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393
강철의 열제 393화
훈련된 병사라면 기사가 엄포를 놓으며 도망가는 이를 베면 자기 자리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원래가 성의 주민들이었을 뿐, 도망치는 병사 하나를 베어 낸 순간 남은 이들도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도망쳐갔다.
그 모습에 일벌백계를 통해 병사들의 위계를 잡으려 했던 기사는 어이없어 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어찌 제국의 신민이 이따위란 말인가!”
투먼 성주인 타이만 남작의 울분에 찬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나마 중간 중간에 있는 정예병들이 그나마 징집병을 잘 이끌어 주어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침략을 당해 본 자와, 전혀 당해 보지 않은 자의 차이가 여기서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도망치는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 될 것이다. 어차피 제국의 정예가 나타나면 저들을 물리칠 것인데 여기서 죽을 이유가 없다.’
제국의 강대함은 백성뿐 아니라 타이만 남작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독이된 것이다.
한 마디로 필사적으로 막아야 할 이들의 마음에 구멍이 나 있는 상황인 것이다.
빠드득.
그런 백성들의 심정을 타이만 남작이 알 리가 없었다.
단지 지금의 상황에 치를 떨 뿐이었다.
생각해 보라?
기껏 모아놓은 칠천의 병력이 자신의 말만 잘 들었어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었는데, 전쟁이 시작된 지가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무너지느냔 말이다.
“전원 성안으로 후퇴한다. 그리고 브로이!”
“예, 남작님.”
타이만 남작의 눈동자가 점점 충혈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대피소에 있는 징집병들의 가족을 모조리 끌고 나와라. 모조리!”
“전부 말입니까?”
늙은이나 아이도 섞여 있을 이들을 모두 끌고 나오라는 명령에 콜 준남작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시민들에게 무기를 들려서 싸우게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오히려 효율이 떨어져 안하느니만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브로이 준남작의 질문에 타이만 남작이 한 글자씩 또박또박 내뱉었다.
“그래! 젖. 먹. 이. 하나까지! 모. 조. 리!”
완전히 붉은 눈동자로 변해버린 타이만 남작에게 더 이상 인간의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브로이 준남작은 곧바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전시에서의 명령은 절대로 지켜져야 하는 것임을 잘 알기에…….
바삐 달려가는 브로이 준남작의 뒷모습을 보며 타이만 남작은 독기서린 눈을 하고 중얼거렸다.
“버러지 같은 것들. 지켜야 할 명분을 만들어 주지.”
중얼거리며 사라진 브로이 준남작의 모습에서 시선을 뗀 타이만 남작은 살고자 아우성치는 징집병들을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 전투와는 달리 묵갑귀마대는 공성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멀찍이 서서 관망을 하고 있었다. 고진천 역시도 먼저 달려 나갔던 것과는 달리 전황을 살피고만 있었다.
“고윈과 하일론이 알아서 잘해 주니 별로 할 일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군. 그나저나 적들의 파발은 잡았나?”
“아직 연락은 없습니다만,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 군이 나타나는 순간 여러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이 포착되어 일단 쫓고는 있을 겁니다.”
연휘가람의 설명에 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전투에서의 수월한 승리로 병사들의 사기는 극에 달해 있었다. 대륙 최강이라는 신성제국을 상대한다는 심리적 위축감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무래도 좀 더 빠르게 치고 나가야만 할 것 같군.”
진천의 입에서 왠지 찝찝하다는 어투가 흘러나오자, 휘가람이 빙긋 웃음을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다행히 동맹국들이 뒤를 받쳐주지 않습니까. 말씀대로 우리는 부수면 됩니다. 자잘한 병력은 뒤에서 알아서 치워 주겠지요.”
“그래, 제국연합이 한 방 먹겠군. 설마 전 정예병들을 모아서 한방에 무너트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의외야. 그러고 보면 신성제국 황제란 자가 야망이 있군 그래.”
“그렇습니다. 아무리 제국들이라 해도 큰 타격을 입으면 어쩔 수 없겠지요. 그 후에는 신성제국이 모은 병력으로 로셀린과 하이안 왕국을 병합하고도 남겠지요.”
“그렇게 되면 지금의 균형은 빠르게 무너지고 병합한 두 왕국의 물자를 전비로 쓴다면 제국들의 도모도 어렵지 않겠군.”
진천의 말대로 된다면 두 왕국의 모든 것은 초토화가 될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제국의 황제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또 실제 의중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콰르릉!
“드디어 무너졌군요.”
둘이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위태위태하던 성벽이 급기야 무너져 버린 것이다. 무너진 성벽 아래로 가우리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천이 강쇠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가 볼까.”
“전진하라!”
휘가람의 음성이 울려 퍼지고 방관자처럼 관망하던 묵갑귀마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가우리군의 공세를 못 버티고 결국 성벽이 장악 당하자, 그나마도 대항 중이던 신성제국 병사들은 자신의 위치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진 전투였지만, 도망치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초췌함만이 서려 있었다.
지는 전투에서의 피로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기는 쪽이야 그 흥분으로 쉽게 자각을 못하지만, 지는 입장에선 그 압박을 배로 받는 법이니 말이다.
이리저리 흩어져 도망을 치는 신성제국 병사들과는 달리 가우리군은 지휘관들의 명령에 따라 흥분을 누르고 대열을 유지하며 추격을 펼쳤다. 성안에 세워진 집들로 인해 벌어지는 시가전은 또 다르니 말이다.
만에 하나 있을 유인책의 경우도 생각해야만 했다.
“헉, 다 왔다!”
정신없이 후퇴를 하던 병사들의 눈에 성주의 저택을 중심으로 형성된 최후 방어선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있었다.
“뭐, 뭐야!”
성주의 저택은 단순한 저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웅장했다. 일종의 내성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 내성의 성벽 위에 늘어선 이들은 아무리 보아도 병사들이 아니었다.
“에밀리?”
“뭐! 네 동생이? 어디!”
한 징집병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를 흘렸다. 그 옆의 동료는 징집 이전에도 친우였는지 그의 시선을 함께 쫓았다.
“에밀리!”
“이런!”
이들뿐 아니라 모두가 서로의 가족을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어머니, 아이, 애인들…….
전쟁에서 보호되어야 할 이들이 성주의 저택을 두르고 있는 성벽 위에 보란 듯이 내몰려져 있었다.
병력을 이끌고 당당하게 들어선 고윈과 하일론은 난데 없이 격렬해진 저항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들이 뭘 잘못 먹었나?”
“그러게 말일세.”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짜임새 있는 반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중구난방이었고, 고윈이나 하일론이 볼 때에는 의미 없는 죽음일 뿐이었다. 그들의 의문은 곧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윈의 휘하에 있는 베스킨 삼형제 중 막내인 써니언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몰아왔기 때문이었다.
“장군! 아무래도 전방 쪽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가.”
“아, 오셨습니까!”
“충!”
뒤쪽에서 들려온 질문에 고윈과 하일론은 몸을 돌리며 바로 군례를 올렸다. 그곳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강쇠를 몰고 다가오는 고진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력이 나아가는 것이 멈추었더군.”
“갑자기 저항이 거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벽을 무너트릴 때에도 그러지는 않았사옵니다만…….”
고윈의 대답을 들은 진천이 그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다시 물음을 던졌다.
“써니언, 무슨 일이지.”
“그게 적들이 드세진 이유가 있었습니다. 직접 보셔야 판단이 쉬울 것 같습니다.”
여전히 난감해 하는 써니언의 표정에 심각함을 읽은 진천과 일행들은 그의 뒤를 따라 대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시가지가 끝나는 부분은 혼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 혼전이라기보다도 그저 미친 듯이 달려든다는 느낌?
아까와 같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싸운다든지 목숨의 위협에 쉽게 몸을 움츠린다든지의 행동은 이미 없어져 버렸다.
“백성들을 한곳에 몰아 놓은 것인가.”
고진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들 대부분이 이 성의 출신들로 이루어진 주민들이라면 자신들의 가족을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싸우면서도 이곳저곳에서 항복한다면 살려 주겠다고 외쳤고, 또 가족들에게도 화가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선동 작업을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런 상황인데도 갑자기 이렇게 덤벼든다면 무언가 적진에서 조치를 취한 것이 분명했다.
“또 마족 타령이라도 한 것인가?”
깊게 골이 파였던 진천의 미간이 씰룩거렸다. 그러나 휘가람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차라리 우리가 마족이 되는 것이 나을 뻔했습니다.”
“음?”
휘가람의 시선은 적진을 향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적들이 미친 듯이 사수하고 있는 곳의 성벽 윗부분을 본 것이다. 진천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미친놈들!”
하일론의 입에선 욕설이 튀어나왔고, 고윈의 얼굴은 분노로 엉클어졌다. 고진천과 휘가람을 뒤로 하고 먼저 달려왔던 그들은 써니언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고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으야아아!”
분기를 참지 못한 하일론이 자신의 도끼를 들고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파고들었다.
하일론의 주변으로 신성제국 병사들이 창검을 들고 몰려들었다. 정예와는 거리가 먼 징집병들인 탓인지 대열이라고는 해 봐야 그저 뭉쳐 있다는 점뿐이었다.
카카칵!
“아악!”
쇠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하일론의 도끼가 신성제국 병사의 무기와 몸을 부수었다. 그 처참한 모습에 비명은 그 옆의 신성제국의 병사가 대신 질러 주었다. 왜냐면 그 일격으로 베임을 당한 당사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죽어!”
그에게 또 하나의 적이 달려들었다.
여기저기 칼날을 몸에 박은 그 병사는 그냥 있어도 죽을 것이 분명한대도 하일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퍼억!
“이 병신 같은 놈들!”
하일론의 욕설과 함께 그 병사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날았고, 그 뒤를 피에 물든 도끼가 스쳐 지나고 있었다.
깔끔한 한 수.
그럼에도 병사들은 반드시 하일론을 죽여야만 한다는 목적 의식을 가진 듯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심지어 반 토막만 남은 무기를 들고서 까지 말이다.
“빌어먹을…….”
효과적으로 적병을 베어 넘기고 있었지만 하일론의 표정은 전혀 밝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일그러졌다.
“으아아아!”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한 병사가 눈물과 콧물을 범벅하고서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하일론은 자신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전쟁에서 보이는 인간 군상은 여러 가지. 늙은이부터 아직은 어린 청년까지. 하일론은 적을 베는 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한 명 한 명을 벨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고, 죽어가는 이들의 아픔을 자신이 느끼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콰직!
울며불며 달려들었던 병사의 심장으로 환두대도 하나가 거침없이 틀어박혔다.
“망설이지 마라.”
“여, 열제 폐하!”
쩍!
환두대도를 비틀어 뽑은 몸통 사이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굳은 고진천의 모습이 하일론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슬퍼하는 건 나중이다. 치를 떠는 것도 나중이다.”
“크악!”
달려드는 적병의 무기를 든 팔뚝을 통째로 잘라 버린 고진천의 환두대도는 그의 음성만큼이나 비정했다.
“지금은 죽이고.”
푸욱.
“쿨럭,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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