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258
강철의 열제 258화
“거기 어떤 놈이 잡담이야! 훈련이 장난이지!”
“히익! 아무것도 아닙니다!”
훈련교관의 호통에 하던 말을 멈추고 열심히 무기를 놀리는 병사들이었다.
아빌런은 추방령을 받았다.
그냥 추방은 아니고, 집안 세간을 정리하여 정착할 수 있는 여지를 준 상황이었다. 목이 달아나도 상관이 없던 그에게 너무나도 관대한 결과였지만, 그 안에 숨겨진 의도는 전혀 달랐다.
가우리 병사들의 무기에 아빌런의 피를 묻히는 것은 치욕이며, 또한 그가 죽어서 이 땅에 묻힌다는 것은 가우리를 수호하는 병사들에게 미안하다는 뜻이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그의 가족들은 그날 밤까지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다음날 아빌런은 훈련교관을 찾아갔다.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제발 다시 훈련을 받을 테니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대와 무관심이었다. 심지어 전날까지만 해도 그를 위로하던 친우들도 소문을 전해 듣고는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그렇게 추방을 명받은 기간 동안 그는 매일 훈련장으로 나갔다가 훈련교관들에게 끌려 나가기를 반복했다.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던 날.
훈련은 모처럼의 휴식을 맞이하였다. 그럼에도 아빌런은 훈련장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었다.
쏴아아아.
텅 빈 훈련장을 바라보는 아빌런의 눈에는 공허함이 담겨 있었다.
꽈르릉.
갑자기 하늘이 밝아지더니, 천지를 진동하는 우레 소리가 뒤따랐다. 그와 동시에 아빌런의 몸이 움찔했다. 그의 귀에 들린 우레 소리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겨져있던 고진천이 휘두르는 환두대도의 소리였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도 했지만, 이젠 늦었다. 늦었다는 것을 알지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죽더라도 이곳에서 사람답게 죽는 게 났다고 외치던, 부인의 목소리가 귀에 윙윙 거렸다. 그녀는 이곳에서 만난 여인이었다. 자신과는 달리 화전민 출신으로 이곳에서 가우리가 세워졌던 초기부터 함께 살아온 여인이었다.
“하긴, 살려만 주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멍하게 풀린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왜 진천과 전쟁을 해 왔던 병사들이 이 승산이 없어 보이는 전쟁에 두려움 없이 임하려 하는지…….
왜 가우리와 함께 삶을 이어왔던 자신의 부인이 이곳에서 사람답게 죽는 게 났다고 하는지…….
왜 한 나라의 열제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수련을 하면서 거대한 힘을 가진 신성제국에게 굽히지 않는지…….
정말 그것이 궁금했다.
그가 본 귀족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
그가 들은 왕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
처음에 잔치라는 축제를 열면서 한 나라의 열제가 거리를 누비며 백성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그는 가식이라 생각하고 조소했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달리 다가왔다.
“차라리 죽이지…….”
막상 떠나라 할 때 밀려오던 허무감이 그를 지배하였다.
“내가 원하던 대로 이 나라를 나갈 수 있게 되었는데…… 큭큭큭.”
지금 자신의 행동이 우스운지 기괴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저자인가?”
“그렇사옵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심코 돌아보았던, 아빌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려한 복장의 여인들이 하얀색의 갑주를 차려입고 서 있는 앳된 여인의 주변에 서서 우산을 받혀들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당황한 마음에 아빌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엎드렸다.
“예를 올려라, 열후이시니라.”
엄한 목소리가 아빌런에게 흘러들었다.
“아, 안녕하시옵나이까. 미천한 백성이 예를 올리옵니다.”
당황스러운 아빌런의 예에 돌아온 것은 싸늘한 음성이었다.
“예를 올릴 필요 없다. 내 알기로 너는 가우리의 백성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으니.”
아빌런은 참담한 심정을 느끼며 을지의 질책을 들었다. 눈앞이 캄캄해진 아빌런의 귓가로 재차 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빠른 시일 내로 나가거라. 이 땅에 서있는 것조차 모욕이니라. 가자.”
“예, 마마.”
을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남겨지며 멀어지려 하자, 아빌런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기회를…….”
그리 크지 않은 음성이었으나 멀어지던 을지의 걸음이 멈추었다.
“이 목숨과 기회를 바꾸게 해 주십시오…….”
벌벌 떠는 것과는 달리 그의 음성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걸음을 멈추었던 을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뒤쪽에 있는 호위무장에게 무언가를 명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철걱 철걱 철걱.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빌런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맡에서 걸음소리가 멈추었을 때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놈이 한 짓이 어떤 짓인지 아는가.”
“…….”
아빌런은 고저 없는 무장의 음성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기회를 얻으려면 네놈은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다만 가족들의 신분은 그대로 놔두도록 하지. 단, 가족들은 나라가 정해주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어 국가에 대한 노역을 하여야 한다.”
“노, 노예라 하심은…….”
아빌런은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당연히 노예병이다.”
노예병.
드물긴 하지만 가우리에도 노예병이 있다.
그들은 전쟁을 치러 냄으로써 백성으로 환속되는 존재들이다. 일반 병사들보다도 더 험악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아빌런은 오래 생각 하지 않았다.
“은혜에 가, 감사드리옵니다.”
노예병.
그 참담한 지경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왠지 그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그래도 자신의 가족들은 노예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어차피 가족들이 지금 살던 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주변의 차가운 눈길 때문이라도 말이다.
문제는…….
“끄아악!”
콰당탕.
아빌런은 얼어붙고 말았다.
이미 한번은 보아 익숙한 광경. 바로 열제의 연무장에 그가 서 있었다.
“이 아새끼가 그 아쌔끼 맞네?”
“예, 맞습니다!”
걸쭉한 사투리.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본 을지부루가 아빌런을 어둠으로 이끄는 한마디를 하였다.
“간댕이 기대 하라우.”
“네?”
아빌런은 자신이 왜 간댕이라 불리는지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이어져나온 부루의 말에 절망의 나락으로 꺼져들었다.
“차라리 혀 깨물고 뒤지는 게 나을끼야.”
아빌런이 새로운 출발을 명받은 곳.
그곳은 열제와 묵갑귀마대의 훈련장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에게 기다리는 것은, 황송하게도 묵갑귀마대라는 지옥의 사자들과의 대련을 빙자한 간접 살인이었다.
* * *
고진천의 얼굴은 변함없이 무뚝뚝함을 흘리고 있었지만, 여기저기에 서려있는 피곤함은 금방 알아차릴 정도였다. 매일같이 전쟁과 같은 실전을 치루고 다시 대전에 들어와 쌓인 서류들을 처리하는 진천이 지치지 않을 리가 없다.
“훈련 상황은?”
진천의 물음에 몽류화가 살짝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일전의 견학으로 인하여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감은 물론, 일반 백성들 사이로도 소문이 퍼져 안정을 되찾고 있습니다. 훈련을 받는 병사들의 마음가짐이 변한 덕인지 이제는 강도를 높여도 문제없이 소화를 하고 있습니다.”
“음.”
진천도 내심 걱정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인지 얼굴에 미미하지만 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일전에 준비하던 장비들은 진행이 어찌 되어가나.”
진천의 물음에 을지우루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나섰다.
“장 노인이 드워프들을 대리고 이미 제작을 거의 완료 하였습네다. 필요한 짐승들과 창검만 구해서 달기만 하면 끝이 나는 기디요.”
“음. 그럼 사냥을 준비 하도록.”
“알갔습네다.”
진천과 우루의 대화가 지나가자, 이번에는 휘가람이 약간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섰다.
“이전까지의 전쟁과 이번의 전쟁은 양상 자체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급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하지만 보급부대를 운용하게 된다면 실질적으로 운용할 병력의 수가 줄어들음과 동시에 활동능력이 반감되게 됩니다. 이 부분에 있어 좀 더 철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휘가람의 말에 진천을 비롯한 장수들과 대신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로셀린 수복과 통일 전쟁 이전까지는 전쟁이 주목적이라기보다는 인력과 재화의 약탈이 최우선시 되었었던 전쟁이었다.
나쁘게 말하자면 무늬만 국가인 비적 떼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지만 남 로셀린 수복전쟁과 통일 전쟁부터는 그 양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운용되기 시작 하는 병력의 수가 수만 단위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야 최소의 분량으로 운용하고도 가능했지만 신성제국과의 전쟁은 최소의 분량으로 유지될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보급 물품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보급을 하기위해 빼야하는 병력수가 문제인 것이다.
북 로셀린 전쟁에서야 보급대의 수가 적더라도 유지가 가능한 것이 서로의 병력수가 고만고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성제국은 다르다. 굳이 전력의 집중을 따로 안 하더라도 넘치는 것이 병력이었고, 조금만 생각한다면 이는 보급선 차단을 위해 일부의 병력을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바리바리 싸가지고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단 말이지…….”
고심 섞인 음성이 흘렀다.
최대한 많은 보급품을 가지고 움직인다면, 보급선 차단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겠지만, 반대로 가우리 부대 운용에 있어 속도라는 장점이 사라지게 된다.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에다 속도라는 장점마저 잃는다면 전쟁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쩝, 기래도 방법이 없습네다. 둘 중 하나를 선택 해야만 하디 않겠습네까?”
진천의 걱정 어린 음성에 을지부루가 입맛을 다셨다. 부루의 푸념이 나온 뒤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뚜렷한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아직 신성제국이 어떠한 형식으로 도발을 할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대비하는 차원이고, 지형적으로 반드시 주변의 왕국들을 거쳐야 하는 상황인 것은 다들 알 것이요. 결과적으로 부대구성에 보급은 장거리 이동을 염두 해야만 할 것이오.”
휘가람이 현 상황에서 각 장수들이 고민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정리하는 차원이랄까?
“전쟁이 시작 된다면 신성제국의 예상되는 병력 수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계웅삼이 신중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지자 대륙의 정세에 밝은 고윈이 턱밑을 만지작거렸다. 그 역시도 섣불리 말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예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성제국이 직접적으로 참여한 전쟁은 백여 년 전 대륙 위쪽에 있는 달루아 공국 점령전인데, 그때 동원된 병력이 오만이었습니다. 물론 달루아 공국 자체가 해상제국의 귀족이 대륙에 위치한 영토들을 규합해서 일어섰던 국가이기에 기반도 약했습니다만……. 그 이후 일이십년 꼴로 제국간의 힘겨루기 때 거병한 숫자가 항상 삼사십 만에 달했었습니다.”
“흐음.”
고윈의 말에 가우리 장수들은 고개들을 갸웃 거렸다. 그들의 행동과는 상관없이 고윈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번 로셀린 북부지역 병탄을 진행하면서 동원된 병력이 십만에서 많이는 십오만에 달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뭐 북부지역을 점령하기에는 과한 병력이었습니다만, 이 부분은 다른 전쟁을 앞두고 일종의 경험을 쌓기 위한 전투로 보는 것이 정확하니까요. 어찌되었든 이러한 전례를 보았을 때 동원될 병력은 삼십만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역시 가장 먼저 표적이 될 곳은 이미 슈엥 공작의 방문 시에 언급되었던 로셀린이 될 확률도 높고 말입니다. 사실 이십만이나 삼십만이라는 숫자도 과한 예상입니다만, 로셀린 뿐 아니라 우리와 하이안 등의 연합군을 생각했을 때 그 정도가 적정이라 판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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