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752
124화 흔적을 따라 걷다
“…….”
송가은의 보조 작가인 주민경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그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안 하던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꺄악! 살쪘잖아!”
민경이 보기에는 그다지 찐 것 같지 않았다. 사실 같은 여자가 봐도 가은의 몸매는 부러울 지경이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는 요즘 트렌드에 부합되었다.
그럼에도 살이 쪘다는 둥의 말을 하며 평소 운동을 멀리하며 몸매 관리를 포기한 민경에게 대못을 박아대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그녀의 행동이었다. 평소 좀 잘 꾸미고 다니라 할 때에는 대충 하고 다니던 그녀가 무슨 바람이 일어서 저러고 허둥대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선생님, 데이트 가세요?”
“데, 데이트라니! 그건 아니고, 음, 뭐랄까…….”
“…….”
견적이 나왔다. 데이트 비스무리한 것. 대충 누가 상대인지는 알 것 같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민경이 고개를 돌려보자 사방 벽에 도배되다시피 한 포스터들이 있었다.
심지어 어디서 가져왔는지 일대일 비율로 만든 등신대까지 서 있었다.
그 포스터와 등신대의 인물은 모두 한 명이었다.
바로 고진천.
“고진천 씨 만나세요?”
“어, 어떻게 알았어!”
민경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걸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솔직히 요즘 여자들 사이에서 진천은 뜨거운 감자다. 이십 대에게는 물론이고 그 이상의 연령대에도 제대로 된 남자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선생님 살 안 쪘어요.”
“아, 아니야. 이것 봐. 옷이 딱 붙어!”
“그거 잘못 빨아서 줄어든 거잖아요. 세탁기에 막 돌려서.”
“그, 그런가?”
“네.”
“그, 그럼 다른 걸 입어야겠다.”
“바쁘신 거 아니에요?”
또다시 처음부터 옷을 고르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이 되었다.
“아냐. 아직 세 시간 남았어!”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저 짓을 했다. 그 시간이 약 세 시간. 그럼 준비를 여섯 시간 전부터 했다는 말이 된다. 저 정도면 중증인 것이다. 민경은 한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일단 이 부산스러움을 없애려면 차라리 인형놀이를 한번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송가은은 주민경의 도움을 받아 옷을 차려입었다. 그리고 머리와 메이크업은 미용실을 이용했다. 그 역시 민경의 조언 덕이었다. 만질수록 견적이 안 나오는 그녀의 행태에 아예 미용실을 찾아가라고 한 것이었다.
다행히 하는 일이 방송가 일인지라 꽤 잘 아는 미용실이 많았고, 그중 한 곳을 선택해 말끔하게 변신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잠시 후, 테라스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그녀의 시선에 고진천을 태운 차가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진천이 몸을 드러내자 가은의 얼굴 위로 홍조가 띠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떨떠름한 표정이 배어 나왔다.
그의 뒤로 계웅삼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광호까지 나온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내 주제에 데이트는 무슨.’
전날 받은 문자는 간단했다.
-내일 시간 있나? 만나고 싶군.
그래도 아쉬움을 뒤로 밀어내며 진천을 바라보았다. 진천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 그를 보곤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일어섰다.
“여기…….”
진천이 그녀를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보군.”
“……저기.”
당황하며 말을 걸려는 가은의 옆에서 광호가 진천에게 말을 붙였다.
“일단 앉아서 기다리시지요.”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여자의 변신은 때론 유죄다.
“신기하군.”
진천이 눈을 부릅뜨고 가은을 바라보았다. 그의 강렬한 시선을 받으며 그녀는 쑥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화장만으로 사람이 변하다니.”
“펴, 평소에 안 하고 다니니…….”
“보기 좋군.”
쿵!
그녀의 마음속으로 진천의 음성이 울려왔다.
보기 좋군! 보기 좋군! 보기 좋군! 보기 좋군…….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귓가로 진천의 음성이 들려왔다.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네! 어디든지요!”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외쳤다.
그들이 향한 곳은 영화관도, 놀이공원도 아니었다. 아차산이었다.
살짝 풀이 죽은 가은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진천과 웅삼은 마치 못이라도 박힌 듯 멀거니 고개를 들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입구 기둥에 매어져 있는 깃발이 있었다.
고구려 대장간 마을이라 씌어 있는 깃발이었다.
정확히는 그 깃발의 문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삼족오 문양 말이다.
뭔가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것을 느낀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뭐지.’
뭔가 형용할 수 없다는 의미가 맞았다. 바로 지금 그들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감정은 말이다.
“가지.”
“예.”
진천의 말에 일행이 발걸음을 옮겼다.
내부로 들어가자 고구려와 관련된 벽화의 사진과 더불어 아차산 유적지에 대한 발굴 과정을 담은 사진 등이 나왔다. 그리고 해당 유적지의 역사적 시기에 대한 내용도 함께였다.
진천과 일행의 발걸음이 또다시 멈추었다. ‘아차산 고구려 병사의 하루’라 적힌 커다란 판넬 아래에서였다.
그 판넬에는 고구려 병사가 칼을 차고 서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당시 아차산 보루의 형태를 복원한 미니어처가 유리관에 들어 있었다.
멈췄던 발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옮기자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깔끔하게 복원이 되어 있는 화살 병장기…….
진천의 손이 유리관을 매만졌다. 웅삼은 그 옆에서 굳어진 얼굴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가은의 시선이 진천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마치 오랜 친우를 어루만진다면 저런 느낌이 날까?
그 손길만으로도 먹먹함이 느껴졌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진천의 입술이 열렸다.
“이곳에서의 우리 시간은 과거의 흘러간 흔적일 뿐인가.”
“차라리 다른 세상으로 알았던 때가 나았습니다.”
진천이 말하고 웅삼이 답했다. 가은은 이해할 수 없는 대화였지만 뭔가 짙은 회한이 느껴졌다.
“그저 잊힌 시간의 조각.”
“노인네들 옛이야기 속에서도 남아 있지 않을 까마득한 이야기일 뿐이죠.”
“그렇지. 지금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하등 중요하지 않을.”
“…….”
무겁고 무거웠다.
대화를 나누는 진천과 웅삼의 표정은 덤덤할 뿐이었지만 목소리 하나하나에는 무거움이 느껴졌다.
그냥 슬펐다.
왜인지 마치 세상에서 동떨어진 사람들처럼 보였었다.
이질적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이곳에서만큼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게 더 이상했다.
외유를 마치고 서울로 향하고 있는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아차산 유적지를 돌고 또다시 다른 고구려 관련 유적지를 돌았다. 가은이 고구려 관련 자료를 수집할 때 현장 조사차 갔던 곳들을 함께 돈 것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돌고 오는 지금 가은의 가슴에는 뭔가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기대했던 데이트도 아니었지만 그보다 뭔가 다른 미묘한 것이 남은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
그것이 더욱 답답함을 남겨 주었다.
문득 돌아오던 중 진천이 질문을 던졌다.
“왜 그 대본을 적었지.”
시나리오 이야기다.
“아마 대한민국 사람들 가슴속에서 가장 영광된 기억 중 하나이기 때문일 거예요.”
“영광된 기억인가.”
“예. 승리로 이어진 투쟁의 시간이니까요.”
“그런가.”
진천이 눈을 감았다. 그런 진천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고구려에 관해서는 단절된 역사라 해야 맞을 거예요. 그 시간을 증명해 주어야 할 서적들이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까요.”
“패배한 자의 역사는 남지 않는다. 그게 현실이지.”
눈을 감고 있던 진천이 한마디 툭 던졌다.
뭔가 마음속으로 발끈하는 감정이 일었다. 그렇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을 던진 진천의 모습을 보노라면 비꼬기 위해 던진 말이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 말이 맞기도 했다. 그때의 역사는 승자들로 인해 불태워졌다. 이후의 정권을 잡은 이들의 손에 의해 불태워지기도 했다. 새로운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 시대를 알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진천이 눈을 떴다.
“난 패배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이 빛나는 것만 같았다. 그때 웅삼이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의 역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그래.”
“그런데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그건 리셀이 알겠지. 그리고 어떻게 변할지도.”
“그건…… 그렇겠지요.”
또다시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가은이 광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라면 뭔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을 붙이지는 못했다. 그는 오늘 하루 종일 입을 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천과 웅삼보다도 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바로 광호이기도 했다.
진천이 또다시 물었다.
“이 나라 대한민국이 기억하는 고구려는 어떤 것이지.”
“광활한 대지를 질주하는 기상.”
가은이 짧게 대답했다.
“그런가.”
“네.”
진천이 눈을 감았다.
길고긴 투쟁의 시간이었다.
태어나 세상을 인지했을 때부터 칼을 잡았다. 남들이 글을 읽을 때 말을 타며 활을 쏘았고, 또래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할 때 그는 전쟁을 했다.
세상을 알 때에는 비정함을 함께 알았고, 또 기득권자들의 탐욕에 야인으로 떠돌았다. 때론 왜 그때 세상을 바꾸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도 종종 있었다.
아마도 같은 형제끼리 흘려야 할 피와 전쟁이 계속되는 그 시기에 칼을 든다면 내부부터 무너지리라 예상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방관자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남겨 두고 떠나온 세상은 이렇게 변했다.
진천의 입술이 열렸다.
“스스로 망하고 다시 세워지고 또 망하고. 또다시 이름을 이어 가고 또다시 스스로 망하고, 옛 이름을 가져오고. 결국 쳇바퀴마냥 돌아 또다시 스스로 망하고 나라가 넘어가고.”
주어가 빠진 듯 읊조리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를 아는 이들이라면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비단 대한민국의 역사뿐만이 아니었다. 세계의 역사 속에서도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현상들이다.
진천의 중얼거림이 계속 이어졌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고 발전하고. 백성들이 피 흘려 세운 나라를 결국은 위정자가 말아먹고, 그리하면 또다시 백성이 일어나고. 역사를 반복하며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왠지 모를 분노가 느껴졌다.
마치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부터 솟구치는 분노의 울음소리처럼 들려 왔다.
“스스로 짐을 지고 가야 할 자들이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가.”
진천의 시선은 허공을 향했다.
분노는 그 허공으로 뱉어져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어차피 지옥으로 가는 길, 왜 영광된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가.”
웅삼이 냉소 섞인 음성을 뱉었다.
“세상의 부귀를 누리고자 하는 거지요.”
“어차피 지옥으로 갈 것을.”
또 씁쓸함이 뱉어졌다. 분노와 함께.
“웅삼.”
“예.”
“돌아가면.”
“예.”
“이 순간을 기억해라. 그리고 기록하라. 세상은 시간이 흘러도 반복됨을. 그리고 우리는 변치 않아야 함을. 반복되지 말아야 함을.”
“알겠습니다.”
진천이 부릅뜬 눈으로 외친다.
“투쟁 없이 부귀만을 누리려는 자! 위정자의 가치는 없다. 이는 나에게도 해당되며 나 이후의 시간에도 변치 않아야 할 명제다.”
“명 받드옵니다.”
웅삼의 답변만이 차 안을 울릴 뿐이었다.
(125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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