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940
5화 생존 확인
[협상이 안 되면 다시 전쟁이라도 해야지. 오늘 일들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도록.] 흔들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로 두 다리를 턱 하니 걸쳐 놓고 한 손에 와인을 들고 홀짝이던 바사 론 카말 왕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해라, 전쟁.”
“너무 노골적으로 들이팠나 봅니다.”
쉬람 마쟐 공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바사 왕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알면 지들이 어쩔 건데.”
그때 수정구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던 시종이 빠르게 입을 놀렸다.
“일단 외부적으로는 강경한 모습을 유지하자고 적었습니다.”
“흐음.”
시종은 지금 칼라일 공작과 사신들이 주고받는 필담을 읽어서 보고하는 중이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천장부터 침실까지 곳곳에 영상을 보내는 마법 아이템을 설치해 놓은 것이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그럼. 우리는 어쩌지?”
“일단 맞장구쳐야 할 듯합니다.”
쉬람 공작의 말에 바사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계획을 짜보도록.”
“예.”
밖으로 나온 바사 왕은 외부 출입을 금해 놓은 뒤뜰로 향했다. 오랜만에 돼지들의 흔적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계웅삼이 일부 잡아먹은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출정 때 싹 잡아먹었다.
대신 이곳을 차지한 것은 돼지가 아닌 가우리의 병력이었다.
정확히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이동 마법진이 세워지고 있는 곳이었다. 마나의 낭비를 줄이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대규모 이동 마법진을 설치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가우리의 마법사들과 얼떨결에 왕국을 선포한 카말 왕국의 술법사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서로 새로운 학문을 접한 흥분으로 교류에 열을 올리며 이동 마법진을 살피고 있었다.
“꽤 꼼꼼하구려. 전에 봤을 때는 바닥에 슥슥 그리는 것 같더만.”
작업 중인 마법사에게 다가간 바사 왕이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이번에 계 장군의 방뇨 사건 때문에 마법진의 훼손을 막는 부분이 화두로 떠올랐지요.”
“계 장군이면?”
마법진을 바쁘게 손질하던 마법사가 되물어 온 바사 왕의 질문에 시선을 돌리며 답하려다가 화들짝 놀랐다.
일하느라 그가 바사 왕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카말의 지배자이신 바사 왕을 뵙습니다.”
“그냥 편히 합시다. 동맹끼리. 그런데 계 장군이 계웅삼 맞소?”
바사 왕이 미사여구만 들어도 두드러기가 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 그렇습니다.”
“끙.”
최근 가우리에서 온 인원들로부터 이것저것을 주워듣다 보니 가우리에서의 계웅삼은 극과 극의 평판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력 면에서는 누구 하나 손에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농담 반으로 들었던 오십 미만의 병력으로 성 하나를 함락시키고, 수많은 병력을 포로로 삼은 내용에 대한 것은 그야말로 백미였다. 전설로 회자될 만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것들은 동네 한량 같은 느낌을 받는 평들이 대부분이었다.
장가를 안 간 것이 아니라 못 간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고, 사람이 좀 삐뚤어져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많았다. 또 성격이 별로 좋지 않아 종종 부하들을 굴린다는 이야기 등 실력 빼면 평은 영 아니었다.
물론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 자신의 수하들을 아끼고, 수련에 임할 때에는 엄하며, 전장에서는 항상 위험한 곳을 스스로 나선다고 했다.
물론 이런 부분은 웅삼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가우리의 무장들 대부분이 그렇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이실라 공녀가 특별히 걱정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실라 공녀 역시 그 정체를 철저히 숨기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면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끼리끼리 잘 어울린다는 생각까지 했다.
와아아아!
그때 별궁 내부에서 함성이 울려왔다.
익숙한 음성들이었다. 대무덕과 을지우루 등의 목소리였다. 그들의 함성에 바사 왕은 발걸음을 옮겼다.
듣기로는 웅삼과 이실라와의 통신을 시도한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일단 딸이기에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별궁 안쪽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내부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안쪽에 연구실 겸용으로 개조한 것이다.
“좋은 일 있는가?”
“우리의 열제께서 무사하시다는 소식입니다.”
“그런가? 그대 이름이……?”
“부여기율입니다.”
부여기율은 질문을 해온 바사 왕에게 또 다른 소식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이실라 론 카말 공녀께서도 무사하시답니다.”
“하아.”
기율의 대답에 바사 왕의 얼굴에 미소가 찾아왔다. 터그람 왕국과의 전후 처리 때문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커다란 마법진 중앙에 놓인 탁자 위의 수정구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무뚝뚝한 느낌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잘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무덕이 충언을 아끼지 않는 충신의 표정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계 장군은 알아서 처분하소서.”
[음.]
짧은 음성이었지만 마치 잘 알았다는 느낌이었다.
통신이 끊어지고 리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후우, 한숨 돌렸습니다.”
“고생했소이다.”
무덕이 리셀을 치하할 때 옆에 있던 휘가람이 바사 왕을 발견하고는 예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축하하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해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이실라 공녀 역시 안전하다고 합니다.”
“하하핫! 안전하다니 그야말로 다행이오!”
바사 왕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일단 다음 연구를 위해 좀 더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그러시게나. 고생 많았소.”
자리를 옮기는 리셀에게 무덕은 치하의 말을 남겼다. 바사 왕은 웅삼을 어찌하라고 했던 무덕에게 뭔가 말을 하고 싶었으나 남의 나라 일이기에 입을 다물었다.
아까 듣고 보니 이곳으로 튕겨오게 된 이유가 웅삼이 술을 먹고 방뇨를 했는데 그게 잘못되어 이렇게 된 것이라 했다.
솔직히 웅삼의 노상 방뇨가 아니었다면 지금 카말 왕국은 아직도 전란에 있거나, 아니면 위기에 봉착되어 있었을 게 분명했다. 어찌 되었든 카말 왕국의 입장에서 웅삼은 구세주다.
“하하하! 이것 참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습니다.”
무덕이 다가오며 말을 걸자 바사 왕이 마주 웃으며 대꾸했다.
“다행이오. 그리고 정력석…… 아니지, 마나석의 수급은 최우선적으로 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하하, 그거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동맹 아닙니까.”
“하하하!”
바사 왕의 너스레에 무덕이 대소를 터트렸다.
그때 휘가람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이 일 때문에 이후의 상황을 보고받지 못했는데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까?”
“아, 너무 대놓고 질러서인지 그들이 필담을 나누고 있더이다.”
“필담이라.”
“다행히 널찍한 원형 테이블 위에서 필담을 나누는 덕에 그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소이다.”
바사 왕의 말에 휘가람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거 다행입니다. 유리한 상황은 계속 이어갈 수 있겠군요.”
“그러게 말이오.”
전쟁의 여파가 컸지만, 이후의 일이 잘 풀리는 듯하여 바사 왕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비록 오래된 동맹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은 씁쓸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새로운 동맹이 그 빈자리를 충분히 채우고도 남으리라 생각했다.
***
칼라일 공작은 그리팔 후작을 만나 안부를 묻고 있었다.
“몸은 어떻소.”
“그럭저럭 나쁘지 않습니다.”
“자주 찾지 못해 미안하오.”
“패장이 무슨 낯으로 뵙겠습니까.”
그리팔 후작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에 칼라일 공작이 한숨이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사실 그리팔 후작이 크게 잘못한 것은 없었다.
변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 컸다.
“가우리라는 나라 말이오.”
“예.”
“어땠소.”
칼라일 공작의 질문에 그리팔 후작은 눈을 감았다. 패배의 날을 떠올렸는지 살짝 어두운 표정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그리팔 후작이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강했습니다.”
“그뿐이오?”
“강하고 또 생소했습니다.”
“생소하다.”
생소하다는 말에 이채를 보이자 그리팔 후작이 신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들의 술법은 우리와 궤를 달리하는 듯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술법 전단보다도 더 체계가 있어 보였습니다.”
“으음.”
“술법 전단의 운용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이번에 느낀 것이 많습니다.”
“그렇구려.”
“게다가 가우리라는 나라의 기사들 수준이 상당했습니다.”
“꽤 강해 보이더구려.”
“그저 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을 잇는 그리팔 후작의 얼굴 위로 공포가 서렸다. 그의 얼굴 위로 드러난 공포를 읽은 칼라일 공작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그리팔 후작을 만나기 전에 포로로 잡힌 일선 지휘관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도 하나같이 공포스러운 존재라고 대답했다.
“소울아머도 입지 않았다는 게 솔직히 믿기 어렵소.”
“허허, 직접 당한 우리도 믿기 어렵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문제는 없소?”
“없습니다. 가끔 말동무가 찾아주니 그것 또한 나름 운치 있습니다.”
“…….”
순간 칼라일 공작은 그리팔 후작의 면상을 후려칠 뻔했다.
대군을 다 말아먹은 주제도 모자라 포로로 잡혀서, 운치 운운하는 꼴을 보니 열이 치솟아 올랐던 것이다.
가까스로 솟구친 열을 삭인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되돌아 나왔다.
“어떤 미친놈이 저 인간이랑 말동무를 하나.”
그리팔 후작과 말동무를 한다는 것은 꽤 피곤한 일이었다.
그때 칼라일 공작이 스산한 살기를 느끼며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그 시선 끝에 자신을 대무덕이라 했던 장년인이 서 있었다.
‘언제!’
눈앞에 올 때까지 짐작도 못 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그보다 안광을 밝히며 다가온 그가 한 말에 다시 한 번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 미친놈일세.”
“…….”
무덕이라는 자는 귀까지 밝았다.
***
다시 모인 칼라일 공작과 사신단은 포로로 잡힌 터그람 왕국군을 만나보고 온 내용을 종합했다.
[역시 안심할 수 없다. 저들의 술법이 생소한 데가 있다고 하니, 이곳에서 말하는 것은 안심할 수 없네.]
필담을 나누며 칼라일 공작이 다른 말을 뱉었다.
“그래, 포로로 잡힌 이들의 처우는 어떠하던가.”
“처우 자체는 나쁘지 않았사옵니다. 다만 일반 병사들의 경우에는 노역에 동원되고 있사옵니다.”
“그렇군.”
사신단들은 칼라일 공작과 말을 주고받으며 다시 답변을 적어 그에게 내밀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많기는 하지만 일단 조심해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적들이 소울아머를 입지 않았다는 것 역시 그들의 생소한 술법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각도로 확인해 봐야 할 듯하옵니다.]
[그럼, 그리 알고 내일 협상을 준비하세.]
“어쨌든 더 이상 협상이 통하지 않으면 결렬하는 것으로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야겠지.”
[잘 먹혀야 할 텐데요.]
입 따로, 마음 따로 노는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