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278
강철의 열제 278화
진천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에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의 얼굴은 하얗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 말은 모든 터전의 파괴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흙 위에는 곡식 한 알, 풀 한 포기조차 없어야 한다. 인간은 물론 살아있는 모든 것이 먹고 쉴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청야전술(淸野戰術)이다.]“전쟁이 끝난 뒤에 돌아올 백성들은 어찌 살아가라는 것입니까!”
[그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말문이 막혔다.
진천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어차피 이기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 전쟁이 끝나면 말론과 하이안 그리고 가우리가 재건을 돕는다. 믿어라.]“허어…….”
바이칼 공작의 입에서 한숨이 섞여 나왔다. 반문할 수 없는 이야기들 아니던가?
[지금까지 우리가 싸워온 이유를 기억하도록. 로셀린의 전쟁에 칼을 들고 일어난 우리를 생각하도록. 다시 말하지만 이 전쟁은 로셀린 만의 전쟁이 아니다.]바이칼 공작은 천천히 수정구 안의 진천에게 고개를 숙였다.
“즉시 알세인 전하의 재가를 받아 실행 하도록 하겠습니다.”
숙여진 그의 귓가로 진천의 다부진 음성이 조용히 흘러들었다.
[나중에 굶어 죽을지언정, 침략을 받은 전쟁에는 반드시 승리한다.]비장하면서도 독기 어린 음성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투쟁방식이다.]고진천의 입을 통해 들리는 가우리의 투쟁방식.
마지막 말을 듣던 장수들은 모두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들에게는 진천의 말이 이렇게 들려왔다.
‘죽거나 거지처럼 살지언정, 승자의 노예는 되지 않는다.’
전쟁에 임하는 자세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 * *
멍하니 불길을 바라보던 바이칼 공작의 입에서 낮은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이겨야지…….”
산 너머로 지고 있는 태양을 삼키듯이 불길은 오래도록 타올랐다.
제91장 떠난 자와 남겨진 자들의 전쟁
어린아이,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앉아 저마다 바삐 손을 놀리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나이든 노인들이 돌아다니며 어린이들과 아낙들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고 있다.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 작은 칼들이 파란 빛을 내뿜으며 들려 있었고, 나머지 손에는 화살의 재료가 될 나뭇가지들이나 창대로 쓰여 질 나무들이 들려 있었다.
“열후께서는 들어가시지요.”
그 주변을 열심히 돌아다니는 을지에게 대무덕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을지는 무덕의 걱정에도 아랑곳없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녀는 소녀가 아니었다.
한 나라의 국모로서 고진천이 없는 지금 그녀는 열제의 대신이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을지는 매일같이 전쟁터로 보내질 물자들을 만드는 작업장에 나와 백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만드는 것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가우리 병사들에게 커다란 힘이 될 것입니다.”
차분하게 사람들을 다독거리는 을지의 모습은 무덕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 * *
저녁 시간이 되자 바빴던 작업장은 어느 새 고요로 접어들었다. 을지는 고개를 들어 고진천이 있을 로셀린 땅을 향해 눈길을 고정했다.
“쳇.”
입술이 뾰족이 튀어나오며, 쀼루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어가실 시간이옵니다.”
“그래.”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를 혓바닥이 그녀의 입에서 날름 나왔다가 들어간다. 그리고는 자신을 부르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진천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없으면 네가 지켜야 한다.’
경쾌하던 을지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떠나기 전 을지를 두고 하던 진천의 당부다. 어려서부터 무장들 사이에서 자란 그녀였다. 그래서 강하게 자란 그녀였다.
‘너에게 주어진 자리는 그러한 자리이다.’
이제야 어렴풋이 사랑을 알아가던 그녀에게 진천이 떠나는 것은 가혹함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나가서 싸우는 것이라면, 네가 해야 하는 일은 남아서 지키는 것이다.’
그러겠다고 다짐 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을지는 시녀들을 모두 내보내고는 한쪽 구석에 주저앉아 어깨를 감싸며 웅크렸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같이 즐겁게 놀아 보자꾸나. 그것이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약속이다.’
을지는 그때 자신은 이제 아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놀아 준다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표현이리라.
“치이.”
치기어린 그녀의 입술에서 심통 맞은 아이가 내는 듯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는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 * *
유니아스는 을지의 방으로 들어서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되돌아 나왔다. 강해 보이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방으로 되돌아온 유니아스는 창을 열어 어둠이 깔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후우.”
작은 한숨이 흘렀다.
적적하고 허전한 마음에 을지를 만나 작은 위안이라도 받아 보려 했던 그녀 자신이 왠지 초라해 보였다.
그렇게나 슬프면서도 아무런 내색도 없이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는 그녀가 세삼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슬픔을 표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슬픔을 숨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슬픔을 숨기고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은……, 힘겨운 싸움이다.
그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을지가 그녀의 눈에는 대단하게 보였다. 한 나라의 어머니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미안, 을지…….”
유니아스의 큰 눈은 을지와는 달리 금방 촉촉해졌고, 이내 이슬이 방울져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리고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을지를 도와주도록.’
무뚝뚝해 보이지만 따듯함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어려서부터 잘 따랐으니, 내가 없는 빈자리를 네가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다.’
진천이 그러한 말을 할 때에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었다.
‘열후께서는 강하신 분이옵니다.’
그러자 진천이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며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음성.
‘세상에 약함이 없는 사람은 없다. 강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약함이 존재한다.’
꿈결처럼만 들려왔던 말들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탁탁탁탁!
밖에서 요란스러운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열제궁에서 그렇게 달리는 이는 단 한 명뿐이다.
을지.
유니아스는 서둘러 눈물을 닦고 창문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우리 저녁 먹어요!”
“네, 열후마마.”
“또 울었네? 아마 열제께서 돌아오실 때에는 개구리처럼 눈이 퉁퉁 부어버릴 거예요.”
“훗.”
을지의 천연덕스러움에 유니아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을지가 갑자기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엥? 열제께서 웃다가 웃으면 으음…….”
“식사 하러 가지요.”
유니아스는 환하게 미소를 머금고는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놀리려던 을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이제는 울지 않을게.’
다음날 대무덕은 을지의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유니아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 *
아이의 눈에 비친 거대한 도끼의 모습은 경외에 가까웠다. 시퍼렇게 선 날은 섬뜩함보다는 든든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것이 아이가 보는 거대한 도끼의 느낌이다.
“수호, 내 도끼 가 오라우.”
“알갔시요!”
커다란 음성이 집안을 울리자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대부를 들어 올렸다. 아직은 어린 나이임이 분명한데도 전혀 힘들어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대부를 둘러매고 나선 마당에는 언제 보아도 당당해 보이는 아이의 아비가 서 있었다.
“아바디, 여기 있습네다!”
“기래.”
아이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위대하다.
비록 전장을 돌아다니느라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가우리의 모든 백성들은 아이의 아버지를 칭송했다. 드워프들이나 드워프의 아이들은 모두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다.
을지부루.
아이의 영웅이며 아이의 하나뿐인 아비.
“이것.”
“뭐이가?”
사라가 모자기에 싼 보따리를 내밀자 부루는 능청을 떨며 코를 가져다 댔다.
솔솔 풍기는 음식 냄새를 맡았으면서도 모르는 척 한다. 하지만 사라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지금 그가 나서는 것은 소풍을 가는 것이 아닌 전쟁을 치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좀 쌌어요.”
“기래? 기거이 잘 됐구만. 내래 부장들 놀려 먹어야 갔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부루의 모습에서 사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 옆에선 아이들이 눈을 빛내고 서 있었다. 그중 대부를 들고 있는 을지수호에게로 부루의 눈길이 옮겨졌다.
“수호, 내가 없으면?”
“제가 가장이야요!”
당당하게 외치는 아이.
두꺼운 팔다리가 부루의 몸과 똑같았다. 그 옆에서 형과 아버지를 바라보는 둘째아이도 끼워 달라는 듯이 슬며시 나선다.
“휼이는 형 말 잘 들으라우. 알간?”
“알갓시요!”
“기래 됴아. 우리 막내 좀 안아 보자우.”
부루의 능청스러운 말에 사라의 얼굴이 조금이지만 환히 풀렸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셋째가 그녀의 배를 불룩하게 만들고 있었다.
부루는 사라의 배를 보듬어 안으며 번쩍 들어올렸다.
“크하하하! 우리 셋째는 전쟁 마치고 올 때쯤이면 볼 수 있겠구만 기래!”
호탕한 부루의 음성이 울려 퍼지자 아이들도 멋모르고 웃음을 터트리며 좋아했다. 아비의 웃음이 좋은 것인지, 동생이 태어나는 것이 좋은 것인지.
“장군!”
“기래 기달리라우!”
밖에서 부장의 음성이 들려오자 부루는 커다랗게 외쳤다.
반면에 잠시나마 미소를 찾았던 사라의 얼굴이 다시 어둡게 변했다. 장군의 부인이기보다는 한 남자의 평범한 여인에 가까운 그녀였다.
부루는 장자인 수호에게서 대부를 넘겨받으며 사라의 어깨를 감쌌다.
“내래 빨리 돌아 올거이 끼니 걱정 말라우.”
“걱정 마시라요!”
대답은 장남인 수호에게서 들려왔다. 그 모습에 부루와 사라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출발하자우!”
부루의 음성에 집 앞에서 대기하던 부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몰고 전장으로 향했다.
“후우.”
부루가 떠날 때마다 나오는 것은 한숨이다. 하지만 사라는 그래도 이번만큼은 조금이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가는 곳은 최전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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