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930
302화 떠오르는 얼굴
우중만 의원의 얼굴색이 환해졌다.
“그런 거라면 문제없지!”
단순히 소란스러운 사건을 덮기 위해 준비해 놓은 패가 절묘하게 되었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휴전국가다. 아직 전쟁 중이라는 의미다. 물론 그렇다 해서 체감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전쟁은 점점 과거의 역사가 되어 가고 있었고, 그저 질기고 질긴 갈등의 연속이 전부였다. 하지만 때때로 이런 패가 잘 먹힌다.
난데없이 나타난 무장공비를 누가 믿겠느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2002년 벌어진 해전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명산이 동원했던 전직 특수부대 요원들이 미정보부에 의해 총상으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그때도 북한의 소행으로 밀어붙였다.
이 일은 그 연장선상으로 취급이 가능했다.
물론 파 보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대한민국은 미국의 입김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캐스팅 보드는 우 의원이 잡을 것이다.
“하여간 머리 잘 돌아가는 놈들이야. 탈북 과학자 하나 대충 죽이고 그가 원래는 위장탈북 한 거고 미국 쪽의 병기에 관한 정보를 확보해서 북한이 아닌 제3국으로 넘기려 했다? 그러다 다급해진 북한이 무장공비를 파견하여 제거한다라…….”
피식 웃었다. 어디 액션이 주가 되는 영화에서나 먹힐 법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나쁠 것 없었다.
지금 동원된 전직 북한 특수부대원들은 훌륭한 엑스트라다. 마이클의 각본에 적당히 기름칠해 주며 대놓고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억지 각본의 티가 좀 납니다만…….”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우 의원이 피식 웃으며 한참 멀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쯧, 억지 각본 가지고 말이 되게 만드는 거 한두 번 해 보나? 심지어 미국이야. 힘이 있으면 가짜도 진짜로 만들 수 있어.”
우 의원의 말에 보좌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마따나 억지 각본이 가장 많이 돌아다니는 곳이 바로 정치판이다. 덮어놓고 우기고 할퀴고 일단 때리고 보고, 또 자기가 한 말 뒤집고…….
솔직히 지금까지 일을 진행시킨 것도 억지나 다름없지 않은가.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밀이 있다. 마찬가지로 과정이야 어떻든 누구나 탐낼 과실을 얻어 낸다면 알아서 입을 맞춰 줄 사람들은 넘치고도 남았다.
“고진천 이 개새끼.”
우 의원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동안 짐작만 했지만 이제는 그를 테러한 것이 고진천이라는 걸 알았다. 물론 이후의 일들은 솔직히 설명이 불가능한 일들이지만, 그와 연관된 무언가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이건 마이클의 선물이었다. 마이클이 정보부를 통해 알아낸 사실을 우 의원에게 전달해 준 것이다. 과실이 탐나기도 했지만 그로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마이클이 이걸 노렸다는 것쯤은 우 의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았다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어차피 할 일에 원한 하나 추가된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때 문득 우 의원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보좌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일이 벌어진 곳이 어디라고?”
* * *
창문으로 오른 승배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자살 방지를 위해 문이 반쯤만 열리는 구조라 쉽지는 않았지만 어찌어찌 들어갈 수 있었다.
“후우.”
막상 들어오기는 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뭘 어떻게 할 수 있다는 생각도 없었다.
“연회장인가.”
승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깔끔한 테이블이 주욱 늘어져 있었다. 뭔가 예약이라도 잡혀 있었는지 테이블 위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서너 개씩 놓여 있었다.
그때 뭔가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이 해쓱해진 승배가 얼른 테이블 밑으로 숨었다. 다행히 하얀 테이블보가 바닥까지 내려와 있어 몸을 숨기기에는 딱 좋았다.
“에미나이 살결이 곱구만 기래.”
문이 열리고 들려온 음성에 승배의 신경이 곤두섰다.
누가 봐도 출신을 알 수 있는 어투였던 것이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승배의 얼굴이 굳어지게끔 만들었다.
“이거 놓아요!”
승배가 주먹을 꾸욱 쥐었다. 송가은 작가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아무도 없는 연회장에 송가은 작가를 끌고 왔다? 그 의도를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승배는 조심스럽게 테이블보를 들췄다.
송가은은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 세인을 끌고 간 뒤 또 하나가 다가와 자신을 이끌었다. 어떤 의도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했다.
분명 모두 북한 어투를 쓰고 있었고, 또 다른 북한 어투를 쓰는 사람을 죽인 이들이었다. 무언가 목적이 있어 보였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런 상관관계에서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다.
탈북자에 대한 응징.
그런데 그런 이들 치고는 하는 짓이 너무 저렴했다.
물론 상상과 현실은 다르다지만 목적을 이루었으면 탈출을 해야 하는데 이들은 너무 여유로웠다. 이 와중에 여자를 끌고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어쨌든 가은은 일단 못이기는 척 끌려왔다. 물론 거기서 버텨 봐야 답은 없었다. 상대방은 총기류를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방심이라도 유도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싶어 따라온 것이다.
“니보라우. 우리 바쁜 사람들끼리 시간 끌디 말자우.”
사내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총구를 장난치듯 그녀를 향해 까딱거렸다. 막상 총구가 자신을 스치자 가은의 몸이 떨려왔다. 아무리 그녀가 강단이 있고 실전 격투를 즐기는 취미가 있다 하더라도 이건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가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인 줄 알라우. 아래층에 있었으면 본보기로 총알 박혔을 지도 모르니까네.”
“겨, 경찰이 오기전에 움직이시는게 좋을 거 같은데요.”
“내 걱정하는 거이네? 이거이 고맙구만! 클클!”
사내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때 가은이 난방 단추를 하나 푸르며 말을 이었다.
“저 살려 주시는 거죠?”
“기럼!”
단추 하나에 사내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또 하나를 풀렀다.
“약속지키셔야 해요.”
“당연하디.”
후욱 하고 거친 숨을 내뱉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단추 하나를 또 풀러내리자 사내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나머지 단추를 직접 풀렀다. 가은은 그 손길이 너무도 소름끼쳤지만 애써 참았다.
스르륵 하며 그녀의 하얀 블라우스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하얀 레이스가 달린 브래지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사내가 총을 비껴 메고 그녀의 몸을 테이블 위로 밀치며 다가갔다.
가은이 테이블 위로 올라가고 사내가 그녀의 허리띠를 푸르기 위해 손을 대었다. 그때 가은이 그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가슴 쪽으로 끌어올렸다.
사내의 눈과 가은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가은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사내의 손을 잡아 가슴위에 올려놓았다.
“오!”
탄성을 터트리는 순간 테이블 위에 누워있던 가은이 가슴 위에 얹었던 사내의 손을 당기는 것과 동시에 두 다리를 들어 올려 팔 사이에 끼었다.
격투기를 즐겨 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기술.
암바였다.
“허엇!”
놀란 사내가 뒤늦게 반대 팔을 뻗어 버텼다. 하지만 가은은 이를 악 물고 팔을 부러트리겠다는 듯 당겼다.
“이 썅! 죽여 버리갔어!”
연약한 여자의 몸에서 나오는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가은의 괴력에 사내가 당황하면서도 협박을 내뱉는 것을 멈추었다. 하지만 가은은 대답 대신 이를 악물고 팔을 잡아당겼다.
그때 사내가 버티던 반대편 손을 놓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옆구리에 일격을 가했다.
뻐억!
“컥!”
중지를 세워 후려친 일격에 가은의 의도는 허무하게 무산되었다. 비틀린 팔을 빼낸 사내가 안광을 태우며 엎어져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 썅! 다 벗겨서 모가지를 걸어 밖에 널어 놓갔어!”
쿨룩 거리던 가은이 자세를 잡았다. 그때 그녀가 히죽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본 사내가 벌게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웃어? 미친거이디?”
말이 끝나는 순간 사내의 뒤에 걸쳐 매었던 총이 확 당겨졌다. 승배가 나타난 것이었다.
“억!”
사내가 놀라 멈칫한 사이 가은이 몸을 날렸다.
‘급소를 쳐라. 그렇게 해서 상대가 죽을 리 없잖은가.’
무심한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액션스쿨에서 처음 만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눈에 살기가 돌았다.
콰직!
가은의 하이킥이 승배에게 잡아당겨진 사내의 목젖에 작렬했다.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눈이 돌아갔다. 그 사이 승배가 총을 완전히 빼내었다.
“끄어…….”
목젖이 부서졌는지 사내는 목을 잡고 비틀거렸다.
그런 사내에게 달려간 승배가 입을 틀어막고 오금을 쳤다. 사내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무릎을 꿇는 순간 승배는 화들짝 놀라며 사내에게서 떨어졌다.
어느새 달려온 가은이 사내의 머리통을 양손으로 감싸며 그의 안면에 니킥을 날렸던 것이다.
퍽! 와직!
코가 부러지고 피가 튀었다. 입 주변은 부러진 이빨과 살점 그리고 피가 뒤섞여 뭉개져 있었다.
그녀가 손을 놓자 사내가 모로 나자빠졌다.
“후욱! 훅! 훅!”
“…….”
브래지어만 입고 숨을 몰아 내쉬는 독기 어린 가은의 모습을 보며 승배는 괜찮냐는 질문을 하지 못했다.
그사이 사이렌 소리가 울려왔다. 경찰이 온 것이다.
“다행이다.”
승배가 한숨 내쉬며 입을 열자 가은이 고개를 저으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세인 씨도 끌려갔어요.”
“어, 어디로요?”
“제가 끌려오다 보았는데 삼층 입구의 사무실로 갔어요. 그 새끼가 세인 씨와 경계를 서겠다며…….”
“경계는 개뿔!”
“그리고 조금 전 저 사람이 본보기로 몇 죽인다고 했어요. 아마 경찰이 온 이후 움직일 거예요…….”
가은의 말에 승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경찰이 왔다고 좋아 할 일이 아니었다.
* * *
“알았다.”
고진천이 짧은 대답을 하곤 전화를 끊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는 게 근처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이내 경찰차와 경찰 특공대 그리고 군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둘러싸고 있는 건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향해 달리는 그의 옆으로 을지우루와 계웅삼이 다가왔다.
“삼층은 내가 간다. 우루는 일층에서 위험한 놈들 처리하고 웅삼이는…….”
진천이 웅삼을 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진천의 모습에 웅삼의 바이크가 점점 뒤로 처졌다. 뭔가 본능이 진천의 명령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속삭임을 보내오고 있었다.
하지만 말은 행동보다 빨랐다.
“일층 로비로 들어간다.”
“……저기로요?”
앞에는 적. 뒤에는 경찰 및 특공대.
진천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당당하게. 넌 대 가우리의 무장이다.”
“…….”
별로 가슴 뛰지 않는 말이었다. 진천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몸으로 때우라는 의미였다.
우루가 그대로 옆으로 핸들을 꺾었다. 인근 공사장 쪽으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진천이 뒤로 빠지고 웅삼이 울상을 지으며 속도를 높여 나갔다.
목표는 포위망 한가운데. 이 순간 웅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제라르. 만약 그가 있었다면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그에게 밀어 버렸을 건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제엔장!”
웅삼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 * *
빵빵!
“아저씨 안 가요?”
“경찰차가 길을 막나 본데요?”
“아이씨.”
제라르가 인상을 구겼다. 한숨을 내쉰 제라르가 돈을 건넸다.
“어?”
“나머진 팁이요.”
“헉!”
택시 운전사는 화들짝 놀랐다. 그의 손에는 오만 원짜리 한 묶음이 들려 있었다. 어차피 제라르에게는 더 필요 없는 돈이었다. 과감하게 인심을 썼다.
그렇게 달려 나가는 제라르를 바라보며 택시기사는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었다.
* * *
“내래 팬이야. 삼촌 팬.”
세인을 끌고 온 사내가 히죽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민폐녀가 되느니 죽는 게 났다 싶었다. 하지만 사내는 교묘히 다가와서 그녀에게 말했다.
판도라는 하나니까 니가 죽으면 다 죽는 거라고. 그 말에 그녀는 저항을 포기했다.
“이야, 에미나이 살결이 곱구만 기래.”
사내가 창가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서서 그녀의 몸을 쓰다듬었다. 세인의 몸이 부들 떨렸다. 그러나 저항을 할 수는 없었다.
사내가 대검으로 그녀의 옷을 조금씩 잘라내는 것을 느끼며 허망한 시선을 보내었다. 그녀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창밖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헬기소리가 울려왔다.
하지만 이 순간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꺾이기 시작한 태양빛이 그녀의 동공에 들어왔다.
그 빛을 보는 순간 허망한 표정을 지었던 그녀의 입에 작은 미소가 들어왔다.
빛을 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 년 전 빛과 함께 나타난 사람.
고진천.
이 순간 왜 그가 떠오르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바라보던 태양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바다다당!
(303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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