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726
98화 진천의 퇴장
[한편 이번 화제가 되었던 격투기 세계챔피언 트렌든 선수와 고진천 씨와의 시합에 해외도박이 성행했었는데요, 이와 관련돼서 해외 브로커가 중간에 잠적을…….]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트렌든의 앞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유 노우 라면? 포크 찹찹찹 맛 굿!”
딱해 보였는지 박 영감이 라면을 하나 끓여 와 트렌든 앞에 밀어 주었다. 트렌든은 지금 발목이 드러나는 파란색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깨어난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샤워와 실례를 해버린 바지를 갈아입는 것이었다.
대검까지 들고 설친 것치고는 꽤 얌전한 모습이었다.
꾸불꾸불한 면을 보고 트렌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치밀어 오르던 살기도 이젠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깨져도 이렇게 깨지면 더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진천이 컴퓨터 앞에서 뭘 하고 있었다. 대충 보니 옛날에 유행하던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퍼퍼펑!
그나마 뜨다가 추락했는지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모습이 당장에라도 컴퓨터를 후려칠 기세였다.
“형님! 이번에도 모니터 박살 내시면 안 됩니다!”
누군가가 만류하는 모습을 보니 실제로 부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느낌이라는 게 있다. 멍한 그를 향해 박 영감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런, 어서 먹으라니까? 불어! 유노 디스 라면 매니매니 체인지!”
“…….”
꼬르륵.
그러고 보니 뱃속에서 소리가 울려왔다. 트렌든은 라면을 포크로 휘휘 말아 한입 넣었다. 매웠다. 그래서인지 눈물이 났다.
라면을 다 먹고 난 트렌든이 진천과 독대를 했다.
“약속 지켜라.”
“…….”
진천의 말에 트렌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언제 줄 건가.”
“조만간 정리해 드리리다.”
“혹시 비행장도 줄 수 있나?”
“…….”
“혹시나 싶어 물어본 거다.”
트렌든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인간에게 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트렌든이 이를 악물고 질문을 던졌다.
“특수부대 출신인가? 북한? 아니, 여기는 남쪽이니 한국이겠군.”
“특수부대라면 일단은 아니지. 대신 그런 놈들을 거느리고는 있지. 구라쟁이라든지…….”
뭔가 생략된 것 같은 설명이었지만, 역시 예상했던 대로 단순한 배우가 아니었다. 특수부대를 거느린다는 말을 했으니 말이다.
“비행기는 왜 필요한 거지?”
트렌든은 궁금했다. 이전부터 비행기에 과한 집착을 보이는 모습이 의아했던 것이다. 그러자 진천이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늘을 나는 것이야 리셀을 시키면 되지만, 역시 편안함이라든지 보이는 모습이 과히 안 좋거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어쨌든 약속 지켜라. 안 그러면 내가 간다.”
덤덤하게 던져 온 말이었지만 트렌든은 그 말속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약속 지킨다.”
“좋군. 가보도록.”
그 말을 끝으로 진천이 일어섰다.
문이 열리자 대화가 궁금했는지 세 남자가 몰려 있었다. 그들은 진천을 향해 뭐라 뭐라 말을 걸어왔다. 물론 트렌든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순간 이 참담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비행기 준다던가?”
“진짜 준대요?”
박 영감과 승배의 질문에 진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오! 역시! 그런데 형님, 언제부터 영어를 그렇게 했어요?”
“해외에서 왔다니까 할 수 있겠지.”
승배의 질문에 박 영감이 핀잔을 주며 대꾸했다. 그들은 진천이 용병을 하다가 한국에 온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과 달리 광호는 복잡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진 자의 답답함이었다.
* * *
벌컥!
문이 열리며 테디가 비명과 같은 외침을 터트렸다.
“트렌든!”
“시끄럽게 굴지 마.”
테디가 병원에서 사라진 트렌든을 다시 찾은 곳은 바로 그의 호텔 방이었다.
“대체 어디에 있다가…….”
질문을 하려던 테디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가 버렸다. 옷을 갈아입는 트렌든의 온몸에 난 상처 때문이었다. 몸뿐만이 아니었다. 얼굴 역시 멍투성이였다. 마치 나가서 맞고 들어온 것 같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묻지 마.”
물어도 화구통에 맞아 이 꼴이 됐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로서도 지우고 싶은 기억일 뿐이었다.
트렌든의 말에 테디가 입을 다물었다. 물어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고, 또 그의 심정을 생각해서였기도 했다.
“일단 스케줄은 취소했어.”
“그래.”
십여 개나 되던 스케줄이 전면 취소되었다. 고진천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한 상황에서 사인회라든지 하하호호 웃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 상태를 보니 출연이 가능한 모습도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자고.”
“아니.”
“응?”
“일단 좀 더 있어야겠어.”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는 트렌든을 보며 테디가 불안감을 지우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
“생각 좀 하고.”
“무슨 생각.”
“나 좀 쉬어야겠어.”
트렌든의 말에 테디는 한숨을 내쉬고는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트렌든은 침대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벌떡 일어서 앉았다.
“허억! 허억! 허억!”
그 짧은 시간에 마치 악몽이라도 꾼 모습이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숨은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빌어먹을, 젠장!”
눈을 감으니 곧바로 진천의 잔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칼이 휘둘러지고 목이 떨어져 나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트렌든이 머리를 감싸며 웅얼거렸다.
“빌어먹을.”
* * *
트렌든과의 특별전에서 고진천의 승리로 드라마 화인의 인기는 절정을 맞이했다. 이제 진천의 마지막 장면만을 남겨 둔 상황이었다. 그 관심은 자연 뜨거웠고, 시청률은 미친 듯이 솟구치고 있어 방송 관계자들의 입은 연일 찢어지고 있었다.
다만 진천의 퇴장 후 극을 이끌어야 하는 연기자들은 과중되는 부담에 하루하루 긴장을 해야만 했다.
처음 예상했던 이상의 충격을 준 게 이 부담의 원인이었다.
극 내에서도 진천은 최강이었고 극 외에서도 최강임을 입증했다. 그 때문에 시청자들의 극에 대한 몰입감은 역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벌써부터 진천이 빠진 화인을 어떻게 보냐는 성토가 이어질 정도였다.
진천의 퇴장을 결사반대하는 이들이 모임을 만들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연기자들의 부담이 커지는 것은 물론 강찬성 피디 역시 고민이 안 될 수 없었다.
용두사미.
그 어떤 감독도 달가워하지 않을 수식어다.
자칫 연기자들이 온 힘을 기울이더라도 이런 욕을 들어먹기 딱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끙.”
“어쩌죠? 너무 떴어요.”
“다른 애들이 못하기라도 하면 닦달이라도 하겠는데…….”
“이 이상 어떻게 합니까.”
“그렇지.”
이미 연기자들은 최고라 할 만큼의 능력을 끌어내고 있었다.
연출자의 걱정 이상으로 연기자들 역시 먹혀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각자가 할 수 있는 한 온 힘을 다하였다.
“상황이 아주 좋은 게 탈이 난 상황일 뿐입니다.”
“캐릭터가 워낙에 잘 맞아떨어진 거지요.”
강 피디를 위로하듯 한마디씩 던졌다. 그러다 한 명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건 뭐 이겨도 문제네.”
“적당히 이겼어야지.”
“그렇지. 괴물은 괴물이야. 예능 피디님들이 죽는소리 할 때 알아봤어야 했어.”
다들 푸념 아닌 푸념을 내뱉었다. 그때 생각의 정리가 끝난 강 피디가 손바닥을 짝 하니 치며 시선을 모았다.
“자! 일단 오늘 방송 지켜보고 상황 봐서 추가 삽입이나 촬영 보충 조금 더 하는 것으로 가자.”
“추가 삽입이야 회상 신 같은 걸로 때운다 치지만 보충을 합니까?”
“정 안 되면 스치는 장면이라도 넣어야지.”
“시나리오는 이미 다 나왔는데…….”
기존의 쪽대본과는 달리 이번 촬영이 여유로운 점 중 하나는 대본이 완결까지 다 나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 피디가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상황 봐서 내용 수정하는 거 한두 번 해봐? 게다가 이런 고민 우리만 할 거 같아?”
강 피디의 마지막 말에 스태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송가은 작가 역시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은 즐기죠? 신기록 달성을 눈앞에 뒀는데.”
“그래. 채널이 많아지면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역대 최고 기록도 깨봐야지.”
90년대에 달성되었던 첫사랑이라는 드라마의 시청률이 바로 65.8%이었다. 그 이후 많은 드라마가 나오고 신드롬을 일으켰지만, 이후 방송 채널이 많아지고 또 놀거리가 다양해지다 보니 그 기록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나마 그 언저리라도 가보았던 드라마는 2000년 초반대의 작품들이 전부였다.
그랬는데 지금 그 불멸의 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상황도 좋았다. 진천의 승리 직후 그 여운이 가시기 전에 공교롭게도 마지막 촬영분이 나온다. 전반부 최대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면서 주인공들의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는 지점.
“그럼 다들 본방사수 하자고.”
고민은 접고 그 역사적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텔레비전 앞으로 모였다. 그리고 긴장된 가운데 화인의 타이틀 곡이 흘러나왔다.
* * *
“…….”
송가은 작가의 눈 밑이 거멓게 변해 있었다.
그간은 진천의 승부 때문에 잠을 못 이루었고, 그의 승리 이후에는 드라마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강렬해도 적당히 강렬해야 하는데 진천은 그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드라마는 점점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역모가 벌어지는 가운데 무인들이 왕을 사로잡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그 가운데 진천이 나타났다.
첫 방에서 나왔던 그 충격적인 장면 이후 회상으로 돌아갔던 것이 드디어 다시 연결되는 시점이었다. 진천이 환도 한 자루를 들고 압도적으로 역모에 가담한 이들의 사병들을 베어 넘겼다.
부수고 비틀고 베었다. 그 거침없는 모습을 보며 가은의 얼굴은 다시 몽롱해졌다.
그녀 역시 진천의 승리를 보고 난 뒤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흥분했었다. 격투기 마니아인데다가 또 진천이란 배우의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녀에게 이 장면은 본인이 쓰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몰입할 정도였다.
피가 뿌려진다. 수많은 인간 군상이 뜨거운 기름에 몸을 날리는 부나방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진천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내 화광은 점점 강렬해졌다. 그 가운데 모두가 질린 얼굴로 진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곽주호가 입을 열었다.
[이런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지는 않소.] […….]주호의 말에 진천은 칼질을 멈추고 대답 대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질린 얼굴로 무기를 자신에게 겨누고 있는 곽주호의 수하들을 본 진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쯤 하면 됐겠지.] [중히 쓸 것이오.] [날 쓰는 이는 하나면 족하지.]명백한 거절의 말을 뱉는 진천에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압도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이 반란을 주도한 곽주호가 다시 나서며 말을 붙였다.
[마지막 권유요.] […….]그를 지그시 바라본 진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가 말했다.
[맹수는 아무 곳에나 몸을 누이지 않지.]그 말을 남긴 진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불타고 있던 담벼락이 무너졌다. 그 안으로 진천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 어딜 가오!]잠시 걸음을 멈춘 진천이 고개를 살짝 틀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뜨듯하니 묫자리치고는 좋지 아니한가.]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그 누구도 칼을 들어 겨누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저 멍하니 시대의 절대 강자가 스스로가 정한 자신의 무덤을 향해 가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화광이 이는 건물 안으로 진천이 천천히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무인 중 하나가 분한 얼굴로 주호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대로 보냅니까?] [아니 보내면 그대가 벨 것인가?]주호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을 뱉자 말을 걸어왔던 무인이 얼굴을 붉히며 한 걸음 물러섰다.
콰르르릉!
불에 대들보가 다 탔는지 건물이 폭삭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무인 하나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왕은 저 불타는 건물 안에 있다. 주호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다. 결국 우리는 넘지 못했음이야.]그의 말에 무인들이 비통한 얼굴을 했다. 그때 주호가 야망에 물들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잊지 마라. 우리의 목적은 조선 최강을 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왕이라는 것을]전투에 패했다. 하지만 목적은 달성했다. 주호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콰르르르!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최강이라 불리던 이는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패배감을 남기고 그렇게 사라졌다.
“하아…….”
드라마를 지켜보던 가은의 입에서 뭔가 묶여 있던 것 같은 음성이 탁 하니 풀어져 나왔다. 그런 그녀의 동공으로 자막이 올라가는 모습이 비쳐졌다.
(99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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