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322
강철의 열제 322화
“이, 이놈들은 미쳤어!”
“도, 도망가!”
군중심리란 무서운 것이다.
한 명이 뒤돌아 달리자, 그 뒤를 두어 명이 뒤따랐고, 또다시 그 뒤를 십 수 명이 따라 달렸다. 숲속으로 도주하는 신성제국의 병사들의 수가 늘어나자 그나마 병사들을 모아 독려하던 기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아 놓은 병사들마저 하나둘씩 눈치를 보며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절대 물러서지 마라! 숲으로 도망 가봐야 살지도 못한다! 잊었느냐 그 지독하던 몬스터들의 습격을!”
기사들의 설득에 병사들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서렸다.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맞서 싸워라!”
“제길!”
도주를 포기하자 신성제국병사들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무기를 꼬나 쥔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난동을 피우는 가우리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저기에 지휘관이 또 있다!”
어딘가에서 가우리 병사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신성제국기사에게는 불행하게도 이 소리를 들은 건 바로 부루였다.
“니런 썅 아직도 산 새끼가 있었네!”
짜증이 묻어나오는 외침이 숲에서 울려 퍼지자, 제국의 기사가 긴장된 모습으로 목소리가 터져 나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콰작!
“뭐, 뭐야?”
무언가가 박살이 나는 소리와 함께 풍차가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무엇인가 알 수 있었다.
“이런, 어떤 괴물이!”
거대한 도끼가 맹렬히 회전하며 가로막는 나무들을 부수고 날아든 것이다. 피할 시간을 놓친 기사가 도끼를 막기 위해 재빨리 방패를 들어 올렸다.
콰아앙!
“크아악!”
부루의 괴력이 담긴 대부는 방패와 함께 기사의 몸통을 박살내고 뒤쪽에 있던 신성제국 병사 다섯 명의 목숨을 더 거두고 나서야 땅에 굉음을 내며 틀어박혔다.
“으아아아아!”
동료의 몸통이 피 떡으로 변하는 모습을 본 병사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흘러나왔다. 이미 그 병사의 눈은 붉게 변해있었고, 입가에는 침이 흘러내렸다.
미친것이다.
“으헤헤! 죽여라!”
거칠게 무기를 휘두르며 가우리군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 병사 역시 내질러진 창에 의해 구멍이 숭숭 뚫리며 허물어져 내렸다.
새벽녘이 되도록 비명은 멈추지 않았고, 불길은 잦아들지 않았다.
* * *
태양빛이 지평선 위로 고개를 내밀며 새로운 하루를 알리어왔다. 잠들었던 산과 들이 깨어날 시간이지만, 개문산성에는 영원히 잠을 자는 이들로 가득했다.
“빌어먹을 아직 멀었는데…….”
아침햇살이 흉물스럽게 변한 개문산성을 비추고 있었다. 전날의 공격에도 멀쩡했던 성벽이 군대 군대 무너져 있었고 하나같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리고 병사들이 디디고 서 있어야 하는 성벽 위에는 누구인지 모를 이의 시신이 바닥에 눌러 붙어있었다.
“설마 밤중에도 공격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참담한 음성을 내뱉는 문설의 말에 검무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충분히 예상했어야 했어. 상식적으로 도착이후 쉴 것이라 생각했던 우리의 예상을 깨고 쳐들어왔던 것을 보면 밤중에 이어졌던 습격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무휼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어찌 지휘관의 입장에서 알았다 하더라도 피해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말하겠는가?
밤잠을 설치며 무너진 성벽을 매우는 병사들의 눈 밑에는 검은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단 하루 밤낮을 싸웠을 뿐인데, 병사들의 걸음걸이는 천근만근과도 같았다. 어쩌면 당연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전쟁준비를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물자를 나르던 도중에 들이닥친 신성제국의 병력.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피곤한 그들에게 들이닥친 한밤의 마법공세는 이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풀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전혀 주지 않았다.
“그런대 분명 숲에서 화광이 목격되었다고 했지?”
부장에게 질문을 던지는 무휼의 얼굴에 한줄기 희망이 스쳤다. 지난밤 공세를 막던 중 산 정상에 위치했던 경계병이 멀리 보이는 레간쟈 숲 방향에서 화광이 목격되었다고 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분명 을지 태대사자님일 것입니다.”
“그래.”
지친 그들에게 한줄기 희망이 생긴 것이다.
신성제국의 사령관기가 휘날리는 막사 안으로 한 명의 마법사가 잔뜩 굳은 얼굴로 들어섰다.
“아직도 연락이 안 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매무새를 다듬은 루키아 후작에게서 냉기가 풀풀 풍겨 나왔다. 후발부대와의 연락이 두절된 것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펠로만 백작이 심난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자 루키아 후작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일단 정찰부대를 보내는 게 우선일 듯싶습니다.”
“그러도록.”
펠로만 백작이 재차 말을 꺼내며 의견을 제시하자 루키아 후작에게서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냉기가 풀풀 풍기는 그의 모습에서 지휘막사 안에 있는 귀족들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펠로만 백작이 루키아 후작의 명령을 전달하자, 깨끗한 은빛 갑주를 차려 입고 있던 한 귀족이 바쁘게 달려 나갔다. 그러고 나서야 루키아 후작이 얼음처럼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총공세를 편다. 오늘 중으로 개문산성을 무너트리도록.”
“알겠습니다.”
“아침 식사 후 바로 전투 개시를 한다. 선봉은 카우 자작이 서도록 한다.”
“오늘 점심식사는 개문산성에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키아 후작에게 호명 받은 카우 자작이 한걸음 나서며 호기롭게 외쳤다. 커다란 공을 세울 수 있는 총공세의 선봉장 역할을 맡겨준 루키아 후작에 대한 고마움과 자신감의 반로였다. 밤새 있었던 전투로 인하여 이미 개문산성의 곳곳엔 균열이 일어 있었다.
또 전날 밤의 습격으로 인해 가우리에는 더 이상의 마법전력이 없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 무너트리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지평선에 고개를 내밀었던 태양이 몸을 완전히 드러냈을 때, 피를 알리는 뿔 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
“적의 공세가 다시 시작되나봅니다!”
부장이 급하게 외치며 달려왔지만, 검무휼의 귀에도 이미 뿔고동 소리가 들려온 이후였다.
“병력들은 모두 자기 위치로 되돌아간다!”
“빨리 움직여라!”
무휼이 커다랗게 외치자 적의 공세에 대비하여 작전을 짜던 장수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려 나갔다. 지휘막사를 나온 무휼은 바쁘게 달려가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장수들의 명령도 없었건만, 뿔고동 소리가 들리자마자, 바쁘게 성곽 위로 달려 올라가고 있었다.
“하루만 더 막으면 을지부루 대장군께서 오실 것이다!”
“으와아아!”
무휼이 그런 병사들을 향해 힘껏 외치자 병사들이 환호로 대답했다. 목이 쉬어 갈라져버린 외침들이었지만 분명 무휼에게는 걱정 말라는 소리로 들려왔다.
무휼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의 미소를 보았음인가?
눈가에 스친 병사들의 입가에도 모두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결코 병사가 아닌 늙은 노인이 여기저기 뚫어진 갑주를 주워 입고 창을 단단히 쥔 채로 듬성듬성 빠진 이빨을 드러내며 마주 웃어주었다.
눈 밑으로 흘러내리는 투구를 자꾸만 밀어 올리던 소년병이 무휼을 보고 멋쩍은 듯이 웃고 있다.
팔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붕대를 칭칭 감은 병사가 한 손에 이가 빠진 환두대도를 들고 갈라진 목소리로 환호하며 화답하고 있다.
가족들을 따라 도망갔어야 할 아녀자가 남장을 한 채로 돌을 주워 모으며 그들을 향해 한껏 미소를 짓는다.
그들의 미소를 바라보며 달려 나가는 무휼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단숨에 성루에 오른 무휼이 자신의 환두대도를 거칠게 뽑아들며 외쳤다.
“당장 죽어 나자빠지더라도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남을 것이고!”
“와아아아!”
그의 벅찬 외침에 이 빠진 노인이 화답한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한 우리의 가족과 이웃은 대대손손 당당히 살아갈 것이다!”
“싸우자!”
어린 소년이 투구를 들어 올리고 전의를 불태운다.
“그리고, 나 검무휼은 단 하루를 살더라도 대 가우리의 백성으로서 살겠노라!”
“이야아!”
남장을 한 여인이 돌 바구니를 옆에 낀 채로 한손을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무휼의 눈가에서 한줄기 희열이 흘러내렸다.
“오라!”
거미새끼들처럼 몰려오는 신성제국을 향해 무휼의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개문산성의 의지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 * *
말을 달리던 을지부루의 손이 들어 올려졌다. 뒤따르던 행렬들이 부루의 신호에 의해 일제히 멈추어 섰다. 순간 시위는 침묵과 함께 긴장 속으로 빠져들었다. 저마다 무기를 부여잡고 주변으로 귀를 기울였다.
“어?”
“뭐야, 조용히 해.”
누군가가 눈을 치켜뜨며 짧은 음성을 내뱉자 동료병사들이 그에게 주의를 준다. 하지만 그 병사뿐만이 아니었다. 하나둘씩 귀를 기울이던 병사들이 바람결에 들려오는 함성소리를 들은 것이다.
“이건!”
“다들 들리네?”
선두에서 멈추어 섰던 부루가 숯 검댕이 묻은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꺼먼 얼굴 덕인지 누런 그의 이가 더욱 똑똑히 보였다.
“역시!”
바람결이지만 분명히 들려오는 익숙한 함성.
개문산성의 병사들이 외치는 것이 분명한 함성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온 것이다. 그들은 가우리를 외치고 있었다.
“우릴 부르는 기야.”
부루의 나직한 음성에 병사들이 저마다 이를 악물고 눈을 치켜떴다. 당장 쓰러지면 죽은 듯이 잘 것 같은 병사들의 눈에 활기가 돌았다.
“가자우. 저 함성소리가 울리는 곳으로.”
부루가 다시 말을 박차고 병사들이 수레를 몰기 시작했다. 찰나의 휴식이 그들에게 힘을 주었음인가?
병사들의 행렬은 더욱 빨라졌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신성제국으로부터 노획한 말들과 수레들이 줄줄이 뒤따르고 있었다.
* * *
쿠구구궁!
지진이 나는 듯 한 굉음과 함께 위태롭던 개문산성의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지는 돌무더기 속에 가우리 끝까지 저항을 하던 가우리 병사들이 뒤섞였다.
“성벽이 무너졌다!”
희열에 찬 음성인가? 아니면 광기에 찬 음성이었던가…….
반쯤 무너져 내린 성벽으로 신성제국의 병사들이 물밀듯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비에 공백이 생겨버린 상황에서 밀려오는 신성제국 병사들을 막기 위해 몇몇 병사들이 달려들었으나, 창 한 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한 채, 떠밀려 쓰러져 발에 밟혀 죽음을 당했다.
“돌을 던져라!”
아직 온전한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무너진 성벽을 향해 바위를 던졌다.
그러나 신성제국 병사들은 그곳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었다. 이내 허술해진 수비망을 피해 벽을 타고 올라온 신성제국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저곳을 막아야한다!”
이미 피를 뒤집어 쓴지 오래인 검무휼이 살기를 줄기줄기 뿜으며 뛰어 내려갔다.
“모두 쳐 죽여라!”
“죽어라 이 야만인들아!”
기세를 타는지 호기롭게 외치는 기사들의 양 옆으로 병사들이 내달려들었다. 다행히 무너진 돌무더기 덕에 안으로 들어오는 병사들이 진행이 더뎌 재빨리 안쪽으로 방어선을 펼칠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문소, 병사들을 이끌고 성벽으로 기름과 짚단을 가지고가 무너진 곳에 불을 지르게!”
“충!”
“궁수들은 명을 기다리지 말고 쏘아라!”
무휼의 말이 떨어지자 밀려드는 신성제국군에게로 화살들이 비가 오듯이 쏟아졌다.
뒤에서 한없이 밀고 들어오려는 탓에 선두에 선 병사들은 방패를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하고 화살 밥이 되어 뒤에서 밀려오는 아군의 발길 아래에 깔릴 뿐이었다. 그때 제국군이 올라섰던 무너진 성벽위의 주변에서 또다시 접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흑색 찰갑을 입고 종횡무진하는 가우리 장수 문소의 무위에 신성제국 병사들은 비명과 함께 추락했다.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은 무기도 가지지 않은 채로 저마다 몸통만한 독을 들고 내달렸다.
“멈추지 말고 달려라!”
적병을 베어내며 문소가 독려를 하자 병사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그때 무너진 성벽의 한쪽에서 병사들의 진입을 지휘하던 기사가 필사적으로 접근해 오는 가우리 병사들이 들고 오는 것의 내용물을 짐작했는지 커다랗게 경고음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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