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254
강철의 열제 254화
“좀 더 강하게 나갔어야…….”
그는 말끝을 흐리며 슈엥 공작의 행동을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듯한 말을 꺼내었다. 그러자 비로소 슈엥 공작의 말문이 트였다.
“경의 말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니라오.”
“그렇다면 어찌 그러신 겁니까.”
“황제께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소?”
“…….”
슈엥 공작이 입가에 미소를 걸자 스카라 자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점차 얼굴을 굳혔다.
“북로셀린의 7만 병력을 방어해 낸 것도 모자라 로셀린을 수복하고 북로셀린의 수도까지 점령을 했소이다. 그러나 북로셀린을 완전히 점령치 아니한 것은 역시 힘이 모자랐기 때문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스카라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슈엥 공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든 로셀린은 그렇다 치고, 하이안과 말린까지 모여들게 만들었소. 그 상황에서 그대로 치고 들어간다면, 전부 함께 뭉쳐서 들어올 것이오. 이 얼마나 귀찮겠소? 차라리 손을 살짝 내밀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어차피 힘이 모자라면 국가간의 맹약은 휴지조각이 되오.”
“으음.”
스카라 자작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이제 적어도 표면적인 이유도 내밀었고, 우리는 적당히 행적을 흘리면 되는 것이오.”
슈엥 공작의 말에 스카라 자작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아니, 지금까지 극비리에 움직여 놓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해할 수 없는 슈엥 공작의 말에 스카라 자작의 언성이 약간 커졌다. 그런 그에게 슈엥 공작이 책망하듯 눈치를 주었다.
“지금까지 가우리의 행동으로 보아, 생각해 보겠다는 말은 거절에 가까운 것이라오. 어차피 우리 사신단이 이곳에 온 이유는 이들이 뭉치지 않도록 하는 것. 이미 로셀린 전쟁으로 인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생성된 적대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타 제국과의 연합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스카라 자작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그의 변화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슈엥 공작이 말을 마무리 지었다.
“맞소. 우리가 행적을 은밀히 타 제국에 흘린다면, 타 제국들은 우리와 가우리를 중심으로 한 4개국 연합이 밀약을 맺었을 것이라 판단할 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리 되면 가우리와 타 제국들과의 연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결국 그들로서는 우리 신성제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내 제의를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오.”
“대, 대단하십니다.”
스카라 자작은 처음으로 슈엥 공작을 향해 감탄 어린 말을 던졌다. 이전까지 형식적인 모습이 아닌 진심 어린 모습이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머리를 써서 모략을 꾸미는 것이라오. 이것도 다 우리 신성제국의 힘을 믿기에 할 수 있는 하찮은 것이 아니겠소?”
“아닙니다. 실로 대단하십니다.”
아무리 그가 무장이라 하지만 슈엥 공작이 한 일의 중요성을 모를 이는 아니었다. 적어도 제의를 받아들이든 말든 신성제국 입장에서는 여유를 가지고 공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성제국이 어떠한 형태로 움직이든, 각 제국들은 가우리를 중심으로 한 나라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스카라 자작의 시선을 흘리며 슈엥 공작은 멀어지는 가우리의 수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우리와 다른 제국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어찌 될 것인지…….’
슈엥 공작은 신성제국이 가우리에 어찌 될 거라는 의심은 하지 않았지만, 진천이라는 사내가 왠지 마음에 걸렸다.
제왕의 기운을 풍기던 그가…….
* * *
유니아스의 얼굴은 그 어떤 때보다도 어두웠다. 마치 그녀의 나라가 잠시나마 패망을 맞이했던 때의 표정이랄까?
“언니.”
“어쩌면 좋지…….”
을지가 그녀를 불렀지만, 나오는 대답은 공허함이었다. 해답이 없는 공허함.
이미 가우리는 로셀린을 위해 몇 번이나 칼을 들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나라를 되찾아 준 것도 모자라 전부는 아니지만 로셀린의 숙원이던 북로셀린의 수복도 이루어 주었다.
이 모든 것은 가우리의 힘이었다.
유니아스의 눈에 비친 하늘이 갑자기 형체를 일그러트렸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 맺힌 물방울 때문일 것이다. 로셀린에 불어온 또 다른 전화…….
이전 전쟁 이후의 피해도 복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또다시 전쟁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거기에 신성제국은 현실적인 제의를 했고, 진천은 그것을 암묵적으로 거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힘이 없다는 것은 그렇게 비참한 것이다.”
“열제 폐하.”
유니아스는 단조로운 진천의 음성을 듣고 황급히 눈물을 거두며 뒤돌아섰다. 언제 들어왔는지 진천이 뒷짐을 진 채로 걸음을 옮겨 오고 있었다.
“그 힘은 증명해야만 알아보는 법이지.”
“하오나…….”
진천은 지금 힘을 증명하기 위해 전쟁을 하려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니아스도 일국의 공주로서 이미 가우리의 허와 실을 알아차린 지 오래다.
엄청난 불균형.
그것이 가우리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이미 그동안의 전쟁을 통해 증명된 6만에 달하는 무패의 정병. 그리고 유사시에 최고 15만까지 늘어날 수 있는 병력 동원력. 대륙 최강의 무장들을 보유한 가우리…….
로셀린의 경우 현 체제에 끌어 쓸 수 있는 병력이 정예병을 포함 5만가량이 전부였다. 그리고 하이안 왕국의 경우, 얼마 전 편성된 정예 병력이 3만이었다. 물론 끌어 모으면 하이안 왕국도 10만은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고, 말린 왕국의 경우도 정예병 포함 15만은 가능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다.
가우리의 인구는 모두 해 봐야 백만이 되질 않는 수. 한마디로 성인 남자의 대부분이 무기를 들었다고 보면 된다. 즉 패배는 곧 패망으로 연결이 된다. 타 국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그것을 아는 유니아스이기에 더욱 불안했다. 더구나 상대는 신성제국. 정병만 40만에 달하는 대국이 바로 신성제국이었고, 유사시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병력 동원이 가능한 곳도 바로 신성제국이었다.
“어찌 하시렵니까.”
진천이 로셀린을 버려도 하등 상관이 없는 상황이다. 그것을 알기에 유니아스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며 동생이 있는 곳이지만, 차마 지켜 달라고는 못하였다. 그런데 지키려 하고 있었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처음으로 아쉬움 담긴 문장이 그의 입에서 흘렀다.
진천은 흔들리는 유니아스의 눈망울을 보며 잔잔하게 미소를 그려 주었다. 가끔이지만 진천의 이러한 미소가 을지와 유니아스에겐 행복이고, 위안이었다.
문제는 지금의 상황이 전혀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전쟁, 질 수 없는 전쟁, 해야만 하는 전쟁.”
“열제 폐하…….”
진천의 입에서 나온 음성에 유니아스는 흐느끼며 그를 불렀다. 그러나 불안감도, 안타까운 음성도 진천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이겨야지.”
진천은 유니아스에게 말하는 건지 자신 스스로에게 말하는지 모를 말을 조용히 되뇌었다.
“필히 이겨야지.”
뒷짐을 진 진천의 주먹에 그녀들 모르게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 * *
사방에 널브러진 병사들 사이로 삼두표가 흉흉한 안광을 뿌리며 거닐고 있었다.
“킁, 당장 일어나지 못하나!”
“커헉!”
병사들이 훈련을 하는 연병장 곳곳에는 악취가 흐르고 있었다. 바로 병사들이 훈련을 받으며 토악질을 해 댄 오물 때문이었다.
“땅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놈들은 모조리 뒈진 놈들로 간주한다!”
가차 없는 일갈이 다시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두표와 훈련교관들이 손에 쥔 가죽 몽둥이가 병사들의 온몸으로 떨어져 내렸다.
뻐억!
“크헉!”
“이런 씨팔! 어떤 시체가 비명을 지르나!”
빠악! 빡!
“아악!”
“아가리 꽉 물고 그냥 맞아 뒤져!”
휘두르는 몽둥이에는 인정도 사정도 없었다.
그동안의 훈련 자체도 엄청났던 것이 분명한데 그 강도가 더더욱 높아진 것이다. 병사들이 따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두표의 눈에는 그것도 모자라다는 빛이 역력했다.
“킁, 일어나란 말이다아!”
두표의 외침이 다시 터져 나왔다.
몰매를 맞으며 몸을 일으키는 병사들의 눈에서 원망 어린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두표는 그 원망과 살기, 독기가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크크크, 그래 좋아. 그렇게 하는 거야…….”
두표는 오히려 그들의 시선을 즐기듯 키득거렸다. 그리고 다시 몽둥이를 휘둘렀다. 자신이 악마가 되어야 이들이 하나라도 더 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 * *
전쟁을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급격히 강화된 훈련에 병사들은 조금씩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두어 집에 한 명 꼴로 병사가 존재하는 가우리의 실정상, 이러한 불안감은 빠르게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가우리의 무거워진 공기는 확실하게 이전과는 달랐다.
“역시…….”
각지에서 올라온 소식들을 살피던 대무덕의 얼굴에 어두움이 깔렸다. 서신들에는 이러한 무거워진 공기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우리가 이곳에 세워진 이후로 전쟁은 계속 되어 왔었고, 거의 피해가 없다 할 정도로 승승장구해 왔었다.
어떠한 전쟁이더라도 이렇게 분위기가 무거워진 적은 없었다.
“신성제국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큰 것일까…….”
무덕의 쓸쓸한 독백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아직 전쟁의 상대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저자거리에는 신성제국과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조금씩 돌고 있었다.
그저 소문에, 상대국의 이름까지 거론된 이유는 간단했다.
오랜 전쟁의 이유였던 로셀린 왕국이야 전쟁의 상대라 할 수 없다. 또한 상인들이 주로 돌아다니는 하이안 왕국에서의 가우리 위상은 로셀린에 버금갔다. 거기에 말린 왕국 역시 맹방이 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 않은가?
그런 단순한 생각 이외에도 바로 북로셀린과 신성제국의 관계나, 이전 팔로 사제가 쫓겨 갔던 일 등을 생각한다면 백성들의 판단은 가히 정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이야기는 주로 북로셀린에서 살았든지 남로셀린에서 이주해 왔던 이들에 의하여 퍼지기 시작했다.
그들만큼 신성제국의 영향력을 잘 아는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후우.”
서신들을 내려놓고 천천히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무덕은 답답하기만 했다. 전쟁을 하기 전부터 이러한 기운이 돈다면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직 공표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불안감이 이 정도인데 그것이 현실이 된다면?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되는데.”
생각조차 싫은지 무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나요?”
“응?”
갑자기 들려오는 미성에 무덕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허리를 숙였다.
“아이쿠, 열후를 뵙습니다.”
“치잇.”
아까와는 달리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 무덕의 모습에 을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니, 열후께서 심기가 왜 이리 불편하신지요?”
“제가 항상 어린애인 줄로 아시나 봐요?”
“어이쿠, 어인 말씀을 그리 하시옵니까. 허허헛.”
무덕의 커다란 웃음에 삐죽 튀어 나왔던 을지의 입술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둘이 웃음 짓고 있는 모습은 사이좋은 조손지간이라고 해도 될 법했다.
사실 전쟁을 하며 돌아다닌 진천보다는 무덕을 본 시간이 더 많았지 않겠는가.
무덕 역시 을지에게 애정을 표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전대 열제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받은 명령이 을지를 데리고 빠져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기 때문이었다.
“열제께서 수련 중이시라 갈아입을 옷을 미리 가져가는 중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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