놀란 눈으로 베라 한 왕을 바라볼 때에 그는 빠르게 말을 연결해 나갔다.
“걱정 마시오. 여기 이와엔 후작이 짐을 도와 줄 것이라 생각 되오. 그러니 페리스만 공작은 영지로 돌아가 쉬시오. 안 그렇소? 이와엔 후작?”
“전하. 전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크윽!”
명백한 축출령 이었다.
실로 교묘한 시기에 떨어진 왕의 발언 이었다.
로셀린 군의 대패로 인하여 페리스만 공작의 입지에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또한 통일 로셀린에 대한 선전 포고에 신성제국마저 두 제국의 알력 때문에 손을 쓰지 못하는 상황. 그러한 상황 때문에 페리스만 공작은 어이없게도 물러나야만 했다.
물론 지금 물러난다고 해서 영원히 물러나기에는 그의 세력이 너무도 컸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잠시 물러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최근 들어 왕이 미쳐가는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대전을 나오는 페르스만 공작은 치미는 분노를 삭일 길이 없어 보였다. 이와엔 후작 역시 자신의 정적이 물러나는 상황에서 왕에게 도움을 주면 줬지, 그를 비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두고 보자.”
왕성을 나오는 페리스만 공작의 얼굴에는 치욕과 분노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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