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470
강철의 열제 470화
제170장 하나로 되어 가는 여정
“…….”
“크흠.”
볼록 나온 배에 얼굴에 자르르 하고 흐르는 윤기.
정 두 개 찍어 놓은 듯한 콧수염에 정확히 이마의 정중앙을 가르고 지나가는 가르마.
결정적으로 고진천의 바로 앞에서 뒷짐을 지고 거드름을 피우는 두둑한 배포의 사나이.
팔로 2세였다.
지휘막사에 들어오면서 일국의 왕에게 예의를 차린답시고 고개를 까딱한 행동만으로도 이미 고진천의 미간에는 밭고랑과 같은 골들이 파여졌다.
진천은 자신과 눈싸움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고 있는 팔로 2세에게서 시선을 떼어 한쪽에 있는 연휘가람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신성제국엔 사신으로 올 인간이 저놈뿐인가?”
“어허! 놈! 놈이라니! 그 무슨 망발이오!”
“글쎄요. 일단 황제의 칙사가 아닌 교단의 칙사라는 명목으로 왔습니다만…….”
“지금 내 이야기를 무시하는 것이오!”
진천의 질문에 휘가람도 지금의 상황이 어이없었는지 성실하게 대답을 하면서 팔로 2세를 깡그리 무시하여 주었다.
사이에 낀 팔로 2세는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에 얼굴에 핏대를 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순간, 진천의 눈이 팔로 2세의 눈과 마주쳤다.
“칙사고 나발이고, 안 왔다 하고 묻어 버릴까?”
“무, 무슨 소, 히끅! 히끅!”
“이럴 줄 알았다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도착 사실을 알려 버려서 말입니다.”
“히, 끅! 히끅!”
살기 넘치는 진천의 눈빛을 마주한 채로 그에 상응하는 대화가 오가는 것을 들은 팔로 2세의 얼굴은 순간 창백해졌고, 주변의 사제들은 의외의 반응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도착 사실을 알아 버려서 말입니다.’라는 휘가람의 말이 흐르자 약간이나마 안심한 표정들을 지었다.
하지만 그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쪽에서 멀뚱히 서 있던 을지우루가 한마디 툭 던졌다.
“고조, 이 상황에 그런 거이 알 바 있갔습네까?”
그의 한마디에 팔로 2세를 비롯한 사제들은 험악해진 분위기에 다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때 그들을 수행하고 온 신전 소속의 기사가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대신성제국의 신성사제단을 두고 이런 무례를 범하다니!”
“아갈 닥치라우! 콱 찢어 버리기 전에. 저 썅노무 애새끼래 대갈통 쳐들고 까딱할 때부터 꼴통에 화살 박아 넣으려 한 것을 참았더니만 뭐이 어드레? 무례에!”
우루에게서 살기와 협박이 범벅되어 폭발처럼 터져 나왔다.
이후 활의 시위에 화살을 먹이는 우루를 계웅삼과 삼인방이 한 번에 달려들어 제압해 끌고 나가면서 일단의 소란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바닥을 기다 못해 뚫고 들어간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쯤에서 무례에 대한 논란은 그만하고 온 이유를 들어 봤으면 하는데.”
조용해진 가운데에 진천의 살짝 차분해진 음성이 울려 나왔다.
조금 전의 소동이 효과가 있었는지, 팔로 2세와 사제들은 진땀을 훔치고는 자세를 정돈했다.
한결 예의 바른 모습이 되었다고 할까?
그들 사이로 대표인 팔로 2세가 신전의 칙명이 든 두루마리를 들고 경건한 모습으로 한발 나섰다.
“신성 헤네시아 제국을 침탈한 무도한 자들은 들으라! 그대들은 어찌하여 이 평화로운 대륙에 그 더러운 발을 내디뎠는가! 그 이유가 아무리 바다 건너 무도한 자들에 의하여 현혹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죄는 결코 가볍지 아니한…….”
거창하면서도 길게 나열된 이야기였지만, 그 내용은 이들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었다.
‘봐줄 때 항복해라.’
제국연합 무너졌으니 더 이상 비빌 언덕은 없다. 그러니 항복하고 얌전히 꼬리 내려라.
칙명을 다 읊은 팔로 2세가 천천히 두루마리를 말아 옆의 가우리 무장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 두루마리는 다시 연휘가람을 거쳐 진천에게로 옮겨 갔다.
팔로 2세의 낭독을 통해 내용을 들었지만, 진천은 자신에게 온 두루마리를 다시 펼쳐 보았다.
“…….”
딱딱히 굳은 진천의 얼굴.
진천의 얼굴의 변화에 팔로 2세와 신전의 사제들은 의기양양한 모습을 되찾아 갔다. 딱딱하게 굳은 저 표정에는 난감함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연합이 대패를 한 지금 누가 보아도 이들 4국 동맹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처음부터 무례하게 나온 것도 이런 결과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후우.”
뒤쪽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후 누군가 뒤쪽에서 걸어오더니 진천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진천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넘겨받고는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다름 아닌 계웅삼이었다.
막사에 들어와 있는 장수들 중 고윈과 하일론을 제외하면 대륙어를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이는 웅삼뿐이었다.
잠시 후 두루마리를 진천에게 넘기며 입을 열었다.
“뭐, 별다른 내용은 없었습니다. 저 양반이 읽은 그대로입니다.”
“음.”
그제야 만족한 모습을 보이는 진천의 모습에 팔로 2세와 사제들은 그의 표정 변화가 단순히 대륙어를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흐음.”
고진천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가우리의 무장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그들이 예상하기로는 지금쯤 팔로 2세의 면상에 주먹이 꽂히든 사제들을 집어 던지든, 행동으로 나섰어야 했는데 고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어울리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 낸 진천이 장고 끝에 입을 열었다.
“답장을 줘야지.”
“네?”
“뭐하나? 쓸 것 가져와야지.”
“아, 네! 알겠습니다.”
진천의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던 웅삼이 수하들을 부려 답신을 적을 두루마리를 가져왔다.
“흐음 써 볼까?”
팔을 걷어붙이는 진천의 행동에 웅삼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직접 쓰시게요?”
“당연하지.”
“…….”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진천의 손에 들린 붓이 두루마리 위를 노닐었다.
휘갈겼다라고 해야 하나?
잠시 후 답신을 다 적은 진천이 자신이 쓴 글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다 쓴 것을 둘둘 말아서 묶었다.
“됐군.”
진천의 손을 떠난 두루마리가 휘가람과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팔로 2세에게로 옮겨졌다.
“이게 무슨…….”
이렇게 빠르게 답신을 적어 준 것도 예상 밖이거니와 많이는 아니지만, 오래전에도 진천을 겪었던 팔로 2세는 강렬하게 느껴지는 불길함에 두루마리를 쥔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럼 가 보도록.”
“네?”
“그 답신 빨리 보고해야지. 안 그런가?”
“그게 방금 도착한 사신에게…….”
“답신을 기다릴 듯해서 빨리 써 주었으니 어서 가 보도록.”
거듭되는 축객령에 팔로 2세와 사제들은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잠시 후 팔로 2세와 사제들은 진천이 쥐여 준 답신과 가면서 먹으라고 싸 준 육포 한 보따리만을 들고 되돌아가야만 했다.
“뭐라고 써 줬습니까?”
멀어지는 사신단을 바라보던 계웅삼이 궁금한 듯 질문을 던졌다.
“사실대로.”
진천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한마디만 남기고는 뒤돌아 막사로 들어갔다.
* * *
승전 분위기에 들떠 있는 신성제국 내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듯 대전을 오가는 귀족들의 얼굴은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앞으로 이어질 정복 전쟁에 서로 나서기 위해 전쟁 전보다도 더 분주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제국연합이 무너진 지금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팔로 2세가 답신을 들고 도착하였습니다!”
“답신?”
시종장의 외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밀리오르 황제에게 슈엥 공작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일전에 신전에서 4국 동맹을 향해 사자를 보내었다고 말씀을 드렸었사옵니다만…….”
“아아아. 기억이 나는군. 그런데 답신을 가지고 와?”
“그렇다 합니다.”
이제야 기억이 나는 듯 밀리오르가 고개를 끄덕인 후 답신을 가져왔다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이는 듯 의자에서 등을 떼면서 눈을 반짝였다.
잠시 후, 시종장의 입장 명령과 함께 팔로 2세와 사제들이 당당한 걸음으로 대전으로 들어섰다.
마치 개선장군과 같은 모습으로 들어와 예를 올리는 모습까지 지켜 본 밀리오르 황제가 마치 신기한 것을 보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나?”
뜬금없이 튀어나온 질문이었지만, 슈엥 공작은 질문의 의도를 알았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능력이 있으니 신전에서도 책임자로 보낸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살아 돌아온 게 신기해서.”
“…….”
피식 웃음을 흘리는 밀리오르 황제의 답변에 슈엥 공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잘못 보았다 함은 팔로 2세를 지칭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보였던 가우리 왕의 성격상 이들을 가만 놔둔 것도 모자라 답신까지 쥐여 보낸 것이 의외였기 때문에 밀리오르 황제가 신기한 표정을 지은 것이고, 슈엥 공작 역시 뒤늦게 그것을 알아들었기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멀쩡히 답신을 가져온 사람을 앞에 두고 ‘제가 보아도 살아 온 게 신기합니다.’라는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퍼블릭 공작 사후 세가 약해진 신전이라 해도 엄연히 국교의 위치에 있다. 당연히 슈엥 공작 입장으로서는 그저 원만한 게 좋은 것이다.
슈엥 공작이 침묵하는 사이 팔로 2세가 뒤쪽의 사제들로부터 답신을 받아 천천히 황제에게 나아갔다.
“그냥 읽어 보게나, 팔로 2세.”
“커흠. 황제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제가 직접 읽겠사옵니다.”
답신을 받으러 나서려던 시종이 다시 되돌아오고 그 사이에 팔로 2세는 경건한 모습으로 답신을 감싼 봉인지를 조심스럽게 분리했다. 그리고 천천히 답신을 펼쳐 들었다.
“…….”
“읽어 보게나.”
답신을 펼쳐 든 채 멈추어진 팔로 2세의 행동에 밀리오르 황제가 다시 답신을 읽기를 종용했다. 그럼에도 닫힌 팔로 2세의 입은 열릴 줄 몰랐다.
“…….”
“파, 팔로 사제님.”
길어지는 침묵에 사제들이 당황하여 그를 불렀음에도 끝내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두루마리를 내려트린 팔로 2세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모, 못 읽겠습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팔로 2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대전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보내온 답신을 못 읽겠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말인가?
팔로 2세의 손을 떠난 답신이 밀리오르 황제에게로 가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찾아온 정적.
“…….”
밀리오르 황제 역시 답신을 펼치고도 말이 없었다.
천천히 두루마리에서 눈을 뗀 밀리오르 황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두루마리를 늘어트려 모두가 볼 수 있게 하였다.
두루마리가 펴짐과 동시에 밀리오르 황제의 음성이 대전으로 울려 퍼졌다.
“이거 읽을 수 있는 사람?”
펼쳐진 두루마리에는 그들로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언어들만이 잔뜩 휘갈겨져 있었다.
* * *
둥! 둥! 둥! 둥!
짧고도 강렬하게 울려 퍼지는 북소리에 맞추어 병사들의 발걸음이 움직였다.
너른 평야를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주변의 나지막한 언덕에까지 막사를 잔뜩 지어 놓은 가우리 진영으로 5만여에 육박하는 병력이 거대한 북소리와 함께 보무당당히 들어서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먼 길을 싸우며 온 아군을 환영하는 가우리의 병사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고, 그 뒤를 이어 든든한 동맹을 환영하는 로셀린과 하이안, 말린 등의 병사들도 함성을 질렀다.
“이거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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