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546
22화 향수, 그 가슴 저린 기억
각각의 명령을 하달받은 이들이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며 해산한 뒤 자리에 남은 것은 바사 론 카말 공왕과 이실라 론 카말 공녀, 타다르 백작 그리고 계웅삼이었다.
“칠십 년이라…….”
아까 웅삼이 한 말을 떠올린 바사 공왕이 고개를 내저으며 되뇌었다.
그러자 웅삼이 다시 말했다.
“따지자면 백 년에 가까운 전쟁을 해왔습니다.”
“나라의 국력이 그리 버틸 수 있는가?”
바사 공왕의 질문에 웅삼은 씁쓸한 마음을 애써 숨겼다.
버티지 못했다.
그로 인하여 이런 알지도 못하는 세상으로 와 다시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이유는 그저 병사들의 힘이 다하고 백성들의 힘이 다해서가 아니었다.
사리사욕에 눈먼 자들의 멍청한 권력싸움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금에 와서 일일이 설명할 이유도 없었고, 또 차원을 넘어왔다는 황당한 말을 한다면 오히려 지금까지의 이야기조차 부정당할지도 몰랐다.
누가 쉽게 믿겠는가.
그들이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웅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의 가우리는 그 누구도 범접치 못하는 제국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아…….”
바사 공왕이 탄성을 흘렸다.
이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투쟁의 세월을 보낸 나라가 지금은 그 누구도 범접치 못하는 대제국이 되었다는 말.
물론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최소한 웅삼이 못 믿을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알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찰나를 같이했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바사 공왕은 웅삼이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왜 우리만 남으라고 하신 거예요?”
이실라 공녀가 조심스럽게 묻자 바사 공왕이 웅삼과 타다르 백작을 한 번씩 쳐다본 후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까 그 자리에서 이야기하지 않은 작전이 하나 더 있다.”
“작전이요?”
“나 대신 설명해 주겠는가?”
바사 공왕의 말에 웅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실라 공녀는 웅삼이 또 다른 계책을 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은 왕국의 다른 이들조차 알면 안 되는 비밀스러운 계책이라는 것도 말이다.
“시에라 제국을 칠 겁니다.”
“네. 네? 어딜 쳐요?”
“시에라 제국을…….”
“미쳤어요? 어, 어머나 제가 말이 허, 헛 나왔네요. 오호호호!”
순간 평소대로 말을 내뱉었던 이실라 공녀가 진땀을 흘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바사 공왕이 한탄을 했다.
‘요망한 것!’
딸이라지만 여자는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반면에 웅삼은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자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캬!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리 화끈하니 얼마나 좋아?’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씐 웅삼이었다.
그런 웅삼의 표정을 본 타다르 백작은 또 다른 생각을 했다.
‘낡아빠진 천 신발도 제 짝이 있다더니…… 이놈 취향도 참…….’
잠시 멍했던 표정을 고친 웅삼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 미친 짓을 해야 합니다. 이 전쟁…….”
웅삼은 눈을 빛내며 힘을 주어 말했다.
“진창으로 만들 겁니다.”
“아!”
이실라 공녀는 이어진 웅삼의 설명에 탄성을 흘렸다.
터그람 왕국의 군대처럼 위장한 별동대로 터그람 왕국의 국경과 연결된 지역을 휩쓸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내전 중이라 하더라도 그에 따른 반응이 일어날 것이다. 터그람 왕국 스스로가 발을 빼도록 만들겠다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필리어리 왕국 국경의 소요 역시 터그람 왕국이 손을 썼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웅삼의 질문에 바사 공왕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알기로 그쪽 지역은 이황자의 세력권이니 만에 하나 연줄이 닿았다면 가능한 일이지.”
“터그람 왕국 인접 지역의 세력권은 어떻습니까?”
“그쪽의 일부는 이황자의 세력이지만 일부는 삼황자의 세력이라 볼 수 있네. 하지만 내전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중립을 지키는 중일 수도 있고.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파악이 어려운 상태라네.”
바사 공왕의 설명에 웅삼의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럼 삼황자 세력이라 볼 수 있는 지역을 쳐야겠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웅삼의 말에 바사 공왕이 의문을 표했다.
타다르 백작 역시 삼황자 세력을 친다는 말에 궁금증을 드러냈다.
“만약 이황자와의 연이 있다면 차라리 그쪽과 이간질을 시켜야지, 어찌 삼황자의 세력을 친다는 것이오?”
“일단은 먼저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터그람 왕국과 이황자 세력이 있는 국경지역은 무주공산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더더욱 이황자 세력권을 쳐야지 않겠는가?”
바사 공왕이 다시 묻자 웅삼이 고개를 저었다.
“삼황자를 쳐야 합니다. 그쪽 병력의 움직임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러네.”
고개를 끄덕이는 바사 공왕에게 웅삼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러면 중립에 준하는 입장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삼황자 세력을 치면서 소문만 내면 됩니다.”
“소문?”
“이황자가 터그람 왕국의 세력을 끌어들여 삼황자를 친다.”
웅삼의 말에 바사 공왕이 아직 확신이 안 서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걸…… 믿겠는가?”
“이미 필리어리 왕국 쪽의 병력을 움직여 그들의 움직임을 제어했잖습니까.”
“으음.”
연이어진 웅삼의 설명에 바사 공왕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터그람 왕국과 이황자 세력권의 국경상황을 저쪽이 알게 된다면 믿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럴듯하군!”
바사 공왕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웅삼을 바라보았다.
이실라 공녀 역시 웅삼을 다시 본 표정이었다.
웅삼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일전에 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웅삼이 운을 띄우자 세 사람의 시선이 그를 향해 집중되었다.
그 시선을 한 몸에 느끼며 말했다.
“구 할 구 푼(99%)의 진실 속에 일 푼(1%)의 거짓을 담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거짓이라고 말입니다.”
“아!”
“역시!”
“대단하군!”
바사 공왕과 이실라 공녀 그리고 타다르 백작이 각기 탄성을 흘렸다. 바사 공왕이 걱정을 덜어낸 표정으로 웅삼에게 말했다.
“자네는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군!”
“감사합니다.”
바사 공왕의 과분한 칭찬에 고개를 숙이면서 웅삼은 속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내용은 같은 건데 반응이 정반대다!’
이전에 이런 계책을 내놓았을 때는 모두가 한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구라 치는 데에는 천부적인 인간이야.’
그런데 이곳에서는 전략가란 찬사를 받았다.
왠지 이곳이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하는 웅삼이었다.
* * *
카말 공국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웅삼이 설명해 준 청야전술의 요체를 적용하기 위한 준비도 쉽지 않았다. 단지 부수고 불태우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적재적소.
폐허를 만들면서 그 안에 일부 함정들을 적절히 섞는 것도 중요했다.
이 모든 게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져야 이 전술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그런 게 아니라면 그저 스스로의 터전을 불태우는 것에 불과했다.
사실 적군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태우고 부수는 것은 어느 전쟁이든 수행하는 기본적인 전술이었다. 하지만 이 당연한 행동을 체계적으로 적용하여 적극적으로 쓰는 방식은 여태까지 없었다.
청야전술의 요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은밀한 움직임이 있었다.
시에라 제국의 국경에 대한 첩보를 최우선적으로 확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스럽게 그쪽의 첩보선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이전까지 주적으로 설정된 곳이 바로 시에라 제국이었던 덕에 그에 따른 정보 수집은 빠르게 이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고무적인 내용이 흘러 들어왔다.
“자네 말이 맞았네!”
바사 론 카말 공왕이 흥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웅삼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렇다면?”
“이황자 진형은 외부에 보이는 병력만 존재할 뿐, 실질적인 주력은 내전에 동원되기 위해 빠져나가 있었네.”
“다행인데요?”
웅삼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네.”
하지만 대답을 하는 바사 공왕의 표정은 미묘했다.
분명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무언가 묵직한 걱정거리를 담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이실라.”
“예, 아버지.”
바사 공왕이 무거운 음성으로 자신의 딸인 이실라 론 카말 공녀를 불렀다.
그의 부름에 이실라 공녀 역시 무언가 짐작한 것이 있는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를 응시하던 바사 공왕이 그녀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별동대를 네가 맡아줘야겠다.”
“알겠습니다.”
두 부녀의 대화를 들은 웅삼은 순간 멍해졌다.
별동대의 임무는 시에라 제국을 휘젓고 오는 것이다.
그것도 적지인 터그람 왕국의 국경을 넘었다가 이황자 진형 쪽에서부터 삼황자 진형까지를 관통해야 한다.
터그람 왕국으로 넘어가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일단 넘었다 해도 문제다.
이황자 진영이야 그렇다 쳐도 삼황자 진형은 무주공산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이쪽 국경에서 넘어가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중립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친삼황자 세력이었던 그들에게 있어서, 터그람 왕국의 침략을 받고 있는 카말 공국보다 더 위험한 상대는 바로 이황자 세력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황자 측은 그들을 칠 생각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굳이 중립을 지키는 이들을 건드려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는 싫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 해도 경계가 허술할 리는 만무했다.
그런 상황에서 바사 공왕이 자신의 딸인 이실라 공녀를 그 위험한 일에 투입시킬 줄은 몰랐다.
웅삼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별동대를 이실라 공녀가 이끈다고요?”
“그러네.”
“아니, 차라리…….”
웅삼은 타다르 백작을 슬쩍 보며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그 위험한 일을 저 양반한테 시키지 왜 딸내미를 시키느냐는 의미를 담은 시선이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타다르 백작 역시 그 표정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나와 타다르는 전선으로 나가야 한다네. 자네가 말한 그 기만전술에 나와 타다르가 있어야 저들도 더 긴장할 것이니 말일세.”
“으음.”
웅삼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국의 상징인 바사 공왕과 그의 최측근이자 현 카말 공국의 강자인 타다르 백작이 함께 움직여 줘야 저들도 믿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사지나 마찬가지인 곳에 이실라 공녀를 떠민다는 것은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웅삼의 의문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바사 공왕이 말을 이었다.
“내 딸은 강하다네.”
“예. 좋은 무사더군요.”
“마찬가지로 함께 갈 이들 역시 그 충심이나 실력이 대단한 친구들일세.”
“…….”
당연한 일이다.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국 소수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실력이 출중한 이들로 별동대를 조직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웅삼은 말없이 바사 공왕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으며 바사 공왕이 덧붙였다.
“살아 돌아오라고 보내는 것일세.”
“살아 돌아오라…….”
웅삼이 말끝을 흐리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네. 내 딸과 나의 전사들이 힘껏 싸우고 꼭 살아 돌아오라고 보내는 것이네. 단지 그뿐이라네.”
드문 일이지만 없는 일도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물론 상황은 다르지만, 고진천이라 해도 이런 일에 직접 나섰을 것이다.
그는 강했고 충분히 살아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정말 강하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런 일에 신뢰받는 수하 무장이나 왕족의 핏줄이 나서는 이유는 병사들에게 생존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전장에서 솔선하여 죽음의 길로 뛰어드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것이 전쟁이었다.
자신의 핏줄조차 써먹어야 하는 게 전쟁인 것이다.
여기서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바사 공왕에게 핏줄은 오로지 이실라 공녀뿐이다.
별동대를 그녀가 이끈다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오르고 이 작전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게 된다.
최상의 패였다.
그것을 알기에 바사 공왕의 표정이 무거웠던 것이다.
반면에 이실라 공녀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그 일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웅삼에게 타다르 백작이 걱정 말라는 투로 말했다.
“걱정할 것 없소. 내 조카들도 함께할 것이니. 비록 젊지만 충분히 이실라를 지켜낼 것이오.”
“그렇……습니까.”
타다르 백작의 조카들이라면 그에게 새로운 취미를 만들어준 바르와 구르였다.
“걱정 마십시오!”
“맡겨만 주시면 됩니다!”
타다르 백작의 뒤에 시립해 있던 바르와 구르가 가슴을 탕탕 치며 대답했다. 왜 이 회의실에 함께 따라왔나 했는데, 저 둘이 이실라 공녀를 보좌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을 본 웅삼은 더 불안해졌다.
웅삼의 이런 불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다르 백작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두 녀석이라면 목숨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이실라를 지켜낼 것이네.”
순간 웅삼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지켜낸다는 말에 뭔가 가슴속에 묻어둔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켰습네다.”
그 마지막 순간 사방의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비명, 그리고 함성 속에서도 아빌런이 똑똑히 들었다고 한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커다란 대부를 등에 맨 바르의 모습과 을지부루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런 아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웅삼을 향해 다시금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젠장…….”
웅삼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그 길로 공왕의 집무실을 나와 홀로 걸었다.
그냥 혼자이고 싶었다.
이건 향수였다.
누군가에 대한 지독한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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