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937
2화 전후처리
시아론 리셀과 마법사들은 눈밑이 거멓게 변해 있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났음에도 제대로 쉬질 못하고 있었다. 바로 사라진 웅삼 때문이었다.
그가 사라진 상황에 대한 분석은 끝났지만 따로 확인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해당 마법진이 여러 번의 시험 가동을 거쳤지만, 실제 사람이 함께 움직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의도한 시험도 아니었고 사고에 의한 상황이기도 했고 말이다.
리셀이 입을 열었다.
“해당 마법진을 활성화할 수 있겠는가.”
“일단 마나가 충전이 되어야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넘어간 인원에게도 여분의 마나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효율은 극악이지만 일단 이곳에서 마나를 송출하는 방법을 써야겠네.”
리셀의 말에 마법사들이 고개를 돌려 한쪽에 쌓여 있는 마나석을 보며 대답했다.
“뭐, 양은 충분하니 상관은 없겠습니다.”
“그렇지.”
리셀도 흐뭇하게 쌓여 있는 마나석을 바라보았다.
살아생전 이렇게 많은 마나석을 본 적도 처음이었고, 또 원 없이 사용해 본 적도 처음이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리라.
“일단 확인 작업부터 시작합시다.”
리셀의 말에 마법사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
침통한 얼굴로 침상위에 누워 있는 그리팔 후작을 바사 론 카말 공왕이 찾아왔다.
그의 뒤에는 익숙한 얼굴이 하나 따라 붙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익숙하다고 하기 보다는 잊지 못할 얼굴이라 해야 맞았다.
바로 대무덕이었다.
어찌 잊겠는가. 배떼기에 창을 꽂아 하늘로 치켜올린 뒤 흔들며 광소하던 그를 말이다.
“많이 나아졌다 들었는데.”
바사 공왕이 피식 웃으며 묻자 그리팔 후작이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거죽의 상처는 나았으나 마음에 난 구멍은 아직 여물지 않았소이다. 아마도 이 모진 숨이 끊어질 때까지도 메워지지 않을 상처요.”
“끙.”
바사 공왕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신음성을 흘렸다. 이 상황에서도 이리저리 문장을 꼬아 말하는 꼴을 보니 저것은 천성인 듯했다. 역시 전장이 아니라 소설을 계속 써야 할 인간이었다.
그때 무덕이 그의 말을 받았다.
“마음의 상처 또한 마음가짐으로 메우는 게 당연한 일. 반대로 그 상처를 헤집는 것 역시 마음가짐이 아니겠소.”
무덕의 대꾸에 그리팔 후작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지난 전투에 보여 준 하늘은 꽤 인상 깊었소이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간다지만 각자 보는 풍경은 다를 것이라고. 어땠소.”
“참혹했소이다.”
“어쩔 수 없지 않겠소. 아무리 같은 하늘을 이고 산다 할지라도 공평치 않은 것이 세상 이치인 것이니 말이오. 누구에게는 영웅이 누구에게는 악마로 비치는 것과 같다 볼 수 있소이다.”
“…….”
바사 공왕은 질린 얼굴로 그리팔 후작과 무덕을 보았다. 생긴 건 다른데 하는 짓은 같다. 심지어 세상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리팔 후작의 얼굴에 생기마저 돌고 있었다.
진 놈이 말이다.
“허허허, 적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 또한 세상 이치 아니겠소.”
“아! 안타깝구려. 몸이 이렇지 아니하면 술이라도 한잔 나눌 수 있을 것을.”
“술이 아니면 또 어떻소? 차를 즐기는 것 또한 운치가 있지 않겠소?”
무덕이 빙긋 웃으며 대꾸하는 모습에 혀를 찬 바사 공왕이 그대로 막사를 나오며 말했다.
“여기 담당!”
“예!”
바사 공왕의 부름에 기사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바사 공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안 쪽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저 안에 차라도 가져다 줘라.”
“차요?”
“그래.”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볼일이 벌써 끝나셨습니까?”
“나랑은 다른 인종들이다.”
“예?”
“쯧, 어서 차나 갖다 줘.”
“아, 예!”
혀를 차며 걸음을 옮기는 바사 공왕의 명령에 기사는 병사를 불러 심부름을 시켰다. 그리고 한쪽에 웃고 있는 연휘가람을 보며 물었다.
“저 양반 원래 저렇게 고리타분한 사람이었소?”
바사 공왕의 질문에 휘가람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데 그동안 쌓인 게 많으셨을 겁니다. 다들 말보다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있는지라 속을 좀 끓이셨으니까 말입니다.”
“거 참.”
허허허! 하하하!
막사 안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 소리에 바사 공왕이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말이다.
***
터그람 왕국 원정군 사령관 그리팔 후작이 사로잡히며 출정 병력이 패하고 대부분 사로잡히자 본진 역시 투항했다. 본진이라고 해 봐야 보급품을 지키기 위한 병력 일부와 뒤늦게 합류한 병력 만여 명이 전부였다.
후퇴를 생각 안 한 것도 아니지만 이미 깊숙이 들어온 탓에 후퇴도 수월치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상황이라면 병력이라도 보존하는 것이 맞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물론 그리팔 후작의 서신 때문이기도 했다.
나름 대무덕과 호탕한 대화를 나누고 결론을 내린 것이기도 했지만 어차피 상황은 이미 끝이 났기에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이에 카말 공국은 빠르게 수복에 나섰다.
이미 무너지고 불타 버린 요새나 영지는 어쩔 수 없다지만 그 이외의 곳은 빠르게 회복을 하고 있었다. 실제 터그람 왕국이 점령했던 지역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팔 후작이 나름 점령지 안정화를 꾀해 착취도 전시치고는 심하지 않았고, 일부 지역에 대해서는 대대적으로 복구 작업이 시행되던 중이었다. 터그람 왕국 입장에서는 점령지 역시 원래 자신들의 땅이라 생각하고 빠르게 복구를 하려 했음이 분명했다.
카말 공국을 병탄하더라도 제국이라는 주적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반대로 청야 작전을 시작하며 무너트리고 파괴한 곳들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다시 지어야 할 판이었다. 수원도 다시 파야 했고 건물도 다시 지어야 했다.
승리를 위한 것이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 보니 함부로 할 만한 작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상황에서나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패였다.
카말 공국이 복구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때 터그람 왕국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혀졌다.
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전쟁에서 패했다.
이제부터는 당장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 와 버렸다. 일단 필리어리 왕국부터가 문제였다. 언제 어떻게 알았는지 패배 소식을 들은 필리어리 왕국이 벌써부터 압박을 해 오고 있었다.
카말 공국이 패배를 했다면 모를까 승리한 상황이었다.
전쟁 상황이 터그람 왕국 쪽으로 기운 상태였을 때야 모른 척 할 수가 있었지만 반대로 카말 공국이 승리를 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제국의 내전도 수습이 되어 가는 상황.
공동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했던 간에 다시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터그람 왕국이 고개를 숙여야 한다.
지금처럼 모른 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었다.
전쟁 당사자인 카말 공국보다도 더 압박을 하고 있었다. 물론 필리어리 왕국 역시 동맹을 모른 체 했기에 일말의 책임은 있었다. 그 책임 때문이라도 더 적극적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카말 공국의 저력 때문이라도 터그람 왕국보다는 카말 공국의 중요도가 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터그람 왕국의 카이거 루 마이어스 왕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포로로 잡힌 병력은 어떠한가.”
“아직은 잘 있는 모양입니다. 카말 공국도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국의 도발이 있을 수 있기에…….”
“그딴 소리 듣자고 한 말이 아니오.”
“죄송합니다.”
서늘하게 내뱉어진 말에 보고를 올리던 트리아 루어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그 옆에 있던 칼라일 론 마샤 공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쩔 수가 없겠습니다. 벌써부터 제국이 안정화되어 가고 있다는 첩보가 들려와서…….”
“크윽!”
칼라일 왕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카말 공국에 억류되어 있는 병력이야말로 터그람 왕국의 정예다. 그들이 있어야 제국의 도발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국이 바보도 아니고 이번 전쟁에 대해 관심을 안 기울였을 리 없다. 아마도 지금이면 타깃을 고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전이 있었다고 해서 숨을 고른다고 할 제국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라면 터그람 왕국부터 노릴 것이 뻔했다.
지금은 머리를 숙여야 할 때였다.
“공작.”
“예.”
카이거 왕의 말에 칼라일 공작이 시선을 맞췄다.
“공작이 다녀오셔야 할 것 같소.”
“카말 말입니까.”
“그렇소.”
“알겠습니다.”
칼라일 공작이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쉽지 않을 협상이 눈에 보였다. 많은 양보를 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저쪽에서 원하는 대로 다 빼앗길 수는 없다.
그게 협상가로서의 의무다.
“후우. 나가들 가시오.”
카이거 왕이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
“고맙다고 해야 하나?”
“…….”
카말 공왕이 삐딱하게 앉아서 말했다. 모욕적일 수도 있지만 필리어리 왕국에서 온 사신은 침묵했다. 동맹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행하지 않은 죄가 있기 때문이었다.
“뭐, 한바탕 치고 받아서 그런지 이거 영 싸울 힘이 없는데. 뭐 제국이 쳐들어온다면 그냥 집안이나 걸어 잠그고 있어야 할 판이기도 하고.”
카말 공왕이 여전히 삐딱한 자세에서 한마디 툭 던지자 필리어리 왕국의 사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미 본국에서도 구호물자를…….”
“에이 씨, 우리가 거진가. 구호물자를 받게.”
시선은 사신이 아닌 텅 빈 공간을 응시하고 있지만 엄연히 사신보고 들으라고 투덜거린 것이다.
“신이 실수를 했사옵니다. 우호를 위한 물자이옵니다.”
“우호라…… 뭐 그럼 고맙게 받지 기왕이면 넉넉하게 주면 좋겠네.”
기왕 받는 거 뻔뻔히 대응했다.
“예.”
“상황이 이래서 연회 같은 건 못 하니 이해하시게.”
“이해합니다.”
“그럼 가 보시게.”
“예.”
명백한 축객령이지만 사전에 각오를 하고 왔는지 물러나는 사신단의 얼굴에는 불쾌함보다는 이 정도라 다행이라는 표정들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봐.”
“예. 전하.”
옆에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던 쉬람 후작이 고개를 들었다.
“터그람에서는 뭐래?”
“칼라일 공작이 직접 온다고 합니다.”
“호오?”
보통 외교적인 부분에서는 트리아 루어 후작이 움직인다. 그런데 칼라일 공작이 온다는 것은 터그람 왕국에서도 확실히 고개를 숙이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도 나름 줄다리기를 해보겠다는 의미였다.
칼라일 공작을 사신으로 보내 외형적으로 형식을 갖추되 실리적인 부분에서 만큼은 모두 양보할 수 없다는 의미.
하지만 그것 역시 부질없는 몸부림일 뿐이다.
“잘할 수 있지?”
카말 공왕의 말에 쉬람 후작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시잖습니까. 칼질은 못해도 입은 잘 놀리는 거.”
“그래. 최대한 뜯어내 어차피 친하게 지낼 종자들이 아니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전이라면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에 양보도 하고 그랬겠지만 이미 전쟁을 치룬 사이다.
공동의 적을 둔 또 다른 적일 뿐. 더 이상 상대의 상황을 봐 줄 이유는 없다.
“참 가우리 쪽과도 계산할 게 있지 않은가?”
“예.”
“멀지만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동맹이 될 사람들이다. 자존심 내세우지 마.”
“알겠습니다.”
쉬람 후작이 고개를 숙였다. 계웅삼 건에서야 실수가 있었지만 그 실체의 일부라도 확인한 지금 간이고 쓸개고 빼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쉬람 후작이었다.
“그래. 가 보도록. 가능하면 친해지고.”
“후. 알겠습니다.”
“응? 왜 한숨인가?”
“그, 그게…….”
쉬람 후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뭐가 고민이 있는 모습이었다.
“그 왜 있잖습니까.”
“뭐?”
“금발머리의 그…….”
“제라르?”
“예.”
“이 동네에도 세이렌이 있냐고 묻는데 뭐라 합니까?”
“…….”
카말 공왕이 할 말을 잊었다.
“발정의 제라르라더니만…….”
카말 공국에서 만들어진 제라르의 새로운 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