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531
7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계웅삼은 이실라 공녀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지금을 즐기는 거다!’
그의 인생에 있어 이런 평화는 거의 없었다.
전쟁과 전쟁의 연속이었다.
신라와의 전쟁, 당과의 전쟁,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전쟁들…….
다행인 점은 지금 가우리가 평화의 시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군사력 쪽으로만 치우쳤던 부분도 이제 균형을 맞추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신성제국이 몰락하면서 사분오열되자 그쪽에서도 콩고물이 좀 떨어졌다. 전쟁이란 것 자체가 커다란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드워프들이 큰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타고난 전사이면서 타고난 장인들이었다. 장 노인에게 이런저런 기술을 전수받고 더 나아가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무구는 비싼 가격으로 팔려 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위협이 될 만한 연방제국과 해상제국은 신성제국과의 전쟁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게다가 후유증을 앓지 않는다 해도 가우리에 대적할 수 있는 전력은 되지 못했다.
신성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가우리를 중심으로 구축된 동맹이 더없이 탄탄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 당사자들이기에 피해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승자의 입장에서 제국에서 노획한 것들이 적지는 않았다. 그것을 바탕으로 동맹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 현실적인 부분이 웅삼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결국 웅삼은 이 순간을 최대한 만끽하기로 했다.
옛 이야기를 보면 여인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구해준 남자에게 마음이 쏠리는 법이었다.
물론 이야기 속 내용일 뿐 아니라 실제로도 설득력이 있는 사실이다.
다행히 이실라 공녀 역시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
웅삼은 그 이유를 자신의 행동에서 찾았다.
“역시 그 양반을 따라하니 먹히는 건가…….”
“네?”
“아, 아니오.”
옆에서 걷고 있던 이실라 공녀가 귀를 쫑긋하며 물어왔지만 웅삼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이실라 공녀는 계웅삼을 바라보며 고민을 했다.
‘어떻게 하면 이분을 공국으로 이끌 수 있을까.’
웅삼이라면 그녀의 공국에 있어 큰 전력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자신을 향해 가끔 느끼한 표정을 지어도 친절하게 대했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는 그녀에 대해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문득 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가우리라는 나라가 생각 외로 가깝다든지 돌아가기 쉬운 곳이라면 이렇게 공을 들인 게 허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새로운 강국과의 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심리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실라 공녀는 웅삼에게 슬며시 말을 걸어보았다.
“제가 견문이 짧아 사실 가우리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쩝, 공녀를 탓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도 사실 답답할 따름입니다.”
답답함을 표하는 웅삼에게 이실라 공녀는 재빨리 대답을 해주었다. 어떻게 해서든 좋은 인상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공국으로 돌아가면 가우리에 대해서 최대한 수소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습니다.”
웅삼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웅삼에게 이실라 공녀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런데 가우리란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이실라 공녀의 질문에 웅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어왔다.
“어떤 곳이냐 함은?”
“그냥 궁금합니다. 계웅삼 님 같은 강자가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웅삼이 잠시 생각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고 이실라 공녀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어떤 곳인지라…….”
잠시 말끝을 흐렸던 웅삼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뭐, 공처가도 있고, 막장으로 가는 양반도 있으며, 또 여인네들을 줄줄 끌고 다니는 양반도 있지요. 줄기차게 전쟁만 하다가 이제야 평화란 게 다가와 사람들 입에서 미소가 그치지 않기도 합니다.”
이실라 공녀가 상상한 대답과는 달리 약간 엉뚱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어보았다.
“막장으로 가는 분이요?”
“뭐, 우리 열…… 크흐흠. 윗분이 한 분 계시는데 막강하다는 말입니다.”
“윗분이요?”
윗분이라는 말에 이실라 공녀가 궁금한 듯 다시 질문했다. 그러자 웅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이곳으로 따지면 황제 폐하입니다.”
“아…….”
제국이라는 의미였다.
그때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흘리듯 들었던 말 중에 걸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윗분 중의 한 분이라 하시면 계웅삼 님께선 작위가 얼마나…….”
그녀의 질문에 웅삼이 살짝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뭐, 제 위에 있는 양반들이라곤 몇이 없기에 이런 말을 하긴 무엇하지만…….”
잠시 말을 흐렸던 웅삼이 뭔가 결심한 듯 말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아…….”
이실라 공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의 말은 황제의 다음 권력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의미 아닌가!
‘그래, 이 정도 실력자라면 충분해.’
이 정도 강자라면 어디서든 대우받을 수 있는 이였다.
게다가 그가 한 말 중에는 오랜 전쟁을 끝냈다는 내용이 있었다.
전쟁에서는 수많은 생목숨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영웅이 태어나기도 한다.
그녀가 보기에 웅삼은 충분히 영웅이 될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짧은 순간 그의 무위를 보았을 뿐이지만 거의 한 개 기사단을 상대하는 데 있어 위축됨도 없었고 망설임도 없었다.
실력 역시 소울아머를 갖춘 이를 압도할 정도가 아니었던가. 그 실력이라면 공작이 아니라 공작 할애비라 해도 믿을 만했다.
물론 소울아머를 다룬다고 모두 고위 귀족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에게 멋진 남성은 바로 강한 남성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실라 공녀에게 웅삼은 가끔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해서 반감을 갖게 할 때도 있지만 일단은 확실히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이 맛인가…….’
계웅삼은 반짝거리는 이실라 공녀의 눈빛을 알고도 모른 척하며 걷고 있었다.
평소 받지 못했던 선망 어린 눈빛이어서 그런지 이 기분을 누리고 다녔을 연휘가람이 더욱 부러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조차도 부럽지 않았다.
이실라 공녀는 너무도 아름다웠으며, 당당했고 또…….
‘육감적이지.’
웅삼의 눈동자가 그녀를 슬쩍 훑었다.
딱 계웅삼이 좋아하는 여성상이었다.
을지우루의 부인이 하이엘프이기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뭐든지 원하는 것은 다 해다 바쳐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우루가 그러고 있지 않은가.
그에 비해 이실라 공녀는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딱! 이 정도가 좋아.’
왠지 미소가 지어졌다.
‘뭐 거짓말도 아니잖아? 일인지하 만인지상. 우리는 열제 직속이니까.’
웅삼의 부대는 열제 직속 부대다.
일종의 특수적인 상황에 대비하여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진 부대이기에 엄밀히 따지면 연휘가람이나 을지우루의 명을 따르는 집단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력으로 따지면 열제 바로 밑의 실력자가 자신이었다. 그러니 뭐 거짓도 아닌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가우리에 권력이라는 느낌이 희미하긴 하지만 웅삼의 지위는 분명 최상위급이었다.
다른 나라의 공작들과도 맞먹을 수 있는 지위였다. 가끔 멱살도 잡고, 목도 따고 했으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당당해져도 된다…… 고 또 생각했다.
어차피 지금은 자세히 설명을 해주는 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여태 정직하게 살아왔으니……. 게다가 이런 선의의 거짓말은 필요한 거다. 내가 좀 있어 보여야 이곳에 정착하는 데도 편할 테니 말이야.’
웅삼은 나름의 정당성 있는 이유를 들며 가슴 한곳에서 고개를 드는 양심을 무자비하게 찍어 눌렀다. 이미 걸레가 되어버린 양심을 마음 한쪽 구석에서 끌어내는 웅삼에게 이실라 공녀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계웅삼 님은 젊어 보이는데, 대단하시군요.”
“하핫, 제 나이가 뭐…….”
순간 웅삼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사실 그의 나이가 젊은 나이는 아니었다.
절대 젊다고 할 수 없다.
고진천보다도 사실 웅삼의 나이가 더 많았다. 게다가 팔팔한 나이에 이 세상으로 넘어와 수십 년은 훌쩍 지났다.
빠른 이들은 손자에 손자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다행인 점은 이 세상으로 넘어온 뒤로 가우리에서 온 이들이 천천히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세상을 넘어올 때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이미 먹은 나이가 똥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니 많이 먹은 것은 사실이었다.
웅삼은 긴장했다.
연애에 나이라는 건 꽤 걸림돌이었다.
물론 가끔 들어오는 중매를 보면 서른 살 넘는 나이 차의 여인과도 만나볼 수 있기는 했다.
다 차였지만…….
“사실 우리와 생김새가 다르셔서인지 가늠하기가 조금 어렵네요. 저도 사실 적은 나이는 아니라서요.”
이실라 공녀가 쑥스럽게 말을 꺼내자 웅삼이 약간의 기대를 했다.
나이만 오지게 많은 엘프까지는 아니어도 이쪽 동네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올해 나이가…….”
충분히 실례가 될 질문이었지만, 그걸 구분할 수 있다면 웅삼이 지금까지 혼자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이실라 공녀는 웅삼의 질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스물다섯이나 되었지요.”
“…….”
결론적으로 다른 것은 없었다.
거기서 거기인 것이다.
엘프는 말 그대로 엘프만의 예외일 뿐, 다른 데선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계웅삼 님은 나이가…….”
“마흐…… 흠흠. 이제 서른 되었습니다.”
더 이상 웅삼의 마음속에는 양심이 없었다.
때론 이런 걸 양심에 털 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웅삼의 양심은 모피 옷을 만들어도 될 정도일 것이다.
“상당히 젊으신데 대단하세요!”
“하, 하하하…….”
웅삼은 이번 딱 한 번만 더 거짓말을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언제나 그렇듯…….
‘난 착하게 살아왔으니까. 이 정도는 하늘이 봐줄 거다.’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콰르르릉!
순간 하늘에서 천둥이 울려왔다.
이실라 공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분명 하늘은 맑았고 비가 올 기미는 없었다.
“갑자기 왜 마른하늘에 벼락이?”
“…….”
웅삼은 얼굴을 살짝 구기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연이겠지?’
콰콰콰쾅!
다시 천둥소리가 울려왔다.
‘우연일 거야…….’
잠시 후,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일행들은 급히 비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웅삼은 하늘을 욕했고 하늘은 화답했다.
번쩍! 콰르르르릉!
다행히 비는 오래가지 않았다.
비가 멈추고 일행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몇 기의 기마가 전방에 나타났다.
“뭐지?”
필리어리 왕국 깃발과 함께 붉은색과 하얀색이 섞인 깃발이 꽂힌 기마가 선두로 다가왔다.
붉은색과 하얀색으로 만들어진 깃발은 긴급을 요하는 파발이었다.
비록 국가는 다르지만, 함께 제국에 대항하여 연합을 하던 입장이었기에 긴급을 알리는 깃발인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실라 공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녀가 궁금함을 느끼는 사이 호위대를 이끄는 필리어리 왕국의 호위대장이 말을 이끌고 나가 전령을 맞이했다.
멀어서 들리지는 않지만,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에라 제국?”
“예?”
웅삼이 내뱉은 말에 이실라 공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되물었다. 그러자 웅삼이 변명하듯 앞쪽을 가리키며말했다.
“아, 뭐 일부러 들으려 한 건 아닌데 좀 들려서…….”
꽤나 떨어진 거리에서 전령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놀랄 만도 했지만, 그보다 시에라 제국이라는 말에 이실라 공녀는 다급해졌다.
“혹시 무슨 일인지 아세요?”
“뭐, 그것보다 곧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이실라 공녀의 질문에 웅삼이 살짝 고갯짓을 했다. 전령과 이야기를 나누던 호위대장이 이쪽으로 말을 몰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무언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카마쉬가 말을 몰아 호위대장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제국이 도발을 했습니다.”
제국이 도발했다는 말에 이실라 공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국이 말입니까? 하지만 지금 내전으로 그럴 여력이 없을 텐데, 어찌…….”
제국의 도발이라는 말에 카마쉬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전면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 필리어리 왕국의 국경 쪽에 도발이 이루어진 모양입니다.”
“하필 이런 때에…….”
이실라 공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필리어리 왕국에 중재 혹은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움직이던 차였는데 제국의 도발이라는 악재가 터졌으니 상황이 더 어려워진 것은 당연했다.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제국이 도발했다면 어느 한 나라의 힘으로는 막기 힘듭니다.”
“그건 그렇지.”
카마쉬의 말에 이실라 공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터그람 놈들도 미치지 않고서야 이 상황에서 계속 전쟁을 이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카마쉬는 상황을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이실라 공녀에게 차분히 설명을 했다. 하지만 이실라 공녀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든 좋은 상황은 없었다.
더 나쁘거나 덜 나쁜 정도의 차이였다.
“일단 속도를 높여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실라 공녀가 말하자 필리어리 왕국의 호위대장이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대답했다.
“속도를 높인다!”
“속도를 높여라!”
호위대장이 호위대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자 호위대가 복명을 하며 더욱 박차를 가했다.
웅삼은 그들을 따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뭐가 좀 안 풀리는데…….”
이실라 공녀 측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 판에 뭔가가 자꾸 뒤틀리며 어렵게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이실라 공녀에 눈이 뒤집혀 잘못 된 줄을 잡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숨을 쉰 웅삼은 그저 그들을 따라 말을 몰아갔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따라다니는 것뿐이었다.
“젠장, 어딜 가나 제국이 문제야.”
잠시 신성제국을 떠올린 웅삼이었다.
이실라 공녀의 일행은 필리어리 왕국의 수도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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