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579
56화 피로 만들어가는 길
콰두두두두!
병력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 우거진 숲은 아니었지만 꽤 많은 나무가 자라 있어 시야가 방해됨에도 익숙한 듯 말을 몰아 달렸다.
“히, 히익! 이쪽으로 온다!”
놀란 터그람 왕국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계웅삼을 선봉으로 카말 공국의 별동대원들이 빠르게 치고 나갔다.
콰직! 콰직!
롱소드를 휘두르는 것도 귀찮다는 듯 말을 몰아 막아서는 병사들을 치고 나갔다. 달리는 속도도 속도거니와 말의 그 무게가 더해지니 앞에서 걸리적거리던 병사들은 힘없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막아! 막으란 말이야!”
몇몇 기사가 정신없이 물러서는 병사들을 닦달했지만, 소용없었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일부 기사들마저 몸을 피하는 통에 제대로 명령이 먹힐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부 병사들은 바위 혹은 나뭇등걸 같은 장애물을 이용해 몸을 숨긴 뒤, 창을 내지르거나 활을 쏘았다.
“끼히히히힝!”
허벅지에 창이 틀어박히자 말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그 위에 타고 있던 별동대원이 재빨리 몸을 날렸다.
쿠웅!
“큭!”
등 쪽으로 아픔이 느껴졌지만, 몸을 굴리며 떨어진 덕에 움직일 만은 했다. 일어남과 동시에 롱소드를 고쳐 잡고 창을 들어 어설프게 환호하던 터그람 왕국 병사의 목을 그었다.
서걱!
“컥!”
단말마와 함께 창을 집어던지듯 놓치고 목을 부여잡은 창수가 빙그르르 돌더니 풀썩 자빠졌다.
“한 번에 덮쳐!”
몇몇 성깔 있는 병사가 동료의 죽음에 흥분하여 별동대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고르고 고른 정예와 그저 성깔 있는 일반 병사와는 그 실력 차이가 엄연히 달랐다.
서걱! 석!
달려드는 적 둘을 베어 넘기자마자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뽑아 날리자 또 한 명의 적군이 가슴팍을 부여잡고 모로 자빠졌다. 하지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허벅지를 내주어야 했다.
푸욱!
“큭!”
“내, 내가 맞췄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병사가 환호성을 지르자 순식간에 세 명의 동료가 죽어나가는 모습에 움찔했던 터그람 왕국 병사들이 힘을 얻어 달려들었다.
“이런 버러지 같은 놈들!”
성난 외침을 터뜨리며 별동대원은 재빨리 허벅지에 박힌 화살대를 잘라냈다.
거치적거리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허벅지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달려드는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심지어 병사들을 지휘하던 기사마저 그의 손에 숨을 거두자 병사들은 포위만 한 채 망설이기 시작했다.
“후욱! 후욱!”
별동대원 헤인즈는 어차피 포위된 꼴을 보니 살아서 돌아가긴 글렀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하나라도 더 죽여서 지옥으로 가는 길동무로 삼고 싶었다.
“안 오면 내가 간다!”
웅삼이 전장에서 항상 하던 말이다. 그 모습이 그땐 왜 그렇게 멋지게 보였는지 몰랐다. 그래서 외쳐 보았다.
외치고 나니 묘한 충만감이 돌았다.
마치 영웅이 된 듯했다.
“으아아아!”
“오, 온다!”
“창을 질러!”
병사들이 허둥대면서도 살기 위해 창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별동대원의 몸에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혈인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듯 베고 찔렀으며 또 달렸다.
“크, 크크크!”
숨은 거칠다 못해 제대로 쉬기 힘들었고 팔은 제대로 올라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오늘은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많은 적을 벤 날이기 때문이었다.
얼추 보아도 서른 넘는 적병이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그중에는 기사도 있었다.
아직 그보다 많은 적이 남아 있었지만 다들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웃!”
카앙!
뭔가가 날아오자 재빨리 막아내었다. 쇳소리가 강하게 울려 퍼졌다.
“이런…….”
돌이었다.
다가가기도 두렵고 또 헤인즈가 다가오는 것도 두려웠던 터그람 병사 중 하나가 던진 것이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바닥에 집히는 것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투탁! 탁! 탁!
“크으…….”
사방에서 날아오는 돌이 가죽 갑옷 위를 두들겼다. 가끔은 갑주로 보호받지 못하는 곳을 두들기기도 했다.
예를 들면 조금 전 화살을 맞았던 곳이라든지…….
퍼억!
“억!”
“때려죽여!”
“놈이 지쳤다!”
의기양양해진 적병들의 외침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큭큭큭!”
자신 하나를 잡자고 멀찍이서 돌을 던져대는 모습이라니.
헤인즈는 머리를 감싸며 달려 나갔다. 그의 온몸으로 날아드는 돌멩이는 격렬해졌지만 그의 질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또다시 몇 명의 병사가 그의 앞에서 죽어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뻐억!
“큭!”
어디선가 날아온 돌이 별동대원의 머리를 강타하고 지나갔다. 그 틈을 타 한 병사가 창을 내질렀다.
푸욱!
“쿨럭!”
헤인즈의 몸이 새우처럼 꺾이며 피를 토해내었다.
이미 온몸은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할 정도로 많은 피가 쏟아졌다.
그 와중에 다시 롱소드를 휘둘러 창을 찔렀던 병사의 양팔을 훑었다. 그러자 잘려 나가지도 않았는데 자지러지며 창대를 놓고 뒤로 나자빠졌다. 하지만 이어서 등 뒤로도 뭔가 쑥 밀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번엔 숏소드다.
양손으로 잡고 등 뒤쪽을 깊게 쑤셔 박고 있는 터그람 병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크으!”
롱소드를 휘둘러 웃는 낯짝을 잘라 버리려 했지만 그마저 실패했다.
째앵!
누군가 롱소드를 중간에 쳐낸 것이다.
창피하게도 롱소드가 손에서 날아가 버렸다. 무기를 놓치는 수치를 겪은 것이다.
손힘이 다한 것이다.
“흐흐흐!”
그러자 터그람 병사가 숏소드를 더욱 깊이 박아 넣으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마치 내가 잡았어!’라고 외치는 듯했다.
순간 언젠가 별동대원들을 두고 설교를 하던 웅삼의 모습이 떠올랐다.
“필요하면 무기도 던질 줄 알아야 해. 알아?”
“예!”
모두가 힘차게 대답했었다.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하는 건 전쟁이란 말이지. 내가 가진 무기로 적을 죽이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가진 무기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 적을 죽이는 거란 말이다.”
문득 이 순간 그 말이 떠올랐다.
몸을 틀었다. 그러자 숏소드에 등짝이 길게 갈라졌다. 허리가 반쯤은 잘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덕에 등에 숏소드를 박아 넣은 놈의 얼굴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힘껏…….
빠아악!
박았다.
이마가 저릿하면서도 신기하게 고통 속에 몽롱해지던 머리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눈앞으로 터그람 병사의 핏방울이 비산하는 게 느리게 보였다.
그중에 몇몇 누런 이빨도.
빠악!
또다시 한 방.
빠악!
또…….
웃는 꼴은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헐떡거리는 게 꼴좋았다. 귓가에 뭔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려왔다.
“마, 막아!”
“죽여!”
뭔가가 더 몸을 뚫고 들어왔지만 일단 하던 일은 마무리하고자 했다. 고개를 힘껏 뒤로 젖히고 다시 한 방.
서걱!
하늘이 돌았다.
아쉽다.
한 방만 더 날렸으면 됐을 건데. 그럼 확실할 텐데.
툭 데구르르.
끝까지 아군 병사를 붙잡고 박치기를 해대던 적의 머리를 날려 버린 파인 자작이 롱소드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이 한 놈을 가지고 뭘 하는 거야!”
“노, 놈이 너무 지독해서.”
“빌어먹을.”
파인 자작은 허약해 빠진 병사들을 보며 혀를 찼다.
징집병들은 이게 문제였다.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막상 전투에 나서며 허둥대기 일쑤였다.
“주, 죽었어?”
누군가 벌벌 떨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파인 자작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조금 전 자신이 직접 목을 날려 버린 적에게 박치기를 연거푸 당했던 병사였다.
“약해 빠졌어.”
“하지만 놈들이 하나같이 질릴 정도로…….”
기사 하나가 쩔쩔매며 변명을 하자 파인 자작이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됐고, 놈들의 방향은?”
“숲을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숲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그렇습니다.”
기사의 보고에 파인 자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놈들이 숲으로 더 깊이 들어갈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망타진하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다는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숲을 빠져나가려 한다는 말에 생각이 복잡해진 것이다.
생각을 하던 파인 자작의 시선에 자신이 손수 베어버린 적병의 머리통이 들어왔다.
“하나같이 기사급입니다!”
적들의 전초를 몇 잡았을 때 진땀을 뺀 기사의 변명이 떠올랐다.
지금도 하나를 잡는 데 수습이지만 기사 하나와 병사 서른 이상이 희생되었다.
“제길.”
파인 자작은 확신했다. 적들은 이쪽의 전력을 이미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포위망을 구성한 채로 놈들이 빠져나가려는 방향으로 병력을 집결시켜! 빨리!”
“알겠습니다!”
파인 자작의 명령에 기사들이 빠르게 상황을 전파해 나갔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파인 자작이 이를 갈았다.
“완전 우습게 보였군.”
하지만 화낼 상황이 아니었다.
놈들 전력이라면, 그리고 생각대로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모두가 기마로 이루어진 병력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 병력이 몇백이라면 충분히 돌파도 가능할 것이다.
“큭.”
하지만 이쪽에는 술법사들로 구성된 전단이 있었다. 전단으로 구성된 술법사들의 힘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동한다!”
파인 자작이 말 위에 오르며 명령을 내렸다.
* * *
두두두 두두두!
계웅삼은 입맛이 썼다.
적들의 수준은 예상대로 별 볼 일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너무도 많은 수가 오밀조밀하게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게 컸다.
벌써 수십에 달하는 별동대원이 적들의 공격과 방해에 낙마하여 각자 저승길 동무를 만들기 위해 분전하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별동대는 계속 달렸다. 동료들이 만들어주는 기회를…… 피로 만들어준 길을 그들에게는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웅삼의 외침에 별동대원들이 비장감 서린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
“아까도 말했지만, 떨어지면 버리고 간다! 칼을 맞든 활을 맞든 떨어지지 말고 따라붙어라!”
“예!”
대답은 우렁찼지만 느낌은 달랐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음성들이었다.
떨어지면 떨어진 대로 한 놈이라도 더 잡고 가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런 그들의 의지를 읽지 못할 웅삼이 아니었다.
“큭.”
왠지 자꾸 같이 다니다 보니 더 정감이 갔다.
혼자 빠져나가는 건…….
이제 생각도 할 수 없다. 웅삼의 눈이 빛났다.
“오라!”
그의 눈앞에 얼기설기 만든 그물을 뿌리는 적병들이 보였다. 적들은 아직 다가오지도 않았지만 웅삼은 장도를 힘껏 휘둘렀다.
서걱!
뭔가 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손도끼를 날리자 커다란 나무에 날아가 박혔다. 이어서 그 나무가 천천히 넘어가기 시작했다. 적들을 향해.
“어 어어어!”
“피, 피해!”
콰드드등!
커다란 나무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리자 미처 피하지 못한 터그람 왕국 병사들이 깔려 아우성을 쳤다.
“히야아!”
그 위로 웅삼의 말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뒤이어 별동대원들도 연달아 장애물을 넘어 달렸다.
끝이 보였다.
그리고 시작이 보였다.
* * *
“가지.”
대무덕이 자신의 환두대도를 옆구리에 차고 천천히 막사를 나섰다.
편안한 거처에서 쉬어도 될 법했지만, 대무덕도 또 그 휘하 장수들도 하나같이 마법진 주변에 막사를 펼치고 대기했었다.
수련에 힘을 쓰기도 했고 또 경계에 만전을 기하기도 했다.
대무덕이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무장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고진천이 없는 지금 실질적인 권력자는 바로 대무덕과 연휘가람이었다.
대무덕이 지나가자 군례를 거둔 몽류화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중얼거렸다.
“이거 말 그대로 철통같은 경계구만.”
“당연하지. 어디 또 계 장군 같은 인간이 나타나 마법진에 오줌을 싸 갈기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부여기율이 한마디 더하자 삼두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킁, 일부 도는 소문으로는 제라르 그 양반이 와서 이렇게 경계가 심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그럴지도.”
“으음.”
삼인방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신들의 추리에 확신을 가졌다. 그때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었다.”
“더헙!”
“쿨럭!”
“킁, 그, 그게…….”
순간 삼인방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낀 채 고까운 시선을 보내는 필리언 제라르가 그들의 시선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그게…….”
“한번 붙어볼까?”
제라르가 으르렁거리자 다들 고개를 딴 곳으로 돌렸다. 뇌전의 제라르가 달리 붙은 이름이 아니다.
“쯧, 주둥이만 살아가지고 콱 그냥!”
그때 개김성이 강한 삼두표가 입을 열었다.
“킁, 그럼 붙어봅시다.”
“오호?”
“삼 대 일로.”
“…….”
두표의 말에 제라르는 침묵을 지켰고, 기율과 류화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고개를 좌우로 뚜둑거리는 것이 삼 대 일이라면 언제든 붙겠다는 의미였다.
“시, 신성한 대결에 삼 대 일이라니!”
“계 장군은 그렇게 붙었는데.”
“뿐인가? 대무덕께서도.”
“열제께서도 마찬가지셨지.”
“야야, 그 양반은 아예 묵갑귀마대 떼거지로 모아놓고 붙었지.”
두런두런 나누는 그들의 대화에 제라르는 똥을 싸다만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그, 그럼 둘만…….”
“저런다니까.”
“야야, 하지 마. 그냥 우리가 졌다고 하자.”
“그럴까?”
“…….”
제라르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둘은 감당이 되었지만 셋은 어렵다. 이게 세 놈의 실력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계웅삼과 자신의 차이였다.
“젠장.”
그때 대무덕의 외침이 들려왔다.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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