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554
30화 보라! 이 함정을!
수많은 병사가 모여 열심히 곡괭이질과 삽질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보면 도로를 정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멀쩡한 길을 온통 파 젖히고 있는 것이었다. 좌우로 늘어서 있던 나무들은 잘려 나가 길 위를 덮고 있었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돌들이 깔려 오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병사들이 길을 망가트리는 사이사이로는 사냥꾼 복장의 사내들과 노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 정말 지랄 맞네. 칼을 한번 휘두르는 게 속 편하겠구만.”
“칼 휘두르다가 맞는 건 생각 안 하냐?”
털북숭이 병사가 잠시 허리를 펴며 투덜거리자 옆에서 곡괭이질을 하던 병사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투덜거렸던 털북숭이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나저나 저건 또 뭐냐?”
“함정을 깐단다.”
“함정?”
“그래. 이거 무시하고 이동하거나 치우려는 걸 막는단다.”
동료 병사의 말에 털북숭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게 효과가 있나?”
“낸들 아냐. 어쨌든 은퇴한 사냥꾼에다가 동네 뒷산에서 소일거리로 올무 놓던 노인들까지 총동원했으니 그냥 지나가긴 힘들 정도의 함정이 깔릴 거 같다.”
“응? 저 친구도 함정을 만들 수 있나? 식당 종업원 출신 아니야?”
같은 병사이기에 동료가 무기를 들기 전에 뭘 했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털북숭이가 보기에 지금 함정을 설치하고 있는 친구는 함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털북숭이가 가리킨 방향을 본 병사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 저건 함정 흉내만 내는 거라던데?”
“흉내만?”
“잘은 모르는데 가짜랑 진짜를 섞어 깔아서 신경을 잔뜩 긁을 모양이더라.”
“오호! 그럼 가짜라고 무시하다가 진짜에 걸리면 꽤 고생하겠네?”
“그게 그렇게 되나?”
털북숭이의 감탄 어린 말에 대답을 해주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긴 이 정도면…….”
병사가 작업해 놓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꽤 넓은 지대가 이렇게 변해 있었다. 이 정도면 무시하고 지나가다가는 봉변을 당하기에 딱 좋았다.
시간 끌기에는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거기 잡담 그만하고 빨리 움직여! 입으로 땅 파냐? 아예 주둥이로 파게 만들어줄까!”
둘의 잡담을 눈치챘는지 기사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태평하게 말을 나누던 두 사내는 재빨리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이크!”
“예! 알겠습니다요!”
“빨리하고 다음 위치로 이동해야 한다!”
더는 호통을 치지 않고 기사가 지나가자 털북숭이가 땅을 파며 한숨을 쉬었다.
“이거 얼마나 해야 하지?”
“들리기에는 보기만 해도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만들어놓는다던데.”
“지금은 나도 토하겠다.”
“큭큭큭!”
길에 장애물을 만들고 함정을 파는 데 동원된 인원만 오만이었다.
이 모든 일에 병사들만이 동원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만이 병사였고, 절반은 전장에 나가지 않는 백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장년층과 여인, 심지어 아이들까지 장난삼아 꼬챙이를 들고 이 일에 참여한 것이다. 그야말로 카말 공국의 백성이 총동원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모여 길을 망가트리고 함정 비스무리한 것을 만들어대니 한눈에 봐도 무시 못 할 정도가 되었다.
이 정도 인원이 동원되었다면 그들의 일상에도 사실 문제가 있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전부 일상이라고 할 만한 게 남아 있지 않은 처지였다.
적들의 진격로 혹은 그 주변에 살던 백성인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의 터전은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반발도 있었다.
적들이 오지도 않았는데 살아오던 터전을 스스로 태우고 부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라에서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마을을 세워주기로 약속했고, 또 그동안의 먹을거리도 책임져 주기로 한 뒤로는 순순히 따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순순히 따른 이유 중 하나는 이미 숱하게 전쟁을 겪어본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제국과의 전쟁에서 피난도 가보았고, 또 전쟁이 벌어지면 일반 백성은 그저 전리품을 수거할 착취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바사 공왕은 그런 이들을 이 작업에 동원시킨 것이다.
축성 등의 까다로운 작업과는 달리 이것은 단순 노동인데다 뭔가를 망가뜨리기만 해도 되는 일이었다.
이쯤 되자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던 백성의 참여는 굉장히 높았다. 오히려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소소한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변했다.
어떻게 복수를 할까 하는 궁리를 수만 명이 하는 통에 갖가지 기발한 발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 기발한 아이디어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아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조막만 한 돌도 쌓으니 바위 하나를 옮겨놓는 것 이상의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일부 장난기 있는 놈들이 거기에 똥오줌을 싸질러 대기 시작했다.
특히 주변에 물이 없는 곳에서 그런 일을 해놓으면, 먹을 물도 모자랄 판이니 적들은 고생만 할 것이 분명했다.
어떤 지휘관이 먹을 물도 아껴야 할 판에 손에 똥 묻었다고 닦을 물을 주겠는가.
전쟁에서 주의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위생 문제였다.
이에 착안한 어떤 이는, 닿으면 간지럽거나 두드러기가 나는 풀들을 장애물 위에 잔뜩 뿌리기도 했다.
이것을 안 지휘관들이 대대적으로 그것을 장려하였다.
심지어 구덩이들을 파고 거기에 작업하는 이들이 대소변을 보니 그것만 해도 충분한 함정이었다. 오물이 채워진 구덩이에 나뭇가지 등을 덮어 함정을 완성한 것이었다.
물론 냄새까지 어쩌진 못했다. 하지만 그 또한 주변 몇몇 야지에 일을 봄으로써 간단하게 처리했다.
냄새를 냄새로 차단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터그람 왕국군이 가야 할 길을 엉망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 * *
“정찰대에서 보고가 왔습니다.”
“뭔가?”
그리팔 파샤 후작이 막사 안으로 들어온 참모를 보며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저번에 열변을 토하다가 피까지 토한 이후 더 이상의 상처 재발을 막기 위해서였다.
“진격로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예.”
“무슨 문제인가?”
그리팔 후작의 질문에 참모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길이 엉망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으음. 진군 속도를 늦추기 위해 그리한 건가?”
“그런 듯합니다.”
참모의 대답에 잠시 고민하던 그리팔 후작이 입을 열었다.
“할 수 없지. 그럼 우회할 만한 길은 있는가?”
“우회할 만한 길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길 위에 이런저런 장애물들을 광범위하게 깔아놨습니다.”
“작정했군.”
그리팔 후작의 얼굴 위에 불편한 기색이 감돌았다.
“화내시면 안 됩니다.”
“알고 있네.”
혹시나 목의 상처가 다시 터질까 봐 옆에서 쭉 대기하고 있던 치료사가 주의를 시켰다.
“혹시 그 주변에 매복 같은 것은 있던가?”
“다행히 매복할 만한 길도 아니었고, 매복도 없었다고 합니다.”
“할 수 없지. 치우며 가는 수밖에. 병력을 이동시키도록. 장애물을 치워야 하니 이동 시간이라도 줄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리팔 후작의 명령에 터그람 왕국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군한 지 반나절 만에 장애물을 만난 그리팔 후작이 몸소 그것을 살피기 위해 선두로 나왔다. 그것을 본 그리팔 후작은 혀를 차며 말했다.
“허, 지독하군.”
“듣던 것보다 더합니다.”
“그렇군. 마구잡이로 해놨어.”
그리팔 후작이 천천히 장애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호위 기사들이 주변을 살피며 그를 뒤따랐다.
“광범위하긴 하지만, 다행히 급히 움직인 덕에 한꺼번에 달라붙으면 오래 걸릴 정도는 아니겠군.”
주위를 천천히 살핀 그리팔 후작의 결론이었다.
병사들의 체력이 조금 걱정이 되지만 많은 수의 병력이 일시에 달라붙어서 해결하면 생각보다 빨리 치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참모들 역시 그리팔 후작의 판단에 동의했다.
“저들도 시간이 없었을 테지. 우리가 갈 만한 길이 여러 곳이니만큼 그곳을 다 헤집어놓아야 하니 말이야.”
“그건 그렇군요.”
“우리는 반대로 한 길만 빠르게 치우고 나가면 되니 저들 역시 이런 일은 곧 포기하게 될 걸세.”
그리팔 후작은 미소를 지으며 장애물들 사이로 건너가 작은 바위 하나를 집었다.
“후, 후작님!”
“허허헛, 이런 것 따위로 나 그리팔의 진군을 막겠다고?”
그리팔 후작이 헛웃음을 지으며 보란 듯 작은 바위를 들어 올렸다.
찰칵!
“……억.”
순간 뭔가가 접히는 소리와 함께 그리팔 후작의 두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동시에 그는 들어 올린 바위를 놓쳤다.
콰직!
자유 낙하한 바위는 그리팔 후작의 발등을 찍었다.
그리고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아아아아!”
“후, 후작님!”
“총사령관님!”
“치료사! 치료사를 불러!”
순식간에 주변이 난장판으로 변했다.
그리팔 후작의 한쪽 발목에는 밟으면 저절로 닫히는 종류의 덫이 물려 있었고, 다른 쪽의 발등에는 바위가 올라가 있었다.
“크아아아아! 카말 공국 이 개자식드으으으을!”
분노한 그리팔 후작이 분노를 담아 외쳤다.
푸슉!
“커억!”
분노가 지나쳤는지 결국 목에서 핏줄기 하나가 뿜어졌다. 다시 상처가 도진 것이다.
그렇게 터그람 왕국의 발목이 묶이기 시작했다.
“으음.”
그리팔 후작의 두 발은 붕대에 감겨 있었고, 목 역시 새로운 붕대가 둘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참모들과 일선 지휘관들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더는 시간을 끌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작업은 시작했는가?”
“예.”
“어떤가…….”
그리팔 후작의 질문에 일선 지휘관 하나가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며 대답했다.
“예상대로 장애물 사이사이에 함정들이 존재했습니다.”
“으음.”
“그리팔 후작님이 아니었다면 병사들을 일시에 투입했다가 큰 낭패를 볼 뻔했습니다.”
눈치만 보던 참모 하나가 재빨리 끼어들어 한마디 던졌다.
“으음. 그렇군.”
그러자 그리팔 후작의 표정이 조금은 펴졌다.
“하지만 워낙 함정이 많은 탓에 병사들이 자잘한 부상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진도가 늦어지겠군. 하나 이해가 안 되는군. 그리 많은 함정을 어떻게 깔았지?”
그리팔 후작의 의문에 일선 지휘관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가짜가 상당수 섞여 있었습니다.”
“가짜?”
“예. 모양만 흉내 낸 가짜 말입니다.”
순간 그리팔 후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서 병사들의 피해가 늘어난 것인가.”
“예. 가짜의 수가 많다 보니 몇몇 병사가 대충 처리하다가 진짜 함정에 걸려 피해를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머리를 쓸 줄이야…….”
그리팔 후작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하지만 보고는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여럿이서 옮겨야 하는 장애물에는 함정이 있는 확률이 높아 알고도 당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 때문인지 커다란 장애물이 나타나면 병사들이 슬슬 피하는지라…….”
“이딴 장난 같은 행동에 발목을 잡힐 줄이야.”
그리팔 후작의 얼굴은 참담함으로 물들었다.
이건 뻔히 알고도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네. 병사들을 독려하고, 대부분은 가벼운 함정이라니 병사들이 기피하는 것엔 기사들을 투입시키게. 그들의 갑주라면 큰 피해가 없을 것이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리팔 후작의 명령에 일선 지휘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기사들의 무장이라면 어지간한 함정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가보도록.”
“알겠습니다.”
참모들이 나가고 그리팔 후작이 입을 열었다.
“내 발은 어떤가?”
그의 질문에 치료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술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덫에 걸리신 발은 반나절이면 괜찮아질 것입니다만, 바위에 찧으신 발등은 뼈가 박살이 나서 며칠은 더 술법과 약초의 치료를 받으셔야 하옵니다.”
“끙.”
자꾸만 상처가 늘어나는 것에 짜증이 났는지 그리팔 후작의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그것이 치료사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왔는지 그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닐세. 나가보게.”
“예…….”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인 치료사가 뒤돌아서서 막사의 천막을 열어젖혔다.
콰콰콰쾅!
“뭐, 뭐냐!”
순간 밖에서부터 울려 퍼진 폭음에 그리팔 후작이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이냐!”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가 달려와 막사 앞의 기사들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러자 막사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뛰어 들어와 그리팔 후작의 앞에 부복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는가!”
“그, 기사들을 동원해 바위를 치우는 순간 적이 설치한 술법이 발동하여 그만…….”
“허, 이런 개 같은 경우가…….”
그리팔 후작은 허탈함을 느끼고 말았다.
피해를 줄이고자 기사들을 동원시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피해는…….”
“넷 중에 셋이 죽고 하나는 중태라 하옵니다.”
“크윽!”
그리팔 후작의 얼굴이 참담함으로 일그러졌다.
이런 결과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앞으로 기사들을 동원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아무리 병사의 피해가 걱정이 된다 하더라도 기사 전력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군.”
일그러진 그리팔 후작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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