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578
55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또 한 번의 의미 없는 살육이 지나갔다.
딱히 불쌍하다든지 죄책감이 든다든지 하지는 않았다. 입맛이 쓴 것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훈련을 받지 않았든 받았든 간에 터그람 왕국의 병사들이 휘두른 몽둥이나 날붙이는 충분히 몸을 상하게 만들 만했고, 또 이들의 외침은 아군을 위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허약한 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계웅삼은 찜찜함을 버리지 못했다.
“뭐지?”
“예?”
“아아, 그냥 좀.”
웅삼의 중얼거림에 뒤를 따르던 별동대원들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나저나 아무 놈이나 뿌려둔 덕에 손쉽게 제거하면서 움직일 수 있어 다행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잔뜩 긴장했는데 막상 허술한 적을 보니 허무한데요?”
“그러게.”
약간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서로 농을 건네며 몸이 굳는 것을 방지하듯 농담을 서로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
“응? 뭐가?”
그러던 중 한 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마디 툭 던졌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말.
그 말에 병사들은 이목을 집중했다. 그들 역시 이상하리만치 적이 허술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을 꺼낸 병사가 입을 열었다.
“하다못해 피리라도 있든가 이건 적을 발견했을 때 쓸 만한 게 없잖아.”
그 병사의 의문에 동료 병사들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난 또 뭐라고. 피리나 나팔 같은 게 많이 있을 리가 있나? 이렇게 무기 하나 제대로 넘겨주지 않고 보내는 마당에.”
“맞네.”
“보나마나 대충 소리나 지르라고 보냈을 것이야. 간격이 오밀조밀해서 비명이 터지면 충분히 들을 만하지 않은가?”
“그렇긴 한데, 막상 보면 소리 지를 준비조차 안 하고 있는 듯해서 말이지.”
그들이 그렇게 서로의 찜찜함을 털고 있을 때 웅삼은 쓰러진 적병들의 품을 뒤지고 있었다. 무언가 신호가 갈 만한 걸 가지고 있는가 싶어서였다.
그때 한 병사의 복장이 허술한 게 보였다.
별것 아닐지도 모르지만, 왠지 무장을 풀었다가 대충 묶은 듯한 흔적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뭐 찾으십니까?”
웅삼은 별동대 병사의 질문에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며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고는 다른 한 손으로 병사의 옷깃을 펼쳐 보았다.
조악하게 만든 나무 흉갑 뒤로 대충 묶인 앞섶을 열었다.
“……이건?”
웅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병사의 가슴팍에 희미한 문자가 새겨진 종이가 붙여져 있었다. 이곳의 술법사들이 술법을 운용할 때 쓰는 보조 도구 같아 보였다.
“이건 법지 아닙니까?”
“법지?”
“술법사들이 쓰는 종입니다. 서신도 날리고 하잖습니까.”
“이거 싼가?”
웅삼의 질문에 별동대 병사가 농담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에에이, 이거 그래도 꽤 나갑니다. 물론 엄청나게 비싸다고 보기에는 좀 모호하지만, 막말로 이거 한 장 값이면 한 식구가 며칠은 놀고먹을 수…… 어라?”
말을 하던 병사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자 웅삼이 종이를 몸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일단 별동대 본진으로 이동한다. 술법사에게 확인을 해봐야겠다.”
“알겠습니다.”
웅삼의 말에 별동대 병사들이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들이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적들이 이 살육의 현장을 알아보면 안 되었기에 빠르게 시체를 숨기고 피 냄새를 지우는 물을 뿌렸다.
그러고 나서는 빠르게 벗어났다.
길을 열던 웅삼이 되돌아오자 이실라 공녀와 본대의 일행은 모두 긴장된 모습으로 그를 맞이했다. 뭔가 일이 있으니 되돌아온 것 아니겠는가.
짐작이 맞는 듯 되돌아온 웅삼은 서둘러 술법사를 찾았다.
다행히 술법사는 이실라 공녀를 호종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원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이것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나?”
웅삼이 법지를 내밀자 그것을 받아든 술법사가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일단 이미 발동이 되어버린 것이긴 한데.”
법지를 살피던 술법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건?”
“뭔가 발견했나?”
“이거 아무래도 짐승들에게 붙이는 것 같습니다.”
“짐승?”
술법사의 말에 웅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에게 붙어 있던 것인데?”
“사람! 이런!”
술법사가 당황하자 웅삼은 물론이요, 이실라 공녀와 병사들이 모두 살짝 동요하기 시작했다. 술법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어서 병력을 뒤로 물려야 합니다!”
“갑자기 왜?”
당황하기 시작한 술법사의 말에 이실라 공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술법사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자신의 말만을 이어나갔다.
“빨리 병력을 뒤로 빼야 합니다! 이거 정확하지는 않지만, 왕실이나 대귀족들이 사설 사냥터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걸 겁니다!”
그때 웅삼이 술법사의 양어깨를 강하게 쥐며 말했다.
“차근차근, 정확히!”
“그, 그게 사설 사냥터의 짐승을 누가 몰래 잡아먹지나 않을까 감시하기 위해 짐승에게 붙이던 게 이겁니다. 만에 하나 누군가 몰래 사냥을 하거나 이것을 떼어낸다면…….”
“그러면?”
웅삼이 이를 악물며 묻자 술법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생명 신호가 사라집니다. 관리자가 가지고 있는 술법적 처리가 된 지도에서 말입니다.”
술법사의 말에 이실라 공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그, 그러면 지금 우리의 위치가 발각된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잖아!”
“빌어먹을! 습격조 모두 소환시켜! 빨리!”
웅삼의 명령에 병사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우웁!”
푸욱!
허망함을 담은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이내 생명의 빛이 점차 꺼져 갔다. 숨이 멎으며 병사의 양손이 축 늘어지자 입을 막고 칼을 몸에 박아 넣었던 별동대 병사가 시신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 짓도 계속하니 힘드네.”
“빨리 길을 뚫어야 편해지지.”
“그나저나 터그람 놈들 이렇게 훈련도 안 된 놈들을 끌어다가 쓰다니.”
한 병사가 죽은 적병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동료 별동대원이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고맙지 뭐. 안 그래?”
“뭐, 우리로선 고맙잖아! 흐흐.”
별동대원들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때 한 별동대원이 갑자기 손을 올리며 경고성을 냈다.
“쉿.”
그 작고 짧은 한마디에 모두의 입이 다물어졌다. 순식간이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귓가에 무언가에 수풀들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인상을 구긴 별동대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접근하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은밀하게 느껴졌고 발소리 역시 귀를 기울이기 전에는 모를 정도였다.
중요한 것은 은밀하게 느껴지는 발소리가 그들을 중심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별동대원이 각자의 위치에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포위되었다는 의미였다.
적들은 그들의 위치를 알고 포위해 온 것이었다.
그때 별동대원의 입이 열렸다.
“이거 미끼군.”
“그러게.”
더는 입을 다물고 조용한 척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안 별동대원들이 허탈하게 웃으며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각자 무기를 고쳐 잡으며 각자 등을 맞대었다.
“여기 있구나, 쥐새끼들.”
터그람 왕국과 기사와 병사들이 수풀을 제치고 조소를 머금으며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들을 지켜보았다.
할 말이 없다는 듯.
“잡아!”
병사들이 몰려오자 별동대원들은 이를 악물고 맞섰다.
순식간에 칼이 어지러이 오갔다. 하지만 몇 합이 채 지나가기 전에 비명과 함께 몇몇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들은 모두 터그람 왕국의 병사였다.
“커억!”
“내, 내 다리!”
사선을 넘어온 별동대원들을 상대하기에 이제 좀 훈련을 받고 투입된 터그람 왕국의 병사들은 부족했다.
“노, 놈들의 반항이 거셉니다!”
“젠장.”
병사들을 인솔해 온 기사는 서른 명이 넘는 병사가 일곱밖에 되지 않는 적을 상대로 쩔쩔매고 있는 상황에 짜증이 치밀었다.
“나와라!”
병사들의 지지부진에 기사가 전면으로 나섰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내, 내 아래가 아니다!’
순간 터그람 왕국의 기사는 당황했다.
하나하나가 견주어 자신보다 못한 이는 없었던 것이다. 복장은 일반 병사들 복장과 같은데 그 실력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고, 공격해!”
기사가 고전하면서 명령을 내리자 그때까지 우물쭈물하던 병사들이 재차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그람 왕국의 병사들이 연이어 죽어나갔다.
서걱!
“크윽!”
터그람 왕국의 인솔 기사 역시 옆구리에 검상을 입고 비틀거렸다. 빠르게 빠져나오려 뒷걸음질을 쳤지만 그보다는 별동대 대원의 공격이 한발 더 빨랐다.
“컥!”
갑주의 연결 고리를 끊고 파고든 검날을 바라보며 기사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이내 시선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리가 날아간 것이다.
“히, 히이익!”
믿었던 기사가 죽어버리자 병사들이 창백하게 질리며 물러섰다. 하지만 그들의 귓가로 커다란 호통이 터져 나왔다.
“물러서지 마라!”
뒤이어 또 다른 병력이 당도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별동대원들의 안색이 더더욱 굳어졌다.
“새까맣게 깔려 버렸군.”
열도 안 되는 숫자를 대충 봐도 백에 달하는 병력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기척이 느껴지는 게 적들이 전면적으로 치고 나오는 듯했다.
“한 놈이라도 더 베고 가자고. 할 만큼 했잖아?”
별동대원 하나가 속 편한 소리를 하자 다들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흐흐.”
“그렇지.”
“화려하게 했지.”
실성한 사람들마냥 새실거리다가 별동대원 하나가 롱소드를 고쳐 잡고 달려 나가며 외쳤다.
“그럼 다들 지옥에서 보자!”
“싫다, 난 천국!”
“에라이!”
동시에 사방으로 쏘아져 나간 별동대원들의 공격에 비명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본대로 돌아온 별동대원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세 팀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미 적들이 깔려서…….”
스무 개의 조가 투입되어서 열일곱이 돌아왔다.
그중 다섯 개 조는 뒤에 투입된 대원들로 인해 적들을 죽이고 탈출해 왔다. 오히려 적들의 포위를 잘 뚫고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웅삼이 마치 자신의 탓인 양 고개를 숙인 별동대원들의 어깨를 두들겨 주곤 입을 열었다.
“상황은?”
“포위됐습니다. 퇴로도 이미…….”
정찰을 다녀온 구르가 말끝을 흐렸다.
웅삼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다들 약간 어두운 기색이지만 다들 불안해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할 만큼 했다는 표정들이었다. 이실라 공녀 역시 일전을 앞둔 전사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뭐, 덤비면 싸우면 그만이지. 다들 체력은 충분하겠지?”
“충분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한바탕해야지.”
웅삼이 웃으며 말하자 다들 미소를 지었다.
“문제는 어디서 싸우느냐인데…….”
수풀이 적당히 우거져 있어 나쁘지는 않았지만, 이런 곳에서는 싸우다 탈출하지 못할 수가 있었다. 다들 마지막을 생각하지만 웅삼은 아직 아니었다.
“그럼 위치를 좀 이동한다. 가능하면 언제라도 숲을 벗어날 수 있는 위치로 말이다.”
“숲을요? 이곳에서 싸우는 게…….”
“언제까지나 우리의 목적은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탈출이다. 지금 보고를 들어보니 적들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아. 밀집 방진이라든지 그런 전술은 사실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뻥 뚫린 곳에서 싸우는 게 나아. 모자란 놈들이 야금야금 쳐들어오는 것보단 뭉쳐서 치고 나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웅삼의 말에 다들 얼굴에 빛이 돌았다.
마지막 일전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차에 지휘관이 살길이 있다고 말을 하니 힘이 솟은 것이다.
게다가 그 말을 하는 이가 바로 웅삼이다. 지금까지 무수한 일을 해낸 그들의 영웅이었다. 그가 한 말이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그들의 생기 있는 표정을 보며 웅삼은 쓰게 웃었다.
‘그래, 힘들 내자구.’
전우라는 게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뒤에 두고 갈 수 없는 이들이 바로 전우다. 다 같이 죽든지 다 같이 살든지 해야 한다.
‘이거 못 돌아갈 수도 있겠는데.’
웅삼은 머리를 긁적이며 밝은 표정의 별동대원들을 보았다. 그들을 보고 피식 웃으며 다시 생각했다.
‘뭐, 이것도 나쁘지 않지.’
장도를 강하게 움켜쥔 웅삼이 외쳤다.
“죽게 되면 무어라 한다?”
웅삼이 나직하게 외치자 별동대원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이황자 전하!”
“어떻게?”
“들릴 듯 말듯!”
일제히 한목소리로 대답하자 웅삼이 괴소를 터뜨렸다.
“큭큭큭! 그거야!”
어디까지나 이황자의 병력으로 죽어야 했다. 밝게 웃으며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후의 일전을 위해서 말이다.
* * *
“적들을 몰아넣었습니다!”
“그래? 혹시 도중에 생포한 적은?”
“없었습니다. 워낙에 지독한 놈들이고 또 하나하나 실력이 기사급인지라…….”
“으음.”
적들의 실력이 높다는 말에 파인 그로이 자작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머릿수로 밀어붙이기로 했으니 망정이지 나름 빠르게 상대한다고 기사들을 모아 소수 정예로 덤벼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쪽의 기사라 해봐야 사백이 간신히 넘는다. 그나마 이백여 명은 이제 막 기사라는 이름을 단 수습 기사들 천지였다.
“좋아, 그럼…….”
파인 자작이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 보고하던 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죽은 적들 일부가 죽기 전에 이황자라는 말을 중얼거렸다고…….”
“뭐? 진짜인가?”
“그게 확인은 어려워서…….”
파인 자작이 이를 갈았다.
만약 이황자 쪽에서 자신들을 이용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놈들을 치러 간다!”
파인 자작이 본대를 움직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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