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670
43화 진천의 첫 대사
주호의 나이는 서른 후반이었다. 그에 반해 진천은 나이가 잘 짐작이 되지 않는 외모였다. 어리게 보면 서른 후반이지만 전체적으로 풍기는 이미지를 봤을 때 마흔은 넘어 보였다.
분위기라는 게 다르다.
그럼에도 주호는 진천을 보자마자 이 친구 운운을 한 것이다.
물론 선배 연기자로써 그럴 수는 있지만, 이렇게 대놓고 하는 것은 성격상의 이유도 있었다.
좋게 말하면 거침이 없는 것이고 나쁘게 생각한다면 배려가 부족한 것이다. 그리고 정철이 아는 정보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이번 사극은 액션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것은 기분이 나쁘다는 의미였다.
다들 일어서 인사를 하는데 앉아서 팔짱을 끼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기분은 나쁠 수 있다.
그때 주호의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은 강찬성 피디였다.
“아, 이 친구는 고진천 씨라고 이번 액션의 핵이야. 대본 리딩은 처음이지?”
“그렇소.”
진천의 대답에 연기자들은 약간 의외라는 시선을 보내었다.
강 피디에게 말을 놓듯이 대답하는 이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저런 경우는 오래된 연기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진천은 그런 경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다.
강 피디가 그에 대한 기대감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뭐, 처음이지만 다들 알아서 도와 줄 것이라 보고 슬슬 시작해 보지?”
주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지금도 진천은 강 피디가 들어왔음에도 처음과 다른 변화가 없었다. 말도 높이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강 피디에게도 그렇게 하는데 주호가 트집을 잡기에는 좀 애매했다.
이 자리는 연기자들만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강 피디가 이렇게 대하는 것은 다 육의찬 감독이 사전에 떡밥을 뿌렸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진천은 그들에게 있어 스승이라는 점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원래 이쪽에 뜻이 있는 이가 아니라 순수한 무술인이라고 계속 주입했었다.
물론 이런 제반 설명 때문에 강 피디가 그냥 수긍하고 넘어간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강 피디가 쌓아온 커리어가 높았다.
진짜 이유는 강 피디가 진천이 액션 배우들을 굴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실감나는 연기로만 알았다.
고진천이 검을 휘두르면 배우들이 눈을 까뒤집거나 부르르 떨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었다. 그런데 이후 깨어나지 않는 배우들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쓰러진 배우들을 마치 시체라도 옮기듯 옮기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정말 정신을 잃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었다.
강 피디의 넘치는 탐구심이 간접 체험이라는 끔찍한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날 그도 돌아가신 집안 어르신을 보았다.
그 이후 강 피디는 진천을 단순히 배우로써 또는 흔한 무술 인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자신의 길에서 입지를 쌓은 장인으로 대우한 것이다.
실제 액션 배우들의 모습을 담은 데모 영상만 봐도 다큐를 보는 듯한 실감이 났기 때문이었다. 절제되면서도 적절히 화려한 액션.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가 피부에 와 닿았다.
처음 생각 이상으로 멋진 그림이 그려지자 욕심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 욕심을 채워 줄 수 있는 핵심은 바로 진천이었다. 당연히 진천에 대해 그 역시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특별히 모나게 행동하는 것도 아니었고, 대우해 주는 만큼 결과로 보답해 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 연습 할 때도 그의 요구에 맞춰 배우들을 조련해 준 게 그였다.
그 덕에 다른 액션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당연히 그에게는 보배나 다름없었다.
그가 모은 연기자들 역시 나름 내공 있는 배우들이니 단순 성공이 아닌 대박을 꿈꾸는 것은 당연했다.
“아, 제가 늦었지요?”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바로 이 작품의 메인작가인 송가은이었다.
“아, 송 작가. 지금 시작할 거야.”
“예, 그런데 대본 수정한 거 죽이던데?”
“아, 그러세요?”
“아주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아.”
강 피디의 연이은 칭찬에 가은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진천을 향했다.
마찬가지로 강 피디 역시 그녀 칭찬을 하면서 진천에게 시선을 향했다.
사실 작품 전체에서 진천의 비중은 큰 편은 아니었다.
그 차지하는 분량도 초반에만 나오는 역할이었다. 이미 다른 배역이 다 캐스팅된 상태이기도 했고, 또 연기와 액션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배역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초반 드라마에서 나름 시선을 잡아끌어 줄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 줄 수 있는 배역이었다.
그것을 가은이 진천을 보고나서 손을 대었다.
나름 시선을 잡아 끌어줄 수 있는 장면에서, 엄청난 임팩트를 만들 수 있는 장면으로.
그녀가 이런 수정안을 계획하고 말했을 때 강 피디는 오히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진천을 보고 생각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나온 수정안 역시 충분히 만족할 만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강 피디와 가은의 시선이 진천에게 잠시 흐른 것을 본 정철이 고개를 갸웃했다.
‘수정 대본……. 저 사람 때문인가?’
그뿐 아니라 주호 역시 피디와 작가의 시선이 진천에게 머물렀던 것을 보았다.
‘뭐야, 대체.’
첫 인상 때문인지 주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는 사이 인사가 오가고 각자 맡은 배역에 대한 이야기와 만담이 오갔다. 그리고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아…….’
세인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비록 대본 리딩이라지만 실제를 방불케 했다. 내공이라는 게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듯했다.
그때 진천의 차례가 되었다.
그러자 세인은 더욱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하는 것이 아니지만 오히려 더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속으로 응원을 보내었다.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
주호가 슬쩍 진천을 바라보았다.
주호의 옆에 있던 배우가 진천에게 가는 대사를 읊었다.
“막아봐야 소용없는 걸 모를 텐데.”
진천에게서는 대답이 없다. 리딩을 잊은 건 아니다. 없는 게 맞았다. 여전히 진천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주호의 대사가 이어졌다.
“이대로 개먹이가 되는 걸 택하겠다는 말인가?”
묵직하게 내리깔리는 음성에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대본 리딩이라지만 지금의 대사는 정말로 잘 살렸다고 판단했다.
‘어디 해보라고.’
주호가 살짝 조소를 머금으며 진천을 노려보았다.
그때 감고 있던 진천의 눈이 떠졌다.
“끝인가.”
“…….”
순간 진천과 눈이 마주쳤던 주호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뭔가 화가 나서 표정이 굳은 게 아니다.
마주친 눈빛…….
무덤덤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달랐다.
모골이 송연했다.
주호의 얼굴은 굳은 게 아니라 얼어붙은 것이다. 그렇게 얼어 있는 주호와 시선을 맞추며 진천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여 나갔다.
“유언은.”
움찔!
순간 주호는 몸을 살짝 떨었다.
단 두 마디.
“끝인가, 유언은.”
그리 크지도 않은 음성이었지만 그 단 두 마디에 몸이 얼어붙고 심장이 멈추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그 담담해 보이는 눈동자 안에서부터 시작되어 오는 이 감정은…….
살기였다.
그때 대사 하나가 터져 나왔다.
“쳐라!”
순간 얼어붙었던 몸이 정상을 찾았고,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뛰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정신은 아니었다. 고개를 천천히 내린 주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단순한 대본 리딩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짧은 순간 헤어 나올 수 없는 공포를 겪은 것이다.
그때 덜덜 떨리는 양손의 가운데로 그의 시선이 옮겨졌다.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씨팔!’
떨리던 양손의 가운데. 정확히 말해 하얀 면바지의 중심부가 살짝 젖어 있었다.
지린 것이다.
“후우우우.”
“왜 그래, 정철이?”
대본 리딩을 이어가던 중 나온 숨소리에 대본을 보던 강 피디가 고개를 들며 정철을 바라보았다. 숨을 깊게 내뱉은 이는 바로 정철이었다. 그는 얼굴이 불어진 게 어딘가가 불편해 보였다.
“하아!”
“아니, 송 작가는 왜?”
강 피디의 옆에서도 숨을 턱 놓는 음성이 울려왔다. 그러자 강 피디가 그녀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약간 발그스름한 게 뭔가 안 좋은 표정이었다.
“이거 참. 긴장한 거야?”
“아, 아니, 예. 좀 그런가 봐요.”
아니라고 답하려던 가은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강 피디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푸하하! 긴장은, 자 잠시 쉬었다 갑시다! 그리고 고진천 씨 느낌 안 나쁘니 그렇게만 해줘요.”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진천에게 한마디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정철 씨, 어디 안 좋아?”
“아, 아닙니다. 하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넘긴 정철의 표정은 다시 굳어졌다.
‘이 무슨…….’
조금 전 그가 숨을 내뱉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잠시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철의 시선이 주호를 향했다.
미세하지만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별일 아니라는 듯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입술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 그건 정말이지…….’
정철이 고개를 돌려 진천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있었다. 할 일은 끝났다는 듯. 아니, 이 시간이 귀찮다는 느낌이 역력했다. 그러나 조금 전 정철에게 대사를 던질 때 그 눈동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 역시 진천이 궁금했다.
아무리 뛰어난 액션을 펼칠 수 있다지만 나름 비중 있는 조연자리를 어떻게 꿰어 찼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는 강 피디는 아무리 액션이 좋다고 해도 대본을 수정해 가면서까지 배우를 기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대사를 하는 순서가 되자 자신도 모르게 그를 집중해서 보았다. 그때 그의 눈동자를 본 것이다. 정말이지, 말만으로도 공포가 느껴졌다. 단지 그런 공포가 아니었다.
압도적 공포.
나른하면서도 오만한, 그러면서도 상대방에게 짓눌리는 두려움을 주는 눈빛이었다. 순간 정철은 호흡을 빼앗겨 버렸다.
왠지 답답하다고 느꼈을 때에는 이미 그는 스스로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다급하게 숨을 내쉬었던 것이다.
정철은 다시 가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진천을 향하고 있었다.
아마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예상과는 달랐다. 자신의 반응이 놀라움이었다면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설렘이었다.
‘알고 있었다는 건가?’
왠지 그런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어엇!”
그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터져 나온 놀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에헤이! 이게 뭐야?”
주호가 반쯤 쏟은 물병을 들고 씁쓰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기 휴지요!”
누군가가 휴지를 뭉텅이로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주호가 일어서서 바지를 닦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참 민망한 데가 젖었네!”
“하핫! 다 큰 나이에 오줌이라도 싼 것처럼 그게 뭐냐!”
“하, 하하하! 이거 위치가 영 그렇네요!”
선배 배우인 배동우의 짓궂은 농담에 주호가 뒷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그때 정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간 말을 더듬은 모습이 주호답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지렸나?’
옆에서 본 것만으로도 숨이 멎는 느낌이었다.
만약 그 시선을 정면으로 봤다면…… 왠지 지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정철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아니겠지.’
나름 이 바닥에서 파이터로 소문난 이가 바로 주호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대사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뭔가 잊기 위한 것처럼.
(44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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