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680
52화 고비파!
사람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 원탁에는 곽주호도 익숙한 이들이었다. 이승배, 세인, 레이니와 제이. 그리고 박노문이었다. 그 자리에 초대된 주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뭐냐, 이 모임은.”
주호의 질문에 승배가 깍지를 끼고 그 위에 턱을 괴면서 눈을 빛냈다.
“고비파라 부릅니다.”
“…….”
주호는 진천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승배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었다. 그러자 승배가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조폭도 아니고 고비파가 뭐냐.”
주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묻자 승배가 훗 하고 웃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고진천의 비밀을 파헤치자’의 줄임말이 바로 고! 비! 파! 이지요.”
“……별.”
주호가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승배야 그렇다 쳐도 레이니나 제이까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물론 세인은 그녀들을 보며 창피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박 영감은…….
원탁 위에 놓인 과자와 음료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영감님은 왜…….”
“진천 형님이 낙하산으로 끌고 온 영감님입니다.”
“아! 그래?”
어쩐지 로드 매니저치고는 나이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진천이 데려왔다고 하니 호감이 저절로 생겼다.
“진천 형님에 대해 잘 아시나 봅니다?”
“뭐, 나야…….”
주호의 질문에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 넣던 박영감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쪼금?”
“쪼금? 형님이 모셔 왔다면서요.”
“그 양반이 누굴 모셔 올 양반인가. 그냥 딸려 온 거지. 살 집도 생기고 먹고살 걱정 없으니 나야 좋고.”
박 영감의 대답에 주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만나셨는데요?”
“공원.”
“공원요?”
주호가 반문하자 박 영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설명이 필요한 대답이었다. 그때 레이니가 끼어들었다.
“같이 노숙하셨대요!”
“노, 노숙?”
“예! 선배님, 이따가 사인 한 장만요!”
“……그래.”
뜬금없는 레이니의 부탁에 주호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이가 끼어들며 말했다.
“전 셀카!”
“악! 나도 그걸로 할 걸!”
“훗!”
“…….”
고비파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부산스러운 조합을 보고 있자니 주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넌 여기 왜 있냐?”
그때 한쪽에서 한숨만 푹푹 쉬어 대고 있던 세인을 향해 주호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정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세인 언니의 생명의 은인이 아저씨걸랑요.”
“응?”
“아, 그게…….”
또다시 끼어든 레이니 덕분에 주호는 그녀를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인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해나갔다.
처음 진천과 만난 당시의 일을.
“…….”
이야기를 듣고 난 주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형님?”
“다들 병원부터 가자꾸나.”
주호의 말에 승배를 비롯한 이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가 말하는 병원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바로 정신병원이었다.
“우리가 오죽했으면 이런 모임을 만들었겠습니까! 이건 어디 가도 이야기 못한다니까요!”
“그럼 그걸 믿으라는 말이냐? 빛이 퍼져 나가고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 촬영용 로봇을 칼로 반 토막 냈다는 걸?”
“잘려진 건 사실이고 또 당시 경황이 없었지만 생각할수록 이상하잖습니까. 다들 우연으로 치부하는데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승배가 나름 항변하자 주호가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당장 세상에 이런 일이라도 제보한다고 나섰겠지. 스태프들도 있었다며? 그 많은 이들 중 하나가 이런 의문 안 가졌겠어?”
주호의 말은 그럴듯했다. 실제로 그런 비슷한 일이 있기도 했다.
“의문을 안 가졌겠습니까?”
“응?”
“강제로 임사 체험 당한 뒤로 고진천의 고 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킨다더라고요.”
승배의 말에 주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가?”
“당시 촬영 감독님이요.”
“…….”
주호가 승배의 눈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는 대화가 없었다. 그렇게 서로의 눈을 응시하던 중 주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친 것 같지는 않은데.”
“안 미쳤다니까요!”
“후우, 그래. 일단 더 들어나 보자.”
주호가 엉덩이를 다시 의자 위로 걸쳤다. 그러자 승배가 그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뭐냐?”
“지금까지 고비파의 성과입니다, 후후후.”
주호가 서류를 집어 들다가 살짝 한숨을 지으며 물었다.
“그 이름부터 좀 어떻게 안 되겠냐?”
“이름이 어때서요! 직관적이고 좋잖아요!”
발끈한 것은 제이였다. 그녀의 반응을 본 주호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네가 지었구나.”
“훗! 이 모임의 창설자가 저예요.”
제이가 히죽거리며 콧대를 세웠다.
“여하간…… 어디보자 관찰 일지라.”
어쨌든 주호는 서류의 제목을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표지를 넘겼다.
“음.”
[이름 : 고진천나이 : 불명. 약 사십 중반대로 추정.
국적 : 불명.]
“응?”
프로필을 읽어 내려가던 주호가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국적이 불명이라고?”
“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국적 불명이라는 말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런 사람이 촬영장에서 촬영을 하고 있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말 그대로예요. 민증도 없으세요.”
“그게 말이 되냐고 출연을 하려면 당연히…….”
“내 신분증이고 돈은 내 계좌로 들어오지.”
한쪽에서 박 영감이 손을 들었다.
“영감님 나이랑 형님 나이차가 있는데…….”
“어차피 지급은 퍼스트로 들어오고 줄 때는 퍼스트에서 지급하니까요.”
“으음.”
말은 맞았다.
“아니, 그래도 대충 어디서 왔는지는 알 거 아니야.”
주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승배가 대답했다.
“알면 고비파가 생겼겠습니까?”
“아니, 국적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계약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게 이유가 있어요.”
그때 세인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로드 매니저가 맹장 수술로 실려 간 뒤부터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럼 그때 강찬성 피디에게 눈에 뜨인 게?”
“네, 그때였어요. 사실 우리 대표님 입장에서는 제가 캐스팅되는 게 중요했으니까요. 또 생명의 은인인 분이지만 과한 요구를 한 적도 없었고, 의문스럽지만 사실 거짓을 말하는 분은 아니잖아요.”
“그야…….”
상황이 그러했다면 이해는 간다.
그래서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강 피디가 찍는 드라마의 캐스팅이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한 숨을 내쉰 주호가 다시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키 : 약 187㎝ 정도몸무게 : 100㎏]
“뭔 몸무게가! 이거 정확한 거 맞아?”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맞습니다. 체육관 전자저울로 잰 거니까요. 신기한 건 그 무게에 지방은 별로 없고 죄다 근육인 데다가 뼈도 완전 통뼙니다.”
“뭐, 이런…….”
주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뒤 다시 읽어 내려갔다.
“뭐, 이딴 걸 다…….”
중간에 ‘미인계 잘못 시도하다가 죽을 뻔함’이라 적힌 부분에서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근력이라 적힌 부분에서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0.5톤까지 움직일 수 있다는 말에 점점 신빙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 외에도 잡다한 게 많았다.
얼마 전까지는 한글도 모르던 사람이라는 부분에서 자동차를 두고 이상한 소리를 한 것까지. 마치 장난스럽게 써놓은 것 같은 내용투성이였다.
맨 뒷장으로 가자 현재까지의 총평이 나와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 고진천은 전쟁 용병 비슷한 일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또한 현대의 사회 규범과 어긋나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그리고 자세한 사실은 모르지만 광호와 사라졌던 날 무슨 일이 있었음에는 분명하나 본인은 물론이고 광호까지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든다.]
“뭐야! 결국 도움되는 게 없잖아!”
“왜 없습니까.”
“이걸 관찰 일지라고…….”
“농담 같은 내용이지만 실제 확인한 내용들입니다. 게다가 전쟁 용병일지도 모른다는 부분은 정말 중요한 데이터입니다.”
주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괜한 시간 낭비를 한 듯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때 승배가 그의 손목을 잡으며 조금 전과는 달리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뭔데.”
“따라오세요.”
승배의 신중해 보이는 표정에 주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를 따라가자 그도 몇 번 와본 적 있는 그의 옥탑방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왜.”
“형님이 안 계실 때 볼 게 있어요.”
“뭐기에…….”
방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철제 캐비닛이 눈에 들어왔다.
주호를 한번 응시한 승배가 캐비닛을 열었다.
끼이익.
뻑뻑한 쇳소리와 함께 캐비닛이 열렸다.
“어떻습니까.”
“이건?”
승배가 캐비닛 안을 보여 주자 주호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얼굴을 확 구겼다.
“이게 뭐 어떻다고…….”
“자세히 보세요.”
캐비닛 안에는 찰갑이 고이 모셔져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쇠로 만든 옷걸이로 걸쳐져 있었다.
잔뜩 기대했다가 본 게 촬영용 의상이었다는 생각에 투덜거리던 주호는 갑주를 만지작거리면서 표정이 변했다.
“이거…….”
묵직했다. 서둘러 이리저리 뒤졌다.
그 역시 액션 전문이고 또 그중에서도 사극을 많이 했었기에 촬영용 의상은 숱하게 접해 봤다. 철편을 연결한 가죽 매듭이라던지 안감 역시 제대로 무두질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한쪽에 놓여 있는 손도끼들…….
“진짜군.”
“예, 촬영용이 아닌 진짭니다.”
주호가 떨리는 손으로 한쪽에 기대어져 있는 도를 들어 올렸다.
묵직한 게 느껴졌다. 천천히 도집에서 도를 뽑아냈다.
스르르릉.
차가운 쇳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소리부터가 달랐다. 날이 없는 가검과도 달랐고 또 자주 접하던 베기용 검과도 달랐다. 심지어 그가 소유하고 있는 진검의 쇳소리와도 달랐다.
“이것도 진짜군.”
“예, 무엇보다 날을 보십시오.”
“으으음.”
주호의 입에서 더욱 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손질된 모습을 보면 안다. 자신의 검이 새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날이 바짝 서 있기는 하지만 사용감이 많아 보였다. 칼을 갈고 또 갈고 간 모습이었다. 장식용이나 그저 때때로 베기를 위해 사용해서 나올 수 없는 사용감이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승배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주호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환두대도를 다시 도집에 넣고서는 천천히…….
품에 안았다.
“역시 형님은…….”
“…….”
“멋진 분이다.”
순간 승배를 비롯한 고비파 인원 전체가 주호에게서 물러섰다. 왠지 소름 돋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주호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그리고 살짝 굳었다.
그 시선을 느낀 승배가 황급히 달려들며 말했다.
“이, 이건 진천 형님 한글 교재…….”
‘처제 미안해, 마누라인줄 알았어 3권’이라 적힌 빨간 서책이었다. 승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영감이 한마디 툭 던졌다.
“그건 승배 거야.”
“…….”
순간 제이와 레이니 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질.”
레이니가 말했고…….
“으흥, 그런 걸로 푸는구나? 가엽다.”
제이가 염장을 질렀다.
(53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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