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951
16화 고진천의 변화
뀌익.
“저, 저리 가!”
뀌이익?
“하, 핥지 마!”
뀍뀍뀍!
우중만이 비명을 내지르며 기어서 도주를 시도했다. 하지만 갈 곳은 없었다. 네모난 우리 주변에는 시퍼런 돼지들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며 중만을 따라다녔다.
아장아장이라지만 덩치나 키가 결코 귀엽지 않았다. 키는 우중만의 허리춤을 넘어섰고, 덩치는 거의 중만의 두께를 넘어서고 있었다.
일어섰다 넘어지는 모습이 새끼인 듯했지만, 처음부터 돼지가 걷는다는 게 중만의 상식선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색깔부터가 비호감이었다.
시퍼렇다. 녹색을 약간 띠는 시퍼런 색이었다.
“악!”
중만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와중에 다가온 돼지 한 마리가 중만의 넓적다리를 물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 밖을 지나던 한 병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막대기로 중만의 허벅지를 문 돼지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먹지 마! 지지! 먹는 거 아니다!”
뀌에엑! 꿱!
“나, 날 여기서 꺼내 주란 말이다! 어서 꺼내 줘!”
중만이 화다닥 달려가더니 우리의 창살에 매달려 미친놈처럼 꺼내 달라고 외쳤다. 그러나 병사는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막대기로 중만의 배를 쿡 찌르며 투덜거렸다.
“뭐라는 거야. 쉭, 저리 가. 쉭!”
“어억! 놈, 내가 누군 줄 알고!”
“뭐라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네.”
병사는 투덜거리며 결국 창살을 잡고 미친놈처럼 외쳐대는 중만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따앙!
“컥!”
맑은 소리와 함께 중만이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병사가 떠나간 뒤 중만은 구슬피 울며 외쳤다.
“날 꺼내 주란 말이야아아아!”
그런 중만의 주변으로 새끼 돼지들…… 아니, 새끼 오크들이 다가가 매달렸다. 마치 놀아 달라는 듯.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났다.
“밥 먹어라!”
“비켜!”
뀌익! 뀍!
우중만이 우리 한가운데로 던져진 음식을 향해 몸을 날리자 새끼오크들이 괴성을 지르며 뒤늦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중만은 자신의 키를 이용해 음식을 들어올리며 아구아구 먹어댔다.
고기와 곡물 익힌 것을 섞은 죽이었다. 하지만 중만은 그걸 마치 산해진미라도 되듯 먹어 재꼈다. 단 이틀이었지만 굶주림은 그에게 더한 공포로 다가왔다.
그래서 아침부터는 음식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생존이 힘들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꽤 많은 양임에도 허겁지겁 혼자 먹어 치운 중만에게 병사가 다시 몽둥이질을 했다.
“나눠 먹어!”
하지만 중만은 몸을 날리며 몽둥이를 피하고는 다시 외쳤다.
“더 줘, 더! 난 아직 배고프다!”
“허…….”
그 모습에 병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이 안 통하는 게 하도 답답해서 투덜거렸더니 나름 적응하라고 우중만에게 통역 마법이 담긴 아이템을 주었다. 그 덕에 말은 통하기 시작했지만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나름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혀를 차며 병사는 다음 우리로 걸음을 옮겼다.
“물이 없다! 물을 달란 말이야!”
중만의 외침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젠장.”
“뀌익! 이 돼지 같은 뀌익!”
“닥쳐! 네놈들 내가 누군지 알고!”
뀌이이익!
덕분에 오크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어 중만은 심심치 않았다.
***
“참, 그 기념품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들어보니 죽을 짓도 참 골고루 저질렀던데.”
연휘가람의 질문에 고진천이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뭐하고 있지?”
“새끼 두발돼지 사육시설에 넣어뒀습니다.”
“그래?”
“이제 이틀이 좀 지났는데 엄청난 적응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흐음.”
휘가람의 말에 진천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별로 신경 안 쓴다는 듯 한마디 툭 던졌다.
“죽지만 않으면 된다.”
“계속 살려둡니까?”
“죽는 건 쉬우니까.”
진천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휘가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참, 이제는 슬슬 들어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휘가람의 말에 진천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바로 한때 대무덕이 머물던 막사였다. 진천은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도착하기 전 유니아스 덕에 분노의 화살을 돌리기는 했지만 왠지 여파가 없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도착하던 날 이실라 공주와의 대치도 그랬고 말이다.
진천 역시 그게 신경 쓰였는지 리셀을 통해 잠시 부작용이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머물렀던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그들 역시 이곳으로 처음 넘어왔을 때 신체가 가벼워지는 부작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부작용은 더는 없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왔던 것과 달리 마법이라는 힘이 적용되었던 것 때문인지 다른 것은 없었다.
“이제 들어가야겠지.”
“괜찮으시겠습니까?”
“난 언제나 당당하다.”
진천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말하자 휘가람이 웃으며 말했다.
“압니다.”
“훗.”
그때 진천이 휘가람을 보며 웃었다.
묘한 자신감을 보이는 진천을 보며 휘가람은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좀 이상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곳도 대세는 짐승남이 될 것이다.”
“예?”
알 수 없는 소릴 하며 자리를 뜨는 진천의 모습에 휘가람은 뭔지 모를 패배감에 찝찝함을 느꼈다.
“대체 뭐지?”
왠지 이전보다 더 당당해 보이는 진천이었다.
진천의 도착을 기다렸다는 듯 문 앞에 을지가 나와 있었다. 진천이 그런 을지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심장 어림에 가져다 대며 입을 열었다.
“이 안에 너 있다.”
“거기에 제가 왜 들어갑니까?”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을지의 뚱한 표정에 진천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역시 현실은 다르다는 것.
곧바로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선물이다.”
“…….”
네모난 상자. 예쁜 리본도 묶여 있었다. 그것을 본 을지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어머, 이쁜 상자네요?”
“풀어 보아라.”
“망가지잖아요?”
“원래 물건 싸는 상자일 뿐이다.”
이러한 포장을 처음 보는 을지였기에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며 포장을 풀었다. 그리고 이내 안의 물건을 꺼내었다.
“…….”
검은색 천 쪼가리 두 장이 나왔다. 그걸 들어 올린 을지가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대체 이건 뭔가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진천이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헤엄칠 때 입는 거다. 비키니라더군.”
“……본 적이 있는 거군요.”
순간 진천이 움찔거렸다. 이미 웅삼이 사고 친 내용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네게도 선물하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위해 입거라.”
“어머나…….”
순간 을지의 얼굴 위로 홍조가 스쳤다.
“이건 일부에 불과하다. 종류별로 다 사왔느니라. 너를 위해.”
이어지는 진천의 말에 을지가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런 진천과 을지를 바라보던 시녀들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언제부터 진천이 낯뜨거운 말을 저리도 쉽게 내뱉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미 승기는 넘어왔다.
“이것뿐이 아니다. 신기한 것들이 많다. 하나하나 풀어내 보자꾸나.”
“네, 폐하.”
순한 양으로 변한 을지와 함께 들어서는 진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고 있었다.
***
“으음.”
베프 리온 백작의 입에서 절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가운데 그의 주변에 앉은 사신단 참모들은 붉어진 얼굴로 성토를 하고 있었다.
“이건 명백히 우리를 농락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단 며칠 만에 타국에 다녀왔다는 걸 믿으란 말입니까? 막말로 그 짧은 시간에 다녀 올 수 있는 나라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냥 우리를 우롱하며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옵니다! 아무리 우리가 동맹으로써 믿음을 잃었다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옵니다!”
참모들의 격한 반응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베프 백작도 혼란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바사 론 카말 왕이 며칠 만에 외유를 다녀왔다는 말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가우리라는 나라의 황제를 만나러 간다던 바사 왕이 열흘도 안 되는 사이에 왕복을 했다는 의미인데, 그걸 누가 믿겠는가.
인접한 터그람 왕국을 가도 열흘은 더 걸릴 것이다.
그런데 며칠도 되지 않은 사이에 벌써 다녀왔다니!
“내 잠시 바사 전하를 알현하고 오겠네.”
“함께 가겠습니다.”
“아니, 혼자 다녀오겠네.”
“백작님!”
참모 중 하나가 언성을 높이며 일어서자 베프 백작이 날카로운 기세를 끌어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사나운 눈빛에 자리에 일어섰던 이가 몸을 움츠렸다.
사신단의 중책을 맡기도 했지만 베프 백작 역시 필리어리 왕국이 자랑하는 명장 중 하나였다. 그 스스로 소울아머 유저이기도 했고 말이다.
참모에 불과한 그들이 그의 시선을 감내할 리가 없었다.
“나를 못 믿는 건가.”
“아, 아닙니다.”
“잊지 말라. 이 사신단을 이끄는 것은 그대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야.”
베프 백작의 말에 참모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꼬리를 내린 그들을 뒤로하며 베프 백작이 방을 나섰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그들을 따라오지 못하게 한 이유 중 하나가 바사 왕의 진짜 의중을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들이 없다면 조금이나마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애서였다.
***
“어서 오게.”
“예, 벌써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베프 리온 백작의 말에 바사 왕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오래 비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긴 합니다만, 좀 당황스럽습니다.”
“그런가? 푸헐헐헐!”
베프 백작의 말에 바사 왕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왜 당황스러운지는 그도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사 왕은 서둘러 웃음기를 지웠다. 눈앞에 있는 베프 백작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네. 자네를 모욕하고자 한 것이 아니네. 충분히 이해가 가서 웃은 것뿐일세.”
“그렇습니까.”
베프 백작은 굳어진 표정을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신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베프 백작에게 바사 왕은 미안함을 느꼈다. 눈앞의 남자는 적어도 전우라 불릴 만한 이였기 때문이다.
“자네가 필리어리 왕국 사람이지만, 자네만큼 날 잘 아는 이가 드물다 생각하네.”
“말씀 감사합니다.”
“내가 잘못하는 게 뭔가?”
뜬금없는 질문에 베프 백작이 솔직히 대답했다.
“정치도 좀 그렇고, 머리 쓰는 것도 사실 그다지 뛰어나다 볼 수는 없지요. 그리고 인간관계도 그다지 폭넓…….”
“어이어이. 그건 심하잖아!”
바사 왕이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 베프 백작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친한 사람에게는 거짓말을 잘 못 하지요.”
“그럼 내가 자네에게 거짓을 말한 것 같은가?”
바사 왕의 질문에 베프 백작이 그를 잠시 응시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