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326
강철의 열제 326화
제110장 그들만의 잔치
푸르릉.
지친 울음을 뱉어내는 말의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폐허가 된 개문산성으로 을지부루의 병력이 천천히 들어섰다.
뒤집어쓴 핏물이 아직도 식지 않았는지, 더운 김이 갑옷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장군…….”
피를 흠뻑 뒤집어쓴 모습을 한 을지부루를 부르는 검무휼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부루의 갑주가 그나마 멀쩡한 형태를 이룬 것과는 달리 무휼의 갑주는 거의 넝마나 다름없이 부서져 있었다. 물론 그 사이로 이리저리 패인 상처들은 전투의 치열함을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멍하니 있지 말고 전열을 가다듬으라우.”
퇴각을 하지 못하고 부상을 입은 모습으로 살려 달라 소리를 지르던 신성제국 병사들의 비명과도 같은 애원소리가 여기저기 울리고 있었다.
“시끄럽구만 기래.”
“빨리 수습하도록 하겠습니다.”
“내보내라우. 저것들 잡아봐야 쌀만 축내디 않갔네?”
“명을 받듭니다.”
부루가 말에서 내리면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자, 무휼이 군례를 올리며 휘하 부장들을 불러 명을 전달해 나갔다.
어차피 포로를 잡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여기서 퇴각하지 못할 정도로 부상을 당했다면 적병에게 되돌려 보내는 것이 적에게는 부담이 될 것이다. 반대로 손이 가는 만큼 아군에게 몰려오는 적이 적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어서 드시지요.”
명령을 내리고 돌아온 무휼이 고개를 숙이며 부루의 옆에 섰다. 당장에 쓰러져도 모자랄 상처를 입고 있었지만 부루의 앞에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내래 뒤를 봐줄 거이끼니, 가서 쉬라우.”
“괜찮습니다.”
“명령이야. 그래서 어디 칼질이나 제대로 하갔네?”
“알겠…… 습니다.”
부루의 강압 섞인 걱정에 무휼은 고개를 숙인 대답을 하곤 물러섰다. 부루는 천천히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따라온 병사들이 말없이 말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모두가 굳은 모습.
결코 겁에 질려서 굳어 버린 모습은 아니었다.
자신들이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알기 때문에 그들은 웃을 수 없는 것이다. 천유화를 비롯한 부상병들이 몸을 던진 마지막 전투가 이들을 이곳으로 이끌어 준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중 몇이나 살아서 도착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죽상들 하디 말고 날래 움직이라우. 간뎅이!”
“예, 대장군!”
부루의 부름에 아빌런이 재빠르게 달려와 섰다. 피에 흠뻑 젖은 모습이 부루와 별다르지 않았다. 그만큼 치열하게 싸웠으리라.
“지친 성의 병사들을 대신해서 경계 세우라우.”
“‘알겠습니다.”
말 한번 잘못했다 찍혀서 묵갑귀마대와 을지의 전용 대련 상대가 되어 죽을 고생을 했었던 아빌런이 어느새 듬직한 전사로 탈바꿈해 있었다.
부루의 부대도 쉬지 않고 달려왔고, 또 치열한 전투를 치러 지쳐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힘들다 말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들의 무기를 쥐고 움직였다.
“제길.”
부루의 명령에 움직이던 아빌런의 입가에서 나직한 욕설이 흘렀다. 이리저리 죽어 나자빠진 가우리군의 시신 중에는 그나마 갑주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그저 창 한 자루만을 쥐고 눈을 부릅뜬 노인부터 돌을 나르다가 화살에 죽임을 당한 여인네까지 섞여 있었다.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싸웠는가…….
“제기일.”
분노로 음성이 점점 커진다.
천유화와 부상병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살길을 마다하고 죽음을 택했는가…….
“제에기랄!”
참지 못하는 분노가 더더욱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벨로 폰 루키아 후작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성제국 병사들이 분주하게 가우리군의 시신들을 한쪽에 쌓아 올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부상병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치에라 펠로만 백작의 입에서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펠로만 백작의 보고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성난 병사들에 의하여 난도질 되어진 시체들이었지만, 전부 팔이나 다리에는 붕대나 부목 등이 감기거나 덧대어져 있었다.
심지어 루키아 후작에게 죽기 전까지 그의 호위기사들을 신들린 듯이 베어 넘기던 자 역시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왼손잡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그자의 왼팔에는 하얀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다.
“지독한 놈들입니다. 이렇게 부상병들까지 사지로 내몰다니 말입니다.”
곁에 있던 호위기사가 펠로만 백작의 말을 이어 치를 떨듯이 한마디 내뱉었지만, 루키아 후작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자네 눈에는 내몰린 병사들로 보였나.”
“예?”
침묵에 쌓인 루키아 후작 대신 펠로만 백작이 호위기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영문을 몰라 하는 기사의 표정을 본 펠로만 백작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한쪽에 쌓인 가우리 병사들의 시신을 바라보며 말문을 이었다.
“절대로 내몰린 모습이 아니었어.”
확신하듯이 단정 지은 펠로만 백작의 말에 기사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그렇다면…….”
경악에 찬 기사가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자, 펠로만 백작이 그저 고개만을 끄덕여 주었다. 주변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이들도 펠로만 백작과의 대화를 들었는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의 전투를 생각해 보면 펠로만 백작의 말이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설득력 있게 다가온 것이다.
“역시 살려둬선 안 되는 무리들이군.”
침묵을 깨고 나온 루키아 후작의 음성에는 살기가 짙게 묻어 있었다. 그 말을 내뱉는 루키아 후작의 시선은 비웃음을 입가에 달고 있는 천유화의 시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후작각하!”
“뭔가?”
선두 쪽에서 루키아 후작을 찾는 외침에 대답을 한 것은 펠로만 백작이었다. 숨을 헐떡이는 전령이 다가와 군례를 올리며 빠르게 보고를 올렸다.
“개문산성에서 적들이 전장의 한가운데에 수십 대의 수레를 끌어다 놓고 되돌아갔습니다.”
“뭐?”
펠로만 백작의 반문에 전령이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확인한 바로는 개문산성에 버려졌던 우리 부상병들이었답니다. 그래서 지금 병력을 보내어 본진으로…….”
“태우도록.”
“후작각하?”
루키아 후작의 서늘한 한마디에 보고를 하던 전령도 보고를 받던 펠로만 백작도 주변에 서 있던 기사들도 모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못 들었는가. 끌고 올 필요 없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태워 없애도록.”
“후작각하!”
“그리고 답례로 여기 시신들을 수레에 실어 보내주도록 한다.”
그 명령을 끝으로 루키아 후작이 등을 돌려 막사로 향하자 기사들이 당황한 모습으로 펠로만 백작을 바라보았다.
잠시간 입을 열지 못하던 펠로만 백작이 씁쓸히 웃음 지었다.
“참 우습지 않은가. 누구는 부상을 입은 채로 한 명이라도 더 죽이겠다고 몸을 던지고, 누구는 적의 호의로 목숨을 부지해서 실려 오고 말이지.”
“하지만…….”
펠로만 백작의 자조어린 음성에 기사가 나서며 말문을 열었지만, 그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물론 불가항력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시기가 안 좋았다. 후작각하의 명령을 따르도록.”
“백작님.”
펠로만 백작은 기사의 음성을 한 귀로 흘리듯이 몸을 돌려 가우리군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적이지만, 정중히 다루어 돌려보내게.”
그 말을 끝으로 펠로만 백작마저 지휘막사로 발걸음을 향했다.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전장의 한가운대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움직이기도 힘들어 보이던 부상병들이 온몸에 불을 붙인 채 수레 밖으로 뛰어나왔다. 하지만 그러한 놀라운 몸부림도 이내 타오르는 불길로 인하여 하나둘씩 스러져갔다.
“지독한 놈들. 아군을 저리…….”
허물어진 성벽 한쪽에 서 있던 아빌런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이고 싶은 적병들이었지만, 저런 모습을 보고 통쾌해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 저기!”
한 병사의 손끝에서는 십여 대의 수레가 불타오르는 곳을 지나 개문산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백기와 함께 천천히 다가오는 수레를 본 아빌런의 눈동자가 급격히 확대되었다.
선두에 있는 수레 위에는 피에 물든 삼족오기가 덮여 있었지만, 그 뒤로 따르는 수레에는 가지런히 누워 있는 가우리 병사들의 시신이 보였다.
“혹시 모르니 대장군께 알리고, 넌 나와 마중을 간다!”
아빌런이 재빠르게 주변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한 병사와 함께 성벽을 뛰듯이 내려가 말 위에 올랐다. 곧이어 두 기의 기마가 개문산성을 나섰다.
말을 몰아 달려 나간 두 기의 기마가 십여 대의 수레를 이끄는 신성제국의 병사들과 만났다.
“물러서라.”
아빌런이 도착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신성제국의 기사가 병사들을 물렸다. 병사들이 수레에서 내려서며 뒤로 물러서자, 아빌런이 조심스럽게 말을 몰아 다가왔다.
“대 신성제국 원정군 총사령관이신 루키아 후작님께서 귀국의 호의에 감사의 표시로 귀군의 병사들의 시신을 되돌려 보내었소.”
의례적인 자기소개도 없이 신성제국의 기사는 무뚝뚝하게 말을 내 뱉었다. 아빌런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말에서 내려 수레들을 향해 다가가 삼족오기를 들추어 보았다. 그곳에는 미소 지은 천유화가 누워 있었다.
“제기…….”
모두 죽었으리라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니 더욱 가슴이 메어져왔다. 잠시 시신들을 바라보던 아빌런이 기사에게 걸어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죽여야 하고 죽이고 싶은 적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성제국의 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안 할 수 없었다. 아빌런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한 기사가 말을 돌려 병사들에게 되돌아 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다 문득 말의 발걸음을 멈추고 살짝 고래를 돌려 아빌런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고개만을 돌린 기사가, 차마 입을 떨어뜨리기 힘든 듯이 입술을 들썩이다가 한참 만에 질문을 던졌다.
“이들 모두 부상병이었소?”
“그렇습니다.”
기사의 말에 아빌런은 담담하게 대답을 하였다.
“이들이 명령에 의해 우리 후방으로 공격해 온 것이었소?”
“…….”
기사의 질문에 아빌런은 말없이 유화와 그 주변에 조용히 누워 있는 시신들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대답했다.
“우리 대장군께서 살아 돌아가라고 명했었습니다.”
“…….”
“아마도 이들은 저승에서 군법 위반으로 벌을 받을 것입니다.”
“대답…… 고맙소.”
아빌런의 대답에 더없이 굳어진 기사가 고개를 다시 돌려 말을 몰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힘겹게 한마디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적이지만……, 존경스러운 전사들이었소.”
“…….”
그 말을 끝으로 수레를 몰고 왔던 신성제국 기사와 병사들이 천천히 본진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본 아빌런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당연하지요. 그들은 대 가우리의 용사들이니까…….”
성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수레의 행렬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숙연함과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수레 위에 빼곡히 쌓인 동료들의 시신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고, 그들을 향해 왜 그랬냐고 원망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물과 원망의 대상이 된 이들은 하나같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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