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676
49화 진천 분노하다
진천의 대사가 끝나고도 강 피디는 한동안 컷을 외치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촬영 감독들도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롱 테이크로 찍은 것처럼 되었다. 물론 리허설이었지만 말이다.
“이거 아까운데요?”
“그러게.”
“이거 찍었어?”
“일단 찍기는 했는데.”
“맘 같아서는 롱 테이크로 가져가도 좋겠는데.”
스텝들과 촬영 감독들이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의 표정에는 잔뜩 기대감이 서렸다. 강 피디의 장담처럼 역대 급 사극이 나올 수 있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얼이 빠진 것은 그들뿐만 아니었다.
“넋 나가겠어.”
“아! 죄송합니다.”
가은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강 피디가 그녀를 부른 것이다.
“지금은 지금 작품에 집중하자고.”
“예?”
“딴생각했잖아, 송 작가.”
강 피디의 말에 가은이 정곡을 찔린 듯 우물쭈물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강 피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고진천 씨, 보면 뭔가 딱 떠오르는 게 있지?”
그의 질문에 가은이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한 대신 다음 작품도 나랑 하자고.”
“예?”
이제 시작인데 다음 작품을 언급하는 강 피디의 말에 가은이 살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강 피디가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이래 선수끼리.”
“아…….”
“다음 작품 송 작가가 그동안 아껴 왔던 거잖아. 소화할 배우가 없다며 미루고 미룬 거.”
“예…….”
가은이 미소를 지었다. 강 피디가 진천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몇 번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글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들이 많았지.”
“그렇죠, 나름의 성공을 하기는 했지만.”
“그런 면에서 저 친구가 그 배역을 맡는다면 정말이지 엄청난 작품이 나올 거야.”
“예.”
아직 시작도 안 한 상황에서 다음 작품을 이야기한다는 게 웃기는 일이지만 두 사람은 확신에 가까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 피디의 말이 이어졌다.
“이 작품에 대한 기대도 기대지만, 여기서 손발을 맞춘 배우들이 그 작품을 한다고 생각해 봐. 어떻겠어?”
“아…….”
그의 말에 가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말만으로도 묘한 흥분이 그녀를 감쌌다. 그런 그녀를 보며 강 피디가 나직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번 작품처럼 조선 배경의 퓨전 사극도 좋지만, 저 정도라면 송 작가가 준비하는 작품 충분히 나올 수 있어. 내가 생각해도 가슴이 설레는데 안 그래?”
“그러네요.”
“그럼 나랑 만들자. 광개토대왕 일대기.”
“훗.”
강 피디가 한쪽 눈을 깜빡이며 윙크를 보내자 가은이 웃음을 흘렸다. 그녀 역시 강 피디가 감독을 맡아주면 더할 나위 없었다. 그라면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작품은 정말 중요했다.
가은의 눈이 빛났다.
“…….”
“형님, 뭐 보십니까?”
“아니다.”
승배의 부름에 진천은 잠시 가은 쪽을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잘못 들었겠지.’
소란스러움 때문에 잘못 들은 것이라 판단했다. 여기서 그 이름이 튀어나올 리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거 리허설 한 번 했는데도 정말 죽겠네요.”
승배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지금 그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다른 배우들 역시 별말 없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제 단지 리허설 촬영을 한 번 했을 뿐인데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든 게 마치 실 전투처럼 생각하며 움직였다. 그렇게 밀어붙인 것도 진천이었다. 그 덕에 연기하는 배우들은 진이 빠졌다. 이전처럼 대충 합을 맞춰 휘두르면 빙그르르 쓰러지는 그런 영상이 아니었다.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게 이런 것 같았다.
반면에 걱정도 일었다.
문제는 체력이었다. 매번 이렇게 촬영을 하면 긴 촬영 기간 동안 버틸 수 없었다. 물론 진천에게 굴림을 당하며 전체적인 체력도 올라왔지만 말이다.
그중에는 주호도 있었다.
“후욱, 훅.”
“괜찮으십니까, 형님?”
그의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질문을 하자 그제야 주호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괜찮아 보이냐?”
“아뇨.”
매니저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주호의 얼굴은 물이라도 뿌린 듯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주호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 이거야 원.”
주호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다가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다리를 보니 다리 역시 떨림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미치겠네.”
이제 좀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진천이 대사를 뱉는 순간 온몸이 오싹한 게 주저앉을 뻔했다. 이를 악물었지만, 저릿저릿한 기운이 온몸을 훑는 느낌이었다.
일전에 느꼈던 기분 그 이상이었다.
그 시간을 버티고 나니 기묘한 흥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여기서 잘못하면 죽겠구나’라는 느낌과 동시에 손에 칼을 쥔 손에서부터 힘이 느껴졌다. 그쯤 되자 오히려 한 호흡 한 호흡에 집중을 하게 되었다.
옛날 시합 때도 이런 느낌은 없었다.
“전쟁이라…….”
진짜 전쟁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동안 진천이 모두에게 가르친 것은 무술이나 액션이 아니었다. 전투에 임하는 자세였다.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의 마음가짐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정말 전쟁터라도 내보내려는 듯 굴린 것은 당연했다.
그게 지금 꽃을 피운 것이다.
그래서인지 연기라고 생각한 것이 마치 연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이지 죽였습니다. 여태 형님 작품을 제가 좋아했지만, 이번처럼 찌릿찌릿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라니까요?”
“그러냐?”
“예! 이거 정말 대박일 겁니다.”
매니저가 그렇다면 그럴 것이다.
그의 작품을 좋아해서 매니저가 되겠다고 찾아온 이었다. 게다가 보는 눈 또한 있었다. 서당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대박이다.”
주호가 웃었다. 작품이 잘될 것 같아서 웃는 게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진천을 향하고 있었다. 주호는 그를 만난 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 대박일 것이라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전환점은 있다. 그 전환점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주호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씩 굳어진 틀을 깨지 못하고 조금씩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연기 변화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주호 역시 코미디나 다른 쪽을 염두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만남으로써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게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은 것이다.
진천을 만남으로써 왠지 조금 더 깊숙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뭘 해도 그다음이었다.
당분간은 이 하나를 제대로 팔 생각이었다. 완성이란 말은 요원하지만 최소한 만족할 만큼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촬영을 재개하는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곧 슛 들어갑니다!”
“웃차.”
주호가 다시 분장을 하고 그만의 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살기가 치솟았다.
난 누구인가 왜 이러고 있는가.
“이건 내 전쟁이다.”
“컷! 이쪽에서 한 번 더 갈게요!”
눈앞으로 놈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입안은 마르고 쥐고 있는 칼을 휘두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아녀자 하나가 와서 얼굴에 분칠을 한다.
베어 버릴까?
“슛 들어갑니다!”
탁!
순간 칼을 휘두를 뻔했다. 그때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장군!”
“장구운!”
난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누르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말했다.
“멈춰라.”
그러고 나서 하도 쳐다봐서 뚫려 버릴 것 같은 주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간다.
“이건 내 전쟁이다.”
“컷!”
이 짓만 몇 번째인지…….
정말이지, 이젠 다 죽여 버리고 싶다.
“캬! 점점 좋아지는데?”
강 피디가 모니터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한 장면을 찍기 위해서는 여러 각도와 여러 조건으로 찍는다. 대사를 잘 친다 해도 말이다. 진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만족한 영상을 얻었음에도 강 피디는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그 덕에 오만가지 각도를 통해 같은 장면을 계속해서 찍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육의찬 감독이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점점 위험해지는 듯합니다.”
“응? 왜? 자, 봐봐. 이쪽에서 한 번 더 갈까?”
순간 말을 내뱉은 강 피디가 몸을 움찔거렸다.
뭔가 따끔거리는 느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강 피디가 순간 숨이 멎는 느낌을 받았다.
당장에라도 죽일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 사내의 시선이 마주쳐졌기 때문이다.
“히, 히끅!”
“이만하시죠. 배우들도 다 지쳤고…… 이젠 위험합니다.”
진천이란 인간을 잘 아는 의찬의 조언에 강 피디가 딸꾹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히끅. 그럴까?”
“충분히 찍었습니다. 더 이상은 욕심입니다. 더 찍으면 편집할 때 뭘 써야 할지 고민만 될 겁니다.”
“그, 그래. 그럼…… 히끅!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진천의 살기 어린 눈빛에 압도되어 가던 스텝들이 안도의 숨을 쉬며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피해자는 또 있었다.
“허억! 헉!”
아까 흐르던 땀이 완전 다 말라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대신 차갑고 눅눅한 식은땀이 몸을 장악하고 있었다.
진천의 그 살기 어린 시선을 온몸으로 홀로 받아들이던 주호는 그야말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형님, 정말 괜찮으십니까?”
“죽을 거 같다.”
“예?”
“젠장, 강 감독님에게 부탁 좀 해야겠다. 이거 못할 짓이야.”
“그게 무슨…….”
주호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저 눈빛을 계속 받다 보면 멀쩡한 심장도 멈춰 버릴 거다.”
“…….”
매니저는 슬쩍 진천을 봤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가 눈빛으로 사람 잡으려고 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정리하는 가운데 진천이 샤워를 하고 분장을 지우고 나왔다. 그러자 밖에 도착한 전창걸 대표가 환한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 어때, 촬영은 할 만하신가?”
“대, 대표님, 그 말은 좀…….”
순간 옆에서 눈치를 보던 세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말을 꺼냈던 전 대표 역시 진천의 어두운 표정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진천이 그를 스쳐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모조리 베어 버리고 싶더군.”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말에 얼어붙은 전 대표가 세인을 향해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무슨 일이야?’
그러자 세인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귀엣말을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서너 배는 더 많이 장면을 땄어요.’
‘엔지가 난 거야?’
‘아뇨, 감독님이 몰입을 너무 하셔서 그 욕심에 그런 것 같아요.’
‘…….’
‘같은 대사만 수십 번을 하셔서인지 분위기 되게 안 좋아요.’
전 대표는 앞으로 어떻게 촬영장을 데려올지 고민이 깊어졌다.
이건 배우가 아니라 상전이었다.
(50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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