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34
강철의 열제 34화
정적.
하이디아를 둘러싸고 앉은 고진천과 을지우루 사이에는 미묘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식사를 마쳤음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루를 향해 불편한 시선을 보내던 진천은 고개를 돌려 하이디아에게 말을 걸었다.
“난 고진천이다. 이름은?”
“하이디아 바이퓌미르입니다.”
“왜 거기에 잡혀 있었나?”
진천의 설명에 하이디아의 대답은 순순히 나왔다.
하이 엘프 일족인 하이디아의 사명은 일반 엘프 일족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100년간 새로이 태어난 엘프 일족들을 향해 직접 신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것이었다.
신의 손길은 일종의 세례로서 이것을 통해 존재의 증명을 받는다는 의식이었다. 그러던 중 알빈 남작의 영지에서 그만 사로잡힌 것이다. 물론 평소대로라면 피할 수 있었지만, 알빈 남작에게는 희귀 아이템인 마나 구속구가 있었다. 보통 국가에서나 관리하는 것인데, 이것은 전시에서 적의 기사나 마법사를 잡았을 때 사용하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었다.
“그랬군.”
“…….”
하이디아의 설명을 들은 진천과 리셀의 고개가 끄덕여질 때, 우루에게서는 질투의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여기에서 유일하게 말이 안 통하는 것은 우루가 유일했다. 진천이야 제라르에게서 접수받은 통역 팔찌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니, 말이 통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대화가 계속 이어지자 우루의 눈은 서서히 리셀의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반지로 향하고 있었다.
“저, 스승님.”
“왜 그러느냐?”
“반지 좀…….”
처량한 우루의 음성에 리셀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처량도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도움의 손길은 진천에게서 뻗어왔다.
“저 반지는 네 스승의 스승이신 분의 유품. 그것을 사사로이 사용하기 위해 빌리다니,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하나!”
“죄송…… 합네다.”
진천의 한마디에 우루는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변했다. 평소에 자주 사사로이 리셀의 반지를 사용했던 진천의 논리치고는 앞뒤가 안 맞았지만, 지금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진천의 견제는 성공하는 듯했다.
“어?”
“으음!”
그런데 그 순간, 잔잔한 미소를 띠운 하이디아가 우루의 앞으로 다가와 갑자기 자신의 이마를 우루의 이마에 가져다 대고 양손은 우루의 양 옆머리를 감쌌다.
그녀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에 진천의 미간에는 두 줄기 골이 파였고, 리셀의 눈에는 호기심이 감돌았다. 물론 우루의 입은 양 귓가에 걸려 있었다.
“에루일.”
우우우웅.
맑은 음색이 흐르자 우루의 머리를 감싸 쥔 양손에서 하얀빛이 흘렀다.
“일루엔 하이온 샤로엠 디엘레디움.”
화아악!
“오오오!”
사방을 감싸 안는 듯한 밝은 빛이 터져 나오자, 리셀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빛이 사그라지자 하이디아가 우루의 이마에서 자신의 이마를 떼면서 입을 열었다.
“숭고한 전사의 후예에게 하이 엘프 일족의 하이디아 바이퓌미르가 인사 올립니다.”
“……어? 들린다! 고조 들립네다!”
고개를 숙이며 우루에게 인사를 올리는 하이디아의 말이 우루에게도 똑똑히 전달되고 있었다.
“리셀, 저게 뭔가?”
“아…….”
입이 찢어지다 못해 덩치와는 안 맞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는 우루는 진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때까지도 황홀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리셀은 자신의 귓전을 울리는 진천의 불편한 목소리에 의해 현실로 되돌아왔다. 침착함을 찾은 그는 진천에게 조용히 설명을 해주었다.
“일종의 신성마법입니다.”
“신성마법?”
“예.”
“뭔가, 그게?”
진천이 이해 불가의 표정을 짓자 리셀이 어색하게 웃으며 신과 신관의 관계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진천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거와 이 상황은 무슨 연관이 있나. 혹시…….”
“아이템은 아닙니다. 바로 그 신성력을 이용한 엘프 고유의 신성마법이지요.”
“음.”
“하이 엘프의 특성상 대륙을 종단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조화의 능력 중에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 언어의 조화이지요. 바로 저것입니다. 상대의 언어와 자신의 언어를 조화시키는 겁니다.”
리셀의 설명에 진천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시각 우루는 하이디아와의 대화에 여념이 없었다.
“바람이 느껴지네요. 대륙을 누비는 거센 대륙풍.”
“저 말입네까?”
“네.”
하이디아의 맑은 미소는 그것을 보는 모든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진천은 하이디아가 마치 우루를 잘 아는 듯이 말을 하자 궁금함이 일었다. 그때 리셀을 향해 하이디아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리셀 님에게서는 세월의 깊이와 막혀있는 듯한 깨달음이 느껴집니다.”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막혔던 깨달음을 깨어내고 세월의 깊이와의 조화를 이루실 것입니다. 조급하지 마시길…….”
“지금 뭐하는 건가?”
마치 홀로 서있는 느낌에 진천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리셀이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이 분의 능력 중 하나가 그 사람의 본질을 보는 것입니다.”
“흐음.”
진천의 표정에 흥미가 서렸다.
“난 뭐가 느껴지나?”
“…….”
진천의 물음에 하이디아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진천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하였으나,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진실의 눈은 마치 허공을 휘저어 가는 듯 아무런 것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완벽한 무(無)였다. 이러한 경우는 그녀에게 처음이었다. 아무리 백치라도 느껴지는 것이 있었지만 지금 진천의 내면은 작은 상념 외에는 느껴지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본 것은 빈 공간 뿐이었습니다.”
“…….”
“우리 장군 머리가 비었습네까!”
결국 무덤을 판 우루는 진천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바라보는 하이디아의 입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무(無) 아니면 무한의 포용일지도.”
두 손을 모으며 눈을 감아가는 하이디아의 머리 위로 별빛이 비추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녘, 지난밤의 휴식을 끝내고 그들의 행렬은 다시 질주를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응? 척후대 감속(減速, 속도를 줄이다) 하라!”
“감속(減速)!”
척후를 맡고 달리던 병사는 눈에 어스름이 무엇인가 보이자 신속히 명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곧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오크였다.
지체하지 않고 본대로 향한 병사가 말을 달려가 우루를 향해 보고했다.
“전방에 돼지…… 아니 오크무리!”
“올마나 되네!”
“오십여!”
“좌군 따르라우!”
한 떼의 기마가 멈추지도 않은 채 달려나갔다. 우루를 선두로 달려 나간 기마대는 얼마 달리지 않아 멀리 앞에 옹기종기 모인 오크 무리를 볼 수 있었다. 그때서야 오크 무리들도 우루의 기마대를 발견했는지 갑자기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뀌이이익! 니간 기대마루데!(뀌이이익! 인간 기마대들이다!)”
다른 오크들보다도 덩치가 큰 부카불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의 주변으로 오십여 오크들이 눈을 빛내며 일사불란하게 모여 들었다.
“무까엘!(뭉치자!)”
지금은 죽고 없어진 오크족의 지장 무카불의 무적의 대기마병 전법이 아들인 부카불의 손끝에서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뀌익, 뀌익! 무까엘 무까엘!(뀌익, 뀌익! 뭉치자 뭉치자!)”
“칼이수마 오크마루 아일레!(용맹스런 오크들을 보아라!)”
순식간에 하나의 덩어리로 뭉친 오크들의 눈에는 전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부카불은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아버지의 실책은 적이 비켜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고, 궁병이 있는 곳에서 뭉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카불이 막아선 길에는 우회할 길도 없이 오크들로 인하여 막혀 있었고, 정면에는 궁병은 보이지 않고 단지 십 여의 기마만이 달려오고 있었다.
‘뀌익! 아버지와 난 달라!’
부카불의 눈에 신념이 어리고 있었다.
한편 달려오던 부루는 어디선가 본 듯한 광경이 눈에 들어오자 혀를 찼다.
“헐, 오케된 게 이 동네 돼지들은 죄다 뭉치네?”
그러나 우루의 뒤에 타고 있는 하이디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크들의 진형은 뒤의 본 부대를 제외한다면 지금 달리는 십여 기마로는 뚫기가 힘든 것이었다. 결국 본대를 기다리거나 난전으로 해치워야 하는데도, 기마들은 속도를 멈추지 않고 달리는 것이었다.
“통아 재라우!”
우루의 음성이 울려 퍼지자 귀마병들은 말을 몰던 손들을 모두 놓고 각자의 활들을 들었다. 손을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흔들리거나 위험한 사람들이 없었다.
하이디아는 이들의 기마술에서 다시 한 번 놀랐다. 조화의 종족인 엘프가 말을 달린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말과 동화를 이룰 수가 없는 법인데, 이들은 마치 말을 타지 않은 듯 편하게 자세를 바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작은 활에 재어진 것은 성에서 통신 마법사를 해치울 때 보았던 작은 대롱이었다.
“선녀님은 꽉 잡으시라우야!”
‘선녀가 뭘까?’
말없이 우루의 말을 들은 하이디아는 궁금함에도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크무리의 약 200여 미르(m) 앞에 이르고 우루의 시위가 당겨지자 십여 기의 기마병들이 동시에 시위를 당겼다.
두두두두두두.
“됴아.”
점점 가까워지는 오크무리를 본 우루의 입에서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 순간 우루의 편전이 허공을 갈랐다.
투확!
투투퉁!
시위가 튕겨지며 애기살이 허공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 광경을 지켜본 하이디아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령의 향기도 느끼지 못했는데…….’
엘프의 화살이 정확한 이유는 바람을 타기 때문이다. 자연에 친화력이 강하기 때문에 자연의 의지가 화살을 인도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보는 인간은 엘프의 궁술과도 달랐으며 달리는 말에서도 자유롭게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의 화살보다도 더 빨랐다. 단순히 빠른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꾸이익!”
슈파팍!
“꾸에에에!”
부카불의 눈이 커졌다. 그의 실책은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인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십여 개의 화살에 오크들이 꼬치 꿰이듯 순식간에 나자빠지자,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소자 부카불 아버지께 가옵니다.’
“돌이입!”
우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생각을 끝으로 돌입한 기마들에 의해 무카불과 부카불 이 대는 우루에 의해 마지막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한편 열심히 달리던 제라르는 먼저 달려나간 기마들의 격돌이 눈에 들어오자 할 말을 잊었다. 무거운 갑옷을 차려입고 손을 놓고 말을 달리면서도 여유롭게 화살을 날리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궁기병이라는 것도 놀랄 일인데 중갑 기병이 그 역할을 하는 것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던 것이다.
덜커덩.
“엑, 퉤퉤퉤!”
흙먼지가 입에 들이닥치고서야 벌어진 입을 다문 제라르는 자신의 탈출기도가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여기의 백오십 명이 다 기사라니……. 게다가 전부 소드 오너 이상급!’
제국의 기사단이라 할지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소드를 잡은 자들을 나누는 것은 각각 초보인 소드 워커, 익숙한 자를 뜻하는 소드 러너,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기사급이라 할 수 있는 소드 유저, 그리고 오러로 검의 형상을 만드는 마스터의 전 단계인 검의 주인이라는 소드 오너였다. 그리고 대륙에는 소드 마스터라 알려진 것이 열다섯 정도였다. 그만큼 소드 오너도 적다는 결과인데 거의 모든 이들이 제라르에게는 오너급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미치겠군. 대륙의 오너급을 모아도 이백이 될까 말까 한데…….’
달리면서도 생각에 빠져 헤어나올 생각을 못하던 제라르를 현실로 돌아오게 한 것은 배에서 느껴지는 충격이었다.
“쿠에엑!”
딴생각을 하던 탓에 달려가던 그 속도로 수레의 뒤를 받아버린 제라르였다.
“크윽, 뭐야, 갑자기 왜 선…….”
입을 열던 제라르는 말을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만들어진 지는 얼마 안 되어 보이지만 호수가의 한쪽을 둘러싸고 있는 석벽은 이곳이 그저 급조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했다. 거대한 문이 열리자 행렬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흐음, 여기가 본거지인가?”
여기저기 외치는 소리를 알 수는 없었지만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개문하라! 대사자 귀환이시다!”
“개무우우운!”
“젠장, 뭐라고 소리치는지 알아야지.”
제라르의 투덜거림이 흘러나왔다. 그의 팔찌는 여전히 진천의 손목에서 돌아올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제라르는 투덜거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양옆으로 도열해 있는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제라르의 동공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확장일로를 걸었다.
“설마…….”
제라르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지금까지 기사들이라 생각했던 이들과 비슷한 복장의 인물들이 수백이 더 도열해 있었던 것이었다.
“말도…… 안돼.”
제라르의 허탈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짐작대로 이 모든 이가 기사급이라면, 그의 탈출에 대한 확률이 0%라는 수치를 확신시켜주는 것밖에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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