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350
강철의 열제 350화
알세인 왕이 담담한 음성을 내뱉자 베르스 후작이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미 전투 물자가 이쪽 로셀린 후방까지 왔다는 것은 오래전에 준비를 했었다는 것입니다.”
“하아.”
알세인 왕의 입에서 한숨 비슷한 것이 울려나왔다. 처음 철수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리고 그 이후 나온 말을 들었을 때 모두가 얼마나 놀랐었는가?
‘제국연합과 신성제국이 맞붙는 순간, 우리는 반전하여 신성제국의 남부지방을 초토화 시킨다.’
“쿡.”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를 내뱉었던 것이다. 이렇게 막고 있는 것도 힘이 들을 지경인데 제국들이 전쟁을 하는 틈을 통해 신성제국의 영역을 침범하자니…….
‘제국전쟁이 끝나면 무사할 것 같은가?’
‘언제까지 막기만 할 것인가!’
반대를 외치는 동맹국 귀족들에게 호통을 치는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어지는 연휘가람의 설명은 모두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적나라한 비유가 이어진 것이다.
‘설마 여러분은 신성제국이 4국 동맹을 제국 연합보다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제가 봤을 때 신성제국에게 우리는 정원의 꽃처럼 보일 것입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꺾을 수 있는…….’
휘가람은 그렇게 말하곤 지금의 상황을 상세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국연합이 상륙한다면 분명히 군대의 축소가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아니 실질적인 수가 얼마나 줄어들진 몰라도, 4국 동맹에게 신경 쓰는 것보다 제국 연합에 더 쏟아 부을 것이라는 건 누구라도 예상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도와주기 위해 지금 우리는 철수 준비를 합니다. 모두가 짐을 챙기는 겁니다. 먼저 우리 가우리군이 철수를 시작합니다. 이는 적들에게 전선을 뒤로 물리는 모습으로 보일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제국들의 전쟁 아닙니까.’
휘가람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었다.
‘지금 후방지역에 은밀하게 옮겨온 전투물자와 수레들이 있습니다.’
이때 얼마나 놀랬던가.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며 가져온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가우리군은 후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물자를 가지러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웃으며 그가 말했었다.
‘어차피 짐도 다 싸놓았겠다. 따로 공격 준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적들의 의표를 확실히 찌르는 겁니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모두가 처음으로 신성제국을 향해 진군하는 고민을 하지 않았던가?
알세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우리가 전쟁을 하는 이유라…….”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음성이 바이칼 공작과 베르스 후작의 귓가를 간질였다. 알세인 왕이 지금 말한 문장 이후의 말을 그들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전쟁은 뺏기지 않으려고 하는 앙탈이다. 제자리에서 난리 법석을 치고 웅크리고 있다면 겁을 먹겠는가?’
고진천의 눈빛이 모두를 날카롭게 훑으며 지나갔었다.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한 전쟁을 하는 거란 말이다.’
커다란 호통이 터져 나왔었다.
‘신성제국의 영토를 밟고 최대한 타격을 준다. 그것이 여기서 백번 천번을 막는 것보다 났다.’
그 말 이후에…….
“때론 공격이 최선의 수성이다…….”
“공격이 최선의 수성이다.”
알세인 왕의 입가에서 흘러나온 음성과 바이칼 공작의 음성이 거의 동시에 흘러나왔다.
둘은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 * *
병사들이 다가간 곳에는 수많은 수레들과 각종 무기들이 쌓여있었다. 심지어 한쪽에는 우리에 갇혀서 여기까지 끌려온 오크와 미노타우르스 등이 입에 재갈을 물린 채 눈알을 뒤룩 굴리며 서 있었다. 이곳에 있는 물자는 한마디로 전쟁을 위한 물자들 이었던 것이다.
어떤 것은 전혀 처음 보는 무기도 있었다.
수십 자루의 검 날과 창날을 수레의 앞쪽에 빈틈없이 꽂아 넣기도 했다. 바로 대 기병병기인 검차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거북이 등껍질과 같은 수래도 섞여 있었던 것이었다.
“이게 대체…….”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지금 벌어진 상황에 대해 어리둥절해 있었다. 전선을 뒤로 물린다는 이유로 후퇴를 하였더니만 눈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전략 물자.
그 수량을 보아 대마법사인 리셀이더라도 하루 이틀에 모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마도 개전 초기부터 조금씩 모아왔을 것이다.
창, 칼, 화살은 기본이고 마른 식량에 여분의 물통들…….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도 능청능청 탄력이 좋은 어린애 손목 굵기의 나무들이 일정하게 다듬어져 수레에 쌓여 있었다.
“빨리 움직여라!”
여기저기서 장수들의 재촉하는 소리에 병사들은 각각 주어지는 자리로 가서 챙기기 시작했다. 후퇴를 위해 뒤로 쳐졌던 사만의 가우리 병력이 하나의 거대한 수송부대가 된 것이었다.
병력이 모두 물품을 챙기고 도열해 있자, 고진천이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병력들이 도열해 있는 앞을 지나는 고진천의 입가에서 나직한 외침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할 것이다.”
진천의 말에 병사들은 의문을 눈가에 그려내면서,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이 물자를 가지고 전선으로 되돌아간다.”
“아!”
“역시.”
소곤거리는 음성이지만 병사들 사이사이에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느낌의 탄성들이 흘러나왔다. 사실 물자들은 일견 보기에도 방어를 위한 것보다는 공격을 위한 것들이 더 많지 않은가?
뀌이이!
병사들의 술렁임에 놀랐는지 우리에 갇혀 있던 오크가 나직하게 울음을 흘린다.
병사들이 늘어서 있는 정 중앙에 멈추어선 진천이 잠시 말문을 닫고 병사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의 옆으로 연휘가람과 을지우루가 다가왔고, 그 앞으로 도열한 병사들의 앞에는 계웅삼과 삼두표, 부여기율, 몽류화 등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진천은 우루의 옆을 바라보았다.
있어야 할 이가 없다.
그 빈자리.
너무도 크다.
진천은 그런 허전함을 내색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병사들에게 돌리다가 묵갑귀마대 한쪽에 서 있는 사내를 보았다. 익숙한 병기를 메고있는 사내였다.
묵갑귀마대원의 찰갑을 걸치고는 있었지만 어딘가 어색한 모습. 다른 대원들과 비슷한 하얀 흉갑이었으나, 상처 나고 핏물이 다 빠지지 않은 흉갑을 차고 있었다.
“천유화의 흉갑이라고 했었지. 그리고 부루의 대부인가.”
진천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몽류화가 잠시 자신을 호명하는 줄 알고 눈을 말똥거린다.
아빌런은 자신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고진천의 눈길을 느끼며 온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등에 매여진 을지부루의 대부였다.
“아빌런.”
“충!”
고진천이 자신을 호명하자, 아빌런이 황급히 군례를 올렸다. 고개를 숙인 그의 귓가로 진천의 음성이 계속해서 흘러들어왔다.
“부루가 말하길 간뎅이 하나만큼은 대단하다 들었다.”
“충!”
진천의 말에 아빌런은 그저 군례를 반복할 뿐이었다.
“나를 보라.”
아빌런은 고개를 들어 진천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위압감이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빌런은 입가에 넘어오는 침을 삼키며 긴장된 마음을 달래었다.
“도끼질은 익숙해 졌는가.”
부루의 대부를 말하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의 대답에 진천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옆에 있는을지우루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다. 잠시 말을 몰아 어디론가 다녀온 우루의 손에는 가우리의 상징이 들려있었다.
개문산성에서 전투를 벌일 때 부루가 그에게 맡기었던 것.
붉은 삼족오 깃발.
아빌런의 가슴속에 묻어놓았던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의 피가 끌었다.
“니 깃발의 주인은 얼마 전에 전사한 부루의 것이었다.”
우루에게서 깃발을 넘겨받은 고진천이 그것을 들어 올리며 말을 내 뱉었다. 마치 아빌런에게 이렇게 ‘들어라!’ 하고 외치는 것 같았다.
다각.
아빌런은 그 깃발을 보며 말을 몰아가는 자신을 보았다. 마치 누군가가 등을 떠미는 느낌에 잠시 당혹했었다.
‘아…….’
등 뒤의 대부가 부르르 떠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기억보다도 강한 이끌림. 어느새 아빌런은 진천의 앞까지 다가갔다.
“…….”
아빌런의 눈앞에 진천이 입술을 굳게 다문 체로 깃발을 들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붉은 바탕에 수놓인 삼족오가 있었다. 아빌런은 약간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때어내며 말문을 열었다.
“그…….”
벌려진 입속에서 그가 하고픈 말이 맴돌았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때 또다시 부루의 대부가 울었다.
우웅.
작은 울림이었지만, 진천과 휘가람과 우루는 느낄 수 있었다. 진한 울림을…….
“그 자리를! 부루장군의 자리를 제가 채우고 달리겠사옵니다!”
덥석!
아빌런은 눈을 부릅뜨고, 고진천이 들고 있는 삼족오의 깃대를 덥석 붙잡았다.
그의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열제가 하사한 것도 아닌데 미친놈처럼 그의 손에 들린 깃발을 뺏을 듯이 붙잡아 버린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가 그렇게 시켰다.
그의 마음에 진 응어리가…….
혼자 살아남으며 후회하고 눈물을 흘리며 만들어진 응어리가 그를 그렇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주십시오!”
관작도 받지 못한 채 암묵적으로 묵갑귀마대에 배속이 된 일개 병사가 진천에게 미친놈처럼 깃발을 붙잡고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묵직한 무게가 깃대를 잡은 손으로 느껴졌다.
진천의 손이 깃대에서 떠나간 것이다.
“주마.”
“…….”
세상이 하얗게 느껴지는 가운데 진천의 음성이 아빌런의 뇌리로 박혀들었다.
“놓치지 마라. 그 깃발의 주인이 그랬듯, 전투의 가장 앞에서 달려야 할 것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진천의 음성이 심장을 후비고 새기어지고 있었다.
“화살이 몸을 파고들어도, 창칼에 팔다리가 잘려도, 절대로…….”
“…….”
“놓지 말아라.”
“충! 만천의 지존이신 열제 폐하의 뜻을 받들어 화살에 몸뚱이가 뚫리고 창칼에 팔다리가 잘리어도 목숨을 잃어도 이 깃발 절대로…… 절대로 놓지 않겠사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있었는지 사만여 병사들의 심장을 흔들 듯한 다짐이 터져 나왔다. 묘한 진동이 지나간 자리에 아빌런은 마치 자신이 아닌 자신을 느끼며 말을 몰아 진천의 뒤로 돌아갔다. 그의 귓가로 지나가는 듯한 우루의 음성이 들려왔다.
“썅, 뒈지진 말라우. 뒈지면 죽여 버리갔어.”
익숙한 말투. 그리운 말투가 들려오자 아빌런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런 아빌런의 귓가로 우루의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웃어? 간뎅이. 부루가 친히 내게 네놈을 부탁했어야. 크흐, 기대하라우.”
“…….”
비슷한 것은 말투뿐이 아니었나 보다.
아빌런이 자신의 뒤에 자리 잡는 것을 느낀 고진천이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흐르는 구름.
시리도록 파아란 하늘.
“이제부터.”
하늘을 응시 한 진천의 입에서 병사들에게로…….
“가우리군에게…….”
그동안 아끼고 아껴왔던 말을 내뱉는다.
“정벌을 명 하노라.”
정벌을 명하는 진천의 외침에 사만여 가우리 병사들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정벌을 알리는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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