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480
강철의 열제 480화
제175장 전쟁으로 살아가는 이들
끝내 대무덕의 만류로 계웅삼과의 내기에 실패한 고진천은 굳어진 얼굴로 주변 지형 탐색에 자의 반 타의 반 끌려 나와야 했다.
적들의 시선에 노출될 것을 피하기 위해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단 네 명만이 정탐을 나온 것이다.
단 네 명이라 하지만 고진천과 리셀, 이 두 사람만으로도 이들을 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도 분하십니까?”
하일론이 멀뚱한 표정으로 묻자, 진천은 그를 잠시 흘겨보는 것으로 심기가 아직 불편함을 알렸다.
“흐음, 그나저나 이곳에 아무것도 없는 게 이상하네요.”
진천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잘 아는 하일론이 금세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입지라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진천 대신 하일론의 말을 받아 준 것은 바로 리셀이었다.
“몇몇 군대만 성벽을 쌓는다면 저절로 요새로 탈바꿈 할만한 위치입니다. 즉 산성처럼 적은 수고로 좋은 입지의 성을 만들 수 있지요. 수도 인근에 이런 곳이 있으면 당연히 요새를 지었어야 했는데 없는 게 희한합니다.”
하일론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성으로 흐르는 모양이었다.
“어디 신성제국이 여기까지 침탈을 당해 봤겠는가?”
“그도 그렇습니다. 만에 하나 여기에 요새라도 있었다면 꽤 골치 아팠을 겁니다. 우리가 대회전할 장소에 군영을 세우기 까다로웠을 테니까요.”
“그 정도인가?”
살짝 놀라는 리셀의 말에 하일론이 좀 더 주변을 살피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형 자체가 높지는 않지만 마치 호리병처럼 만들어진 것이 이 형태로 성을 만든다면 딱 좋겠습니다.”
“그럼 혹시 이곳으로 적을 유인한다거나 하면 어떻겠는가?”
리셀이 호기심이 이는 듯 매복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진천이 안 듣는 듯하면서도 귀를 열고 있었는지 짧게 한마디 툭 내뱉었다.
“불가.”
“맞습니다. 열제 폐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안에서 밖을 막기에는 좋지만 적을 끌어들여서 공격하기에는 공격하는 위치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뒤는 낮지만 절벽처럼 깍아지르는 듯한 지형이었기에 매복병들이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 오히려 독이 되겠지요. 반대로 적을 몰아넣고 고사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흐음, 자네의 말을 들으니 적들이 이곳 지형을 이용했을 수도 있겠군,”
“아무래도 적들의 안방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잡담이 끝났으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지.”
“아이쿠 알겠습니다.”
심기 불편한 진천의 음성에 하일론과 리셀이 허둥대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면서 하일론이 입맛을 다셨다.
“뭐 도망치는 척하면서 이곳으로 끌어들이는 것까지는 참 좋은 지형인데. 적들도 뻔히 알고.”
못내 아쉬운 듯 돌아보며 입맛을 다신 하일론에게 리셀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허허, 많이 아쉬운가 보구먼.”
“뭐 그렇다는 겁니다. 없는 성벽이 솟아나게 할 수도 없고 말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적들을 싹 잡아 없애기 좋은 위치인데 말입니다.”
“허허, 나라고 없는 성벽을 솟아나게 만드는 재주는 없다네.”
하일론의 농담에 리셀이 마주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가시지…….”
한껏 웃은 리셀이 진천에게 다가가 다음 장소로 이동할 것을 말하던 순간 뒤돌아 선 진천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잠시 멈추라는 손짓이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천이 입을 열었다.
“하일론, 그거 좋은 생각이다.”
“네?”
“성벽용 자재야 성안에 넘치는 것이니…….”
진천의 말에 하일론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리셀은 온몸에 오한이 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튿날, 위얀 후작령에 때 아닌 철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
화려한 마법진의 중심에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아메리 연방제국의 서먼 대법사가 피로에 젖은 모습으로 묶여 있었다.
잠시 후, 마법진이 있는 방으로 누군가가 들어섰다.
“쿨럭. 대체 무슨 꿍꿍이속이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린 서먼 대법사의 눈앞에 나타난 이는 바로 뮤 베이니어와 그의 사형제들인 미케인 베이니어, 탈로스 베이니어였다.
들어선 삼현자는 서먼 대법사의 말에 대답하기는커녕 서로 대화를 나누기에 바쁘기만 했다.
“사형, 정말 괜찮은 겁니까?”
미케인 베이니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만. 싫다면 나 홀로 하겠다.”
뮤 대법사의 말에 탈로스 대법사가 화들짝 놀라며 끼어들었다.
“누가 싫다고 했습니까. 다만 걱정이 되어서이지요.”
“걱정은 필요 없다. 이제 우리는 진정 대마법사의 길을 가는 것이다.”
대마법사.
그 말을 하는 순간 세 사람의 얼굴에는 동시에 탐욕의 빛이 떠올랐다.
“대마법사라고?”
서먼 대법사도 마법에 미친 이였기에 그들이 하는 대마법사라는 말에 고개를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소. 대마법사가 되는 길이오.”
“그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시오!”
“가능하오.”
뮤 대법사의 단정적인 말에 서먼 대법사가 그제야 자신의 주변에 그려진 마법진을 둘러보고는 냉소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이 미친 짓이 가능하리라 보는 것인가!”
“호오, 이 마법진을 알아보는가 보군.”
“마나를 제한하는 마법진과 압축 마법진 그리고 이것은……. 석화마법의 일종인데…….”
“거의 맞추었소. 인공적으로 마나를 품은 돌을 만드는 마법진이오.”
“그게 무슨 대체 무엇으로…… 설마?”
서먼 대법사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제야 이들이 하려는 행동을 눈치챈 것이다.
“그대의 희생으로 우린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될 것이오.”
“네놈들은 마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잠시 후 마법진이 빛나고, 마법진이 있던 자리에는 서먼 대법사를 닮은 석상만이 거대한 마나를 품은 채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 * *
대전으로 가는 긴 복도를 걸어가는 전령의 발걸음이 그 어떤 때보다도 바빠 보였다. 황성 내부에서는 뛰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었기에 뛰지 못할 뿐, 전령의 바쁜 종종 걸음은 답답해 보이기까지 했다.
“대전으로 가져갈 새로운 소식이 있소.”
전령의 말에 대전 앞을 지키는 기사들이 안쪽에 전령의 도착을 알렸고 시종장이 그의 도착을 대전에다가 우렁찬 음성으로 알렸다.
곧이어 굳건히 닫힌 두 개의 문이 열리고 전령은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들어선 대전의 끝에는 밀리오르 황제가 의자에 몸을 반쯤 묻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귀족들이 새로운 소식을 가져온 전령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4국 동맹이 진출을 시작했다 합니다!”
대전안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그저 올 것이 왔는가 싶기도 했고, 몇몇 귀족들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슈엥 공작이 전령에게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라 명하였다.
“지금 적들의 위치는 세비아 초원의 초입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물자들을 가지고 이동하는 것이 세비아 초입에 다다르기 이전에 군영을 따로 세우려는 것 같다는 정탐 결과가 들어와 있습니다. 즉 적들은 지금 본 수도에서 하루 반나절에서 이틀 사이의 거리까지 진출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합니다.”
전령의 답변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적들이 공성을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공성을 하려면 그렇게 먼 지역에 군진을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세비아 초원 지대에서 대회전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대전 안의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술렁이는 귀족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신성제국 입장에서는 오우거 두 마리가 산중의 제왕을 가리기 위해 다툼을 하고 있을 때를 틈타 들어온 오크가 싸움이 끝난 줄도 모르고 자리를 차지한 채로 기고만장해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가우리는 기회를 잘 노린 거라고 하지만, 신성제국의 입장에선 운이 좋은 것으로밖에 안 보이니 말이다.
할 일을 마친 전령이 긴장하고 서 있는 가운데 뒤쪽에서 또 다른 전령의 도착을 외치는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또 다른 전령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지금 서 있는 전령의 옆으로 와 멈추어 섰다.
“보고하게.”
“지금 루키아 후작의 병력이 수도 입성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더불어 샤이완 공작의 병력이 하루거리까지 도착해 있고, 케니클 후작과 블라미르 공의 병력은 오늘 늦은 저녁과 내일 오전 중에 도착할 예정이라 합니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병력들의 소식에 대전 안의 분위기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이미 4국 동맹은 안중에도 없는 표정이었다.
“나가 보도록 하라.”
슈엥 공작의 말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전령은 옆에 있던 금방 들어온 동료와 함께 다시 종종 걸음으로 대전을 빠져나갔다.
“후. 이거 오래 할 일이 못되는구만.”
대전을 빠져나온 전령이 긴장이 풀리면서 한마디 하자, 옆의 동료 역시 동감한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분위기가 좀 묘하지 않았나?”
“혹, 황제 폐하와 슈엥 공작님 말인가?”
“자네도 느꼈나?”
“음…….”
다른 귀족들이 들떠 있는 모습을 보여 준 것과는 달리 밀리오르 황제의 표정은 왠지 신중해 보였고, 전령에게 질문을 던졌던 슈엥 공작의 경우는 심각해 보였다.
특히 세비아 초원 초입 전에 진영을 설치할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더더욱 그런 기색이 많이 보였다.
“뭐 우리가 할 일은 끝났으니 이만 가자고.”
“응? 이번엔 뭐지?”
대전에서 벗어나려는 두 전령의 앞으로 또 한 명의 전령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엔 무엇인가?”
“로셀린의 추가 병력이 위얀 후작령에 도달하였다는 소식이네. 로셀린 왕과 동부의 무신 헬리오스 바이칼 공작이 병력을 직접 이끌고 온 것 같다는군.”
그 말을 남기고 전령은 대전 안으로 사라져갔다.
* * *
5만에 달하는 병력이 물자를 가지고 위얀 후작령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많은 병력이 빠져나간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도착하는 그들을 연호하는 동맹국 병사들로 인해 지금까지 진군해 오느라 지친 로셀린 병사들의 발걸음은 활기에 차 있었다.
“분위기가 좋습니다.”
바이칼 공작이 위얀 후작성을 점령하고 있는 동맹국 병사들의 표정을 보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형님이 이끄는 병사들입니다. 당연히 저런 자신감 정도는 있어야지요.”
알세인 왕이 바이칼 공작의 옆으로 말을 몰아오자, 그를 알아본 로셀린 출신 병사들이 군례를 올리며 외쳤다.
“로셀린 왕가여 영원하라!”
“알세인 국왕 전하 만세!”
“로셀린 만세!”
순식간에 로셀린을 연호하는 병사들로 넘쳐났다.
로셀린의 병사들뿐 아니라 각 동맹국의 병사들도 거들며 외쳤다.
“이거 환대가 굉장하군요.”
“하하, 그렇습니다.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기분입니다.”
환대를 받으며 들어선 로셀린의 추가 병력은 반나절을 머물고 다시 세비아 초원으로 병력을 이끌었다.
하루라도 빨리 전장에 도착하여 지형에 적응하라는 고진천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로셀린의 마지막 추가 병력이 도착함에 따라 가우리를 중심으로 한 4국 동맹의 병력이 드디어 한자리에 모두 모이게 되었다.
* * *
루키아 후작에 이어 케니클 후작과 블라미르의 부대가 도착하였고 연이어 샤이완 공작과 콰이어 공작이 동시에 예상된 시간보다 반나절 빠른 시간에 헤네시안으로 입성하였다.
그들의 입성 소식에 헤네시안의 백성들은 모두 축제의 분위기로 변했다. 귀족들과 달리 일반 백성들에게는 4국 동맹이 꽤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제국연합과의 전쟁 이후 잔당 토벌을 위해 흩어졌던 샤이완 공작과 콰이어 공작, 그리고 케니클 후작과 용병왕 블라미르, 마지막으로 루키아 후작 등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자 회의장에는 무게감이 넘쳐흘렀다.
제국연합과의 전쟁에서는 전반적인 준비를 해 왔던 케니클 후작이 지휘권을 잡았지만, 엄연히 이곳은 황도.
당연히 수도군단의 군단장인 샤이완 공작이 지휘권을 잡게 되었다.
그들을 제외한 다른 귀족들은 일체 배제한 회의석상.
이곳에는 오로지 샤이완 공작, 콰이어 공작, 루키아 후작 그리고 케니클 후작과 용병왕 블라미르만이 있었다.
“어찌들 보는가?”
수도의 주변 지형을 찰흙으로 만든 입체 상황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샤이완 공작이 던진 첫 질문이었다.
최고 사령관인 샤이완 공작의 질문이 떨어졌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골몰히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루키아 후작.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
샤이완 공작이 조심스럽게 루키아 후작을 불러 보았다.
지난 전쟁 이후로 가까이 가기에 왠지 어려운 분위기로 변한 루키아 후작은 이곳에서도 한쪽에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 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