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671
44화 뒤풀이
“하아.”
밖으로 바람을 쐬러 나온 가은은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조금은 가슴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녀 역시 진천이 대사를 할 때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마치 맹수의 눈빛에 사로잡힌 초식 동물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가 아니야.’
가은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안에 보인 흉포함은 연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목소리만으로 따진다면 그럴 듯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눈빛과 함께 듣게 되니 달랐다.
리얼하다라는 말로도 표현 못할 사실감이 전율을 일으켰다.
이는 배우가 진정으로 연기를 잘해서 오는 전율과는 달랐다. 정말로 전장에서 적을 향한 포식자에게서 느껴질 법한 느낌이 바로 이것이었다.
“진짜 뭐지?”
처음에는 단순 무술가로 알았지만, 나름 이름난 무술가들을 찾아다녀 본 그녀로서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런저런 무술을 다양하게 익혀 왔고, 또 즐겨왔다. 게다가 작품들을 준비하면서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 무술가 혹은 무도가와 만남을 가져왔었다.
그중에는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 이들도 있었다.
그 많은 경험 중에서도 저런 타입은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살인을 저지른 이들이나 흉악한 폭력을 저지른 이들과도 달랐다.
그것을 아는 이유는 마찬가지로 그런 이들을 접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직접 만난 적은 적었지만, 경찰 쪽의 백을 통해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혀 볼 수 없었던 그런 타입이었다.
진천이라는 남자는.
“아, 하나 있구나.”
그녀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렸다가 피식 웃음 지었다. 왜냐면 그 하나는 그녀의 상상 속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공을 들여 준비하던 작품의 인물이다.
“광개토호태왕.”
그녀가 상상하는 인물인 광개토 대왕의 이미지와 지금 진천의 이미지가 같았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 아는 위대한 정복 군주 광개토 대왕이라면 아마도 저러지 않을까 생각했다.
웃음을 짓고 난 그녀는 다시 안으로 향했다.
아직 대본 리딩은 끝나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연기자들이 일어서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첫 대본 리딩이 별 탈 없이 끝났다. 강 피디 역시 기대 이상으로 나올 것 같다는 느낌이 왔는지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오늘 회식 다들 알지?”
“예.”
“소고기로 쏘는 겁니까?”
“당연하지! 시작이 반이라고 오늘 감이 좋아. 아마 이 작품 역대급이라 불릴 대작이 될 것 같다니까?”
“와하하하!”
강 피디의 자신감 있는 목소리에 연기자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는 기대감도 서려 있었다. 강 피디가 비록 시청률이 사십 퍼센트 이상으로 가는 작품은 없었지만 실패한 작품도 없었다.
최소 이십 퍼센트는 만들어 내는 감독이다. 심지어 사십 퍼센트까지는 아니어도 삼십 퍼센트 중후반까지도 시청률을 심심찮게 만들어 내었다. 당연히 기대가 되지 않으면 거짓말이다.
그런 그가 첫 대본 리딩에서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있어 봐야 단순히 잘될 것 같다 정도. 그런데 스스로 역대급이라 불릴 대작이 될 것 같다는 소리를 했다.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로 들리기보다는 그의 확신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연기자들의 표정 역시 밝았다.
또 한 가지.
그들 역시 대본을 보며 왠지 잘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통 여성 작가가 액션 사극을 쓰는 경우는 없다. 액션이 들어가도 결국은 로맨스가 중심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달랐다.
마치 남자가 쓴 것처럼 선이 굵으면서도 감성적인 부분도 충분히 건드렸다. 적절한 균형을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달달하지는 않지만 보호 본능을 자극하며 여심을 흔드는 부분이 분명했고, 그러면서도 그려 가는 그림이 커 중년 이상의 팬심도 강하게 자극할 만했다.
이런 느낌을 주는 대본은 드물었다.
물론 개중에 피디와의 궁합이 잘못되어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 지휘봉을 잡은 이는 바로 강찬성 피디와 그의 사단이었다.
믿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회식 자리로 향하는 배우들의 표정은 밝았다.
물론 그중에 섞여 있는 진천 역시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가 가장 원하던 시간이 왔기 때문이었다.
“젠장.”
주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바지도 새로 갈아입었지만 아까의 기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는 그 사건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에도 상처가 남았다.
연예계 쌈짱이라고까지 불리는 그다.
당연히 치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런 기분으로 회식 자리는 앉기 싫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나가는 이라 하고 주연급이라 해도 첫날부터 빠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프다고 핑계를 댈 수도 없지 않은가. 터프하기로 소문난 자신인데 말이다.
“진수야.”
“예! 형님.”
“한의원에 예약 좀 잡아 놔라.”
“예?”
“작품 들어가기 전에 몸 좀 보신해야겠다. 요즘 몸이 많이 허한 것 같다.”
주호의 말에 매니저인 박진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으로 잡겠습니다.”
“그래.”
회식 자리로 향하는 주호를 보며 진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몸이 허해? 엊그제도 스파링 파트너를 떡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
짝!
강찬성 피디가 박수를 치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자! 다들 작품 하나 제대로 만들어 보자고!”
그가 활기차게 말하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다들 미리 따라 놓은 술잔을 들었다.
“대박을 위하여!”
“위하여!”
강 피디의 선창에 모든 연기자들이 일제히 따라 외쳤다. 그러고는 일제히 한 잔씩 걸쳤다.
“걱정 말고 마음껏 먹자고!”
강 피디가 호쾌하게 외쳤다.
띵동!
벨이 울리고 종업원이 밝은 얼굴로 달려왔다. 그러자 그 종업원의 얼굴을 더욱 활짝 펴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인분 더.”
“허…….”
“어, 엄청나다.”
“오 인분을 더?”
다들 진천을 괴물 보듯 했다. 옆에 앉은 세인과 광호만이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을 뿐이었다. 그때 다른 자리에 있던 지정철이 넘어와 말을 걸었다.
“많이 드시나 봐요?”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십니까.”
정철이 자리에 오자 연기자들이 서둘러 자리를 피해 주었다.
지금 진천이 있는 자리는 조연급 중에서도 비교적 지명도가 낮은 이들이 앉아 있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비중 없는 이들이 자리한 곳이었다.
그나마 이중에서 세인과 진천의 비중이 가장 높았지만, 그들은 신인이었다. 세인이 요즘 뜨기 시작한 신인 아이돌이라 하지만 연기 쪽에서는 생짜 신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반대로 정철은 이 작품의 주연뿐만 아니라 주가가 높아 해외에서도 인기가 절정에 달한 한류 배우였다. 당연히 다들 황송해 하거나 긴장하는 게 당연했다.
그 부분에서는 세인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진천은 예외다.
“적당히 먹는 편이지.”
스스럼없이 대하는 진천을 보며 정철이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음.”
정철이 소주병을 들어 올리자 진천이 잔을 들었다. 그리고 정철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여기다 드립니까?”
진천이 들어 올린 것은 밥그릇이었다. 그때 세인이 재빨리 말을 걸었다.
“예! 여기다 주시면 돼요. 아저씨는 잔에다 드세요.”
“아, 세인이라고 했지?”
“네, 선배님!”
“실물이 더 나은데?”
“감사합니다!”
“음반 나오면 사인해서 주라. 자랑 좀 하게.”
“예!”
스스럼없이 대하는 정철의 모습에 세인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모든 스타가 다 거만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편히 대해 주는 이도 드물었다.
진천의 술잔에 술을 채워준 정철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철이 건배를 제의하자 다들 영광이라는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물론 진천 빼고.
“그러지.”
“하하핫!”
정말 잘 봐주겠다는 듯 대답하는 진천을 보고 정철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 크게 웃었다.
건배를 마치고 술을 들이켠 정철에게 진천이 술병을 들었다.
“받지.”
“아, 예.”
진천이 술병을 들어 내밀자 정철이 양손으로 술잔을 받았다.
술을 받아 내려놓자, 진천이 물었다.
“모래부터 합류한다고 들었다.”
“아, 아, 예.”
“강 피디 말로는 배우들에게는 좀 강도를 낮추는 게 어떠냐고 하던데.”
진천의 말에 정철이 너스레를 떨며 말을 했다.
“아닙니다. 제대로 해주십시오. 아무래도 액션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인 만큼 제대로 해야지요. 그리고 이래 봬도 액션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입니다.”
끝에 가서는 자신감마저 보였다. 그런 정철을 보며 광호가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냥 봐줄 때 감사하다고 하지.’
‘어, 어쩌지?’
세인 역시 안절부절 못했다.
자신도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했다가 졸도하고 속옷을 갈아입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갈아입은 이유는 의도치 않은 생리 현상 때문이었다.
그때 창피해하는 그녀에게 이승배가 귀엣말까지 해주었다.
‘기왕이면 두꺼운 속옷이라도 입어라. 난 생리대까지 차고 온다.’
세인은 그때 승배의 말이 단지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진천이 입을 열었다.
“그럼 그리하지.”
“하하! 기대하겠습니다.”
크게 웃는 정철을 보며 광호는 홀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생각했다.
‘뭘 생각하든 상상 그 이상일 거다.’
갑자기 정철이 불쌍해지면서도 진한 동료애가 피어나는 광호였다.
“자자! 다들 일어나자고!”
상석에 있던 강 피디가 몸을 일으키며 외치자 다들 배들이 불렀는지 포만감 넘치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잘 먹었습니다!”
“하핫!”
연기자들이 감사 인사를 하자 강 피디가 손사래를 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계산대로 갔다.
“응?”
강 피디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얼마라고?”
“여기…….”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강 피디에게 카운터에 있던 여주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주문판을 보여 주었다.
“……이거 숫자가 잘못 된 거 같은데.”
예상 금액의 배 가까이 나왔던 것이다.
“저 테이블에서 드신 게 좀 많아서요.”
여주인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쪽에서는 진천과 정철이 웃으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해당 테이블의 주문판을 확인하는 순간 강 피디는 아련했던 추억 하나를 떠올렸다.
‘이게 무슨 반장 선거냐…….’
메뉴 옆에는 숫자를 의미하는 정(正) 자가 무수히 그어져 있었다. 특히 등심과 소주가 막상막하의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멍한 강 피디의 귀로 여주인의 음성이 날아와 꽂혔다.
“푸드 파이터인가? 그런 분 한 분 섭외하셨나 봐요.”
“하, 하하…….”
순간 아까 회식을 할 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말을 걸던 육의찬 감독이 떠올랐다.
“기왕이면 돼지로 가시지요.”
“무슨 소리! 이런 날은 우리 소지!”
“그, 그게 진천 씨가 많이 먹는 편이라서…….”
“허허, 이 친구 걱정도 팔자네.”
그렇게 웃어 넘겼다. 그런데 웃을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웃음이 나왔다.
“허, 허허허, 허허허허!”
“호호호호!”
강 피디와 여주인이 함께 웃었다.
강 피디는 어이없어 웃었고, 여주인은 행복해서 웃었다.
(45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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