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622
99화 그 아비에 그 딸 (2)
“빌어먹을!”
상황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울아머 유저들의 원정대 수장인 발티아 로우 백작은 그리팔 후작의 지휘부로 다가갔다.
“이, 이럴 수가!”
함께 간 기사들이 놀란 음성을 터트렸다.
지휘부가 있던 자리 뒤로는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수십 명은 묻을 수 있는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후퇴를 했다면 몽땅 다 날아갔을 것이다.
다행히 지휘부는 그리팔 후작이 고집을 피우는 탓에 후퇴가 늦어 그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충격이 꽤 있었는지 제대로 서 있는 이들이 없었다.
먼저 길을 안내시키기 위해 보내었던 기사들은 방금 그 폭발에 휘말렸는지 거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후작 각하!”
발티아 백작이 그리팔 후작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달려갔다.
“으윽!”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는 그리팔 후작의 주변으로 그를 감싸려 몸을 던졌던 참모진과 기사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찾고 있었다.
“지금 지휘부가 붕괴되어 병력 통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어서 피하셔서 명령 계통을 복구하십시오!”
“사,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가!”
“아직 병력은 충분합니다만, 명령이 내려지지 않아 각기 대응을 하고 있어 자칫하면 각개 격파 당할지도 모릅니다!”
“허어…….”
그리팔 후작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병사들이 지휘부가 타격받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 짧은 순간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리팔 후작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사령기를 휘둘러라! 내가 건재하다는 것을 알려라!”
“아, 알겠습니다!”
병력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필수였다. 이내 쓰러졌던 깃발들 대다수가 다시 자리를 잡았고,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그게 통했는지 잠시 어지러워졌던 진영이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앙은 여전히 무인지경처럼 변해 있었다.
그리팔 후작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저자들을 고립시켜야 하네.”
“알겠습니다.”
중앙을 돌파해 오는 적들은 소수였다. 물론 그 기세가 남달라 병사들은 제대로 막아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발티아 백작이 저들을 막아서고, 호위대의 소울아머 유저들은 허리를 끊게.”
그리팔 후작의 말에 발티아 백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중앙을 유린하는 무리들과 그 뒤에 따라붙는 금발의 사내가 이끄는 병력.
중앙을 유린하는 이를 막아서며 금발 사내의 앞길을 막으면 두 병력 간의 길이 막히며 고립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일단 먼저 중앙 선두에 날뛰는 병력을 막아선 후 뒤쪽 금발 사내를 정리한 다음 뒤에서 몰아치면 앞뒤로 적을 공략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그들만 처리한다면 일단 숨을 돌리는 것과 더불어 아군의 꺾였던 사기를 높일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발티아 백작이 그의 수하를 외쳐 불렀다.
“크로만! 벨보아!”
“예!”
“기사단과 우리가 놈들을 막는다!”
“알겠습니다.”
소울아머 유저인 크로만 로이 자작과 벨보아 커 자작이 비장미 넘치는 얼굴로 군례를 올렸다. 이어 그들은 그리팔 후작의 측근인 크로아 샤인 백작을 보며 말을 이었다.
“크로아 백작!”
“예.”
“어서 그리팔 각하를 후위로 모시게.”
“크윽!”
발티아 백작의 말에 크로아 백작은 울분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당부의 말을 남긴 발티아 백작이 포스를 끌어올리며 외쳤다.
“가자!”
“와아아아아아!”
이어 그리팔 후작의 호위 중 일부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금발의 사내.
즉 제라르를 향한 칼날이었다.
* * *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터그람 왕국 병사들을 보며 레비언 고윈은 명령을 내렸다.
“나머지는 포기한다!”
고윈의 명령에 매의 군단 정예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처음의 어설퍼 보이던 그런 행렬이 아니었다.
한 번 써먹은 방법을 또다시 우려먹다 보면 역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대열이 만들어진 병력이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그때 저 멀리 적 진영의 중앙 부분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콰콰콰쾅!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진동이 울려오는 것을 보면 꽤나 강력한 공격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었다.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본 고윈이 중얼거렸다.
“울절 님? 아니군. 우루 장군이신가 보군.”
울절인 리셀의 위치를 보아 그의 공격이 아님을 알아챘다. 휘가람 역시 아니었다. 반대편에서 적병들을 유린하는 수룡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이는 우루였다.
마나석을 이용한 폭발임을 직감한 것이었다.
“비효율적이라 하지만 꽤 위력이 있는데.”
마법사들이 울상을 짓는 모습을 기억해 내었지만, 막상 위력을 보니 가끔은 써먹을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휘부는 살아남은 듯합니다.”
“아쉽군.”
웅삼에 대한 배려 따위는 처음부터 없는 고윈의 목소리였다. 성향 자체가 효율적인 승리에 맞추어져 있는 그였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빠르게 움직인다. 적들의 후위를 미리 친다.”
“후위를 말입니까? 도주로를 차단하는 게 아닙니까?”
고윈의 호위로 따라온 기사 베스킨이 반문했다.
분명 그들은 적들 사령부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먼저 자리를 선점한 뒤에 지연전을 펼치는 것이 임무였다. 하지만 고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보다는 적 후위를 치는 게 맞다.”
“그렇습니까?”
베스킨은 별다른 반문 없이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고윈의 판단을 믿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고윈이 웃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저 움직임을 보아 후위의 일부 예비대와 사령부의 위치를 바꾸겠다는 것 같군. 간단한 위치 변경으로 중앙을 두텁게 하겠다는 거지.”
“후위가 얕아질 텐데요.”
“그렇긴 해도 중앙보다는 덜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거야.”
“음.”
고윈은 말을 몰아가며 눈을 빛냈다.
“여기서 우리는 과감하게 후위를 친다. 그러면 놈들은 또다시 고민에 빠질 것이다.”
“덜 위험하다 내린 판단에 혼동을 주겠다는 의미이십니까?”
베스킨이 진한 미소를 지으며 되묻자 고윈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지. 대뜸 들이치면 또 뭐라도 있는가 싶어 움츠리게 될 거야. 그 정도면 되지 않겠나?”
“하핫! 그렇군요!”
“그럼 달려보자고!”
고윈의 병력이 빠르게 방향을 꺾어나갔다. 후위가 아닌 적들의 예비 병력을 향해 말이다.
* * *
“외곽을 돌파한 적병들이 후위의 예비대를 향해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으으음.”
예비대와 자리를 바꾸기 위해 움직이던 그리팔 후작의 미간에 잔뜩 찌푸려졌다.
그가 판단하기로 저 병력은 후방 차단에 목적을 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방향을 바꾸는 모습에 혼동이 왔다.
“호, 혹시 함정이 아닐까요?”
“함정?”
“중앙을 뚫는 척해서 우리 지휘부를 뒤로 빼내게 한 다음 직접 치겠다는 전략 말입니다.”
참모의 말에 그리팔 후작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그가 고민하자 또다른 참모가 말을 붙였다.
“조금 전 그 폭발만 봐도 그렇습니다. 지휘부를 노리기는 했지만 사실 원래 목적은 우리를 뒤로 빼내기 위해서일지 모릅니다.”
“미치겠군.”
참모의 말에 그리팔 후작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정말 그럴듯한 말이었다. 의심이 꼬리를 무니 또 다른 의심이 튀어나왔다.
사령부 부근을 공격한 그 커다란 폭발의 이유가 왠지 설득력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령부를 통째로 포로로 삼겠다는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적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소!”
마치 잘 짜인 판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밀리는 입장에서 이런 상황은 머리가 아팠다.
특히 지금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는 더했다.
“설마 이천여 병력으로 그럴 리가 있겠는가! 시간을 끌면 오히려 우리가 불리할 걸세!”
참모 중 하나가 반박을 하며 나섰다. 하지만 문제 제기를 한 참모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럼 저 병력은 대체 뭔가! 백도 안 되는 병력으로 중앙을 유린하는 저 병력은 뭐냔 말일세!”
“그…….”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방금 지적한 대로 백도 안 되는 병력의 기세에 밀려 사령부가 물러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단지 그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전에 터진 광범위 술법과 조금 전 사령부 인근을 타격해 버린 정체 모를 공격.
어마어마한 조공인 탓에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전장에서 적 소울아머 유저들이 지휘부로 난입하여 전투를 빠르게 끝내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 그런 방식을 즐기는 이가 바로 바사 공왕이었다.
그래서 병력을 교체하여 사령부를 빼내려는 것인데 저 병력을 보니 이것 또한 그들의 전략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에 하나 중앙을 유린하는 적 병력에 준하는 이들이 이천여나 된다면 그건 악몽이었다.
“예비대 중 기병을 이용해서 치는 건 어떻겠습니까? 일단 적의 병력 중 일부는 보병입니다. 운용을 보면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참모 하나가 절충안을 내밀었다.
“그게 좋겠군.”
그리팔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후위에서 천여 명이 조금 넘는 기병이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리팔 후작의 지휘부는 조금씩 후위로 움직여 나갔다.
조심스럽게 말이다.
* * *
“적진에서 기병이 관측되었습니다! 이대로 맞이하러 갑니까?”
기사 베스킨이 레비언 고윈에게 의중을 물었다. 하지만 고윈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는 끌어들이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순간 기병이 앞으로 나서며 보병들이 뒤쪽에 방패를 일제히 세웠다. 마치 더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그 상태에서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 터그람 왕국의 기병들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적들이 방진을 꾸미고 있습니다!”
“역시 허세였던가?”
기병을 이끄는 터그람 왕국의 오르페 자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조금 전 지휘부에서 요격하러 나갔던 병력이 적 전술에 휘말려 무너졌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정보가 없었다면 일단 덤벼들었을 것이지만 일단 들은 이상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정공 같습니다만.”
“으음.”
기병이 앞으로 나와 있고 보병이 뒤를 받치는 형태였다.
그때 기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꼬리를 물겠다는 의미 같았다. 기병들이 사라진 곳에는 보병들이 제법 큰 방패를 들고 방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법 촘촘히 짰지만, 그들에게는 대 기병용 장창이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본진도 아니고 우회하는 병력이 기병용 장창을 들고 있을 리는 없었다.
“보병을 던져주고, 기병으로 우리 뒤를 치겠다는 건가?”
“그런 듯합니다.”
막고 뒤를 친다. 이 작전의 전제는 막아서는 병력이 제 구실을 할 경우나 가능했다.
“우릴 얕보는 건가.”
“반전할까요?”
곁에 말을 달리며 묻는 부관의 질문에 오르페 자작이 고개를 저었다.
“보병만 따먹고 빠진다.”
“보병만 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우리 임무는 적들의 허실만 확인하면 된다. 적 기병은 무시하고 적 보병만 괴멸시킨 뒤 본대로 복귀한다.”
“알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보병을 무너트리고 이어 기마를 상대하느니 보병만 전속으로 뚫어서 무너트리고 우회하는 병력은 닭 쫓던 개마냥 만들어 버리면 그것도 나름대로 통쾌한 일이다.
어차피 꼬리를 물기 위해 우회하는 병력은 크게 돌 수밖에 없다. 돌진에 필요한 가속력을 얻기 위해서는 말이다.
터그람 왕국 기병들이 질주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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