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668
41화 진천, 배움의 길을 걷다
이곳에 와서 어디선가 들은 말이 있다.
정보의 홍수.
그 말이 맞았다. 수많은 정보가 줄을 지어 오가고 있었다. 정신이 없을 정도다. 어디 누군가가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상인이 어떤 일을 하고, 또 누가 누굴 해하고…….
그런 정보가 정신없이 오갔다.
이곳에 대해 파악하고자 할수록 머리가 어지러운 게 사실이었다. 이런 때 휘가람이라면 좀 나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자주 들었다. 되돌아가면 잘해 주어야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곳 사람들의 신체 능력이라고 할까.
그런 부분은 상당량 떨어져 있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삶이 너무 편했다. 집 앞에만 나가면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있는 자동차라는 것들부터 전철이라는 뱀처럼 긴 것들까지 무수히 많았다.
물론 이제는 그것들이 살아 있는 것들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더 신기했다. 배를 갈라 보려던 내게 광호가 뚜껑을 열어 보여 주었다. 알 수 없는 쇳덩이와 줄들로 이어진 것이 그것의 정체였다.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들의 시선이 신기하듯 나를 살폈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느 정도 나에 대해서는 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승배와 비교적 나의 본모습을 알고 있는 광호에게 운을 뗀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마법이 없다.
휘가람처럼 주술을 부리는 이도 없다.
물론 그때에도 주술을 부리는 이는 극소수였다. 반작용 때문에 그 자취를 감추어 가는…….
있다 해도 민간을 대상으로 하는 정도가 전부.
사실 그도 마법을 처음 봤을 때 신기했다. 물론 휘가람의 주술을 알기 때문에 비슷한 종류로만 인식했다. 하지만 이후 그게 잘못된 생각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익숙해진 후.
사실 익숙하고 말고는 상관은 없었다. 필요할 때 써먹기 좋다는 생각만 했지, 그에 대한 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이곳에서 설명할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정신 나간 사람 취급당하기 좋다는 것과 또 이곳에서는 정신 나간 이들을 가두어 두고 치료하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더 조심했다.
또 한 가지.
다른 세상에서 온 사실을 안다면 외계인 취급을 할 것이다.
외계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곳에서는 연구의 대상이 된다. 물론 드라마에서나 나온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물론 무섭지는 않지만, 일 년 만에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는 상황에서 도주하는 것은 생리에 안 맞다.
그래서 일단은 남은 기간 동안 최대한 적응하며 버티는 게 맞았다. 하나씩이지만 이곳의 생활에 적응도 해가는 중이고 말이다.
그 덕인지 처음과는 달리 많이 익숙해진 눈길을 보내 주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
다만 걸리는 것은 이 생활을 흩뜨릴 수 있는 요소다.
본의 아니지만 엮인 일에 대해서는 정리를 하는 게 맞았다. 그런 면에서 광호를 옆에 두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탁월한 판단이었다. 눈치도 좋고 상명하복에 잘 적응하는 게 말이다.
물론 승배는…….
옆에만 있어도 잔머리 굴리는 게 들리기는 하지만 못 믿을 놈은 아니고, 박 영감은…….
먹고, 자고, 싸는 것만 문제없으면 별생각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이는 헛먹은 게 아닌지 알아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일단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글을 알아야겠지.”
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지금의 상황에 대처하기로 했다. 다행히 이곳의 글 체계는 단순했다. 익숙한 기호들도 있었다. 다만 내가 아는 문자 체계와는 달랐다.
이곳의 말을 배우면서 하이엔 대륙에 떨어졌던 때와 달리 이곳의 말이 더 배우기 쉽다는 것을 느꼈다. 일부 단어는 신기하게도 가우리에 살 때와 비슷하기도 했다.
그 덕에 빠르게 문자를 익힐 수 있을 듯했다.
난 책을 펼쳤다.
지금은 배워야 할 때다, 우선, 문자부터.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책을 펼친 난 오늘의 진도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철수야, 안녕. 난 영희라고 해. 친구야, 놀러가자.”
“바둑이도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방 안에서 울려오는 묵직한 저음과는 달리 그 내용은 참으로 착했다. 동심을 자극했다.
“…….”
멍한 표정으로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광호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옆에서 승배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까막눈이었더라고요.”
“말은 잘하시던데.”
“뭐, 해외에 오래 있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요?”
“글쎄.”
승배의 말에 광호는 고개를 저었다.
해외에 오래 살다 온 이들의 공통점은 억양이다.
같은 한국말을 써도 억양이 뭔가 부자연스럽다. 하다못해 메이저 리그에서 오래 활동하다 귀국한 야구 선수의 인터뷰를 볼 때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진천에게서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요즘 통신체라던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많은 눈치였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청소년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해석이 필요한 것은 자신도 같았기 때문이다.
* * *
“야, 이 개새끼야!”
콰앙!
명산실업 대표 천성일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크리스털 명패가 날아가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허억! 왜, 왜 그러십니까!”
피하지 않았다면 그 명패에 머리통이 박살 날 뻔했던 NS엔터의 박연우 실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성일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의 말을 반복하며 비틀자 연우는 필사적으로 그를 달랬다.
“제, 제가 실수를 했다면 말씀을 해주셔야 고치지 않겠습니까!”
“뭐? 실수?”
이를 갈던 성일이 털썩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들었다.
연우가 식은땀을 흘리며 두려운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다시 성질이 솟구쳤다.
“이 새끼, 너 때문에…….”
“예?”
“하아, 됐다. 앉아라.”
성질이 솟구쳤던 성일은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쉬며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그러자 연우가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였다. 여전히 두려운 시선은 같았다.
“정말 몰라서 그러냐?”
“죄송합니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말씀을 해주시면 고치겠습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연신 조아리는 연우를 보며 성일은 화를 속으로 삭였다.
‘젠장, 한 놈 때문에 조직 전체가 작살났다는 말을 어떻게 해!’
자존심도 자존심이었지만, 그 일은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었다. 그가 비록 어르신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튼튼하고 굵은 줄을 잡고 있다지만,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놈들은 널렸다.
그 틈을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저번 그 일.”
“호, 혹시 판도라…….”
“그래.”
“예.”
성일이 일전에 자신에게 부탁한 일을 입 밖에 꺼내자 연우는 그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일, 손 떼야겠다.”
“…….”
순간 연우는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천성일이 누군가.
지금은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지만 정치 깡패나 마찬가지인 이가 바로 천성일이었다. 물론 옛날의 정치 깡패는 아니지만 정치인과 연이 닿아 그들이 원하는 일들을 처리해 주고 하는 그런 이였다.
공권력도 폭력배 일제 단속에서는 그들을 빗겨 간다.
물론 그들이 하는 일을 포장한 합법적인 사업도 하기 때문이었지만, 그보다 권력의 비호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런 천성일이 다른 일도 아닌 이제 갓 데뷔한 신인 여그룹을 입방아에 오르게 하는 일조차 못하겠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부아가 치밀었다.
‘받아 처먹을 땐 언제고!’
연우가 고개를 숙이며 이를 악물었다.
이 일을 해주는 대가로 자리 잡아 가는 소속사 배우를 데려다 안겼다. 물론 그 일 덕에 해당 여배우도 광고 등 약간의 일감을 더 얻기는 했지만, 그건 지 잘난 맛에 해준 것이다.
그뿐인가, 막 데뷔를 앞둔 신인 걸그룹 멤버 역시 상납을 받지 않았는가.
그래 놓고 이제 와 한다는 말이 손을 뗀다는 것이었다.
크게 어려운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너 그놈에 대해 얼마나 알아?”
“그놈이라니요?”
“젠장, 역시 모르는구만.”
성일이 허탈한 음성을 흘리자 연우의 뇌리로 스친 인물이 하나 있었다. 판도라의 세인이 캐스팅된 결정적 이유 말이다.
“호, 혹시 그 액션 배우 말입니까? 세인을 가르친다던…….”
“됐고. 난 손 뗀다. 그리 알아.”
“예…….”
연우는 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위기도 그렇고 물어봐야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봐.”
“예, 형님, 죄송했습니다.”
연우의 사과에도 성일은 듣지도 않고 눈을 감아 버렸다. 더는 귀찮다는 의미였다. 결국 연우는 제대로 된 배웅도 받지 못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밖으로 나온 연우는 이를 갈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길, 이게 무슨 꼴이야.”
하지만 이를 가는 것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무거웠다.
건물 안을 오가는 조직원들의 얼굴이 다들 평소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어두웠으며, 일부는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뭔가 사단이 나긴 난 모양이었다.
그가 손을 뗀다고 할 정도라면 확실히 그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어, 난데.”
[예, 실장님.]연우는 스마트폰을 들고 말을 이었다.
“판도라에 붙어 있는 그 남자 좀 알아봐.”
[누구 말씀입니까?]“있잖아, 그 왜! 무술 선생 한다는 놈!”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가신 일은 잘되었습니까?]순간 연우의 성질이 폭발했다.
“이 멍청한 놈아! 잘되었으면 내가 이딴 전화나 하고 앉았겠어! 앙! 눈치도 없어!”
[죄, 죄송합니다!]“에이 씨!”
순간 연우는 그대로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고는 분한 얼굴로 씩씩거렸다.
“직장 생활 한다는 새끼가 눈치가 없어! 눈치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연우는 자신의 차에 올랐다.
연우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성일에게 병원에 입원한 장 부장을 대신해서 그 자리를 맡은 유정우 부장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손 떼시는 겁니까?”
“미쳤어? 그 꼴을 당하고?”
“그럼…….”
성일이 천천히 빠져나가는 차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박 실장, 저놈에게 애들 붙여.”
“알겠습니다.”
“저 새끼도 꼴통이라 지 손으로 뭐라도 하려 하겠지.”
성일의 설명에 유 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지금은 이 사실이 나가면 안 되니까 입단속 철저히 하고, 좀 시간을 두고 살피자고. 괴물 같은 놈이지만, 인간인 이상 칼 안 들어가겠어?”
“알겠습니다. 애들 붙여서 스물네 시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점이 성일의 무서운 점이었다.
당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발끈해서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웅크리고 상대의 허실을 노린다. 그런 신중함이 그가 윗선의 신임을 받는 부분이기도 했다.
“가봐.”
“예.”
유 부장이 밖으로 나가자 창밖을 바라보던 성일이 창틀을 내려치며 이를 악물었다.
“젠장.”
아직도 그날의 공포가 가시지 않았다.
* * *
“자자, 다들 모여 봐!”
전창걸 대표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며 밝은 얼굴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회의실에는 세인과 진천 그리고 광호가 앉아 있었다.
사실 광호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는 없었지만, 진천의 협박과 육의찬 감독이 나름 개성 있는 얼굴이니 나쁘지 않을 것이라며 권유를 했었다. 재미있는 건 광호가 예전 대학을 다닐 때 연극영화학과를 다녔다는 점이다.
그 덕인지 연습 상황을 보러 왔던 총괄 피디인 강찬성의 눈에 뜨인 것이다. 어차피 액션이 필요한 상황에 연기까지 되는 모습을 보고 마침 자리가 비었다며 흔쾌히 조연 자리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물론 몇 마디 없는 조연이지만 말이다.
사실 이런 경우는 참 드물었다. 하지만 이번 사극은 강 피디 역시 의욕적으로 준비하는 작품이었다. 진천의 연기를 보고 난 뒤, 모든 생각이 뒤바뀐 것이다.
뭘 봐도 이전의 액션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진천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 이들만 죽어날 뿐이었지만, 이제는 그들이 없으면 강 피디가 원하는 그림을 맞추기 어렵게 되었다.
그 덕에 광호가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서울 액션 스쿨의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전 대표가 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대본이 나왔다!”
(4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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