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957
22화 사신단이 노리는 것
대륙에서 가장 외교하기 싫은 기피 대상 1호는 바로 고진천이었다. 특히 전장에서 몇 마디 질문 후 신성제국 황제의 목을 날린 그의 행동으로 인해 전 대륙이 경악에 빠져 버렸다.
아무리 적국이라지만 일국의 황제를 그렇게 전장에서 처단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누군가가 그와 관련되어 질문을 했다. 왜 그랬냐고.
그 질문에 고진천의 대답은 유명했다.
‘응?’
처음으로 나온 것은 대답이 아닌 질문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 떠들 일인가 싶었다는 걸 안 많은 이들은 경악했다. 그래도 일국의 황제였지 않느냐는 말에 전쟁터에 나온 것 자체가 목숨을 내놓은 것 아니냐는 답을 추가로 들었다.
‘황제라서 죽이면 안 된다면, 황제가 칼만 잘 휘두르면 그 전쟁 이기겠군. 아무도 날 안 죽일 테니 내가 다 죽이면 되겠어. 한 만 명쯤 죽이면 알아서 도망갈 것 아닌가?’
이게 고진천의 대답이었다.
물론 아는 사람은 안다. 말 그대로 눈앞의 전쟁의 수괴가 있으니 ‘마침 잘 됐군.’ 하며 그냥 죽여 버린 것이라는 걸 말이다. 왜냐면 신성제국에 있어 밀리오르 황제란 존재는 전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가우리 입장에서는 더는 큰 전쟁을 유지할 만한 체력이 없었다. 그렇기에 후환을 두지 않았던 것이고, 협상해서 가져 갈 수 있는 승자의 권한을 약탈로써 채운 것이다.
고진천스러운 깔끔한 해답이었고, 지금은 그 덕에 가우리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거침없는 행동은 항상 외교를 행하는 이들에게 있어 부담감을 가져왔다.
현 대륙에서 최강이라는 전력을 가진 나라 황제의 행동이 거침없다는 것만큼 부담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차라리 폭군이면 방법이 있겠지만 고진천은 그것도 아니었다.
그걸 모르는 필리어리 왕국의 사신들은 베프 리온 백작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베프 백작께서 홀로 다녀오신 이후에 확실히 이상해지셨습니다. 너무 저자세로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카말 왕국에 실수가 있어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한다지만, 이후 전후 복구를 위한 충분한 사례를 했고, 또 사실 그들도 우리가 없다면 힘든 입장 아니겠습니까?”
“맞소이다. 어차피 공동운명체란 말이지요.”
베프 백작이 자리를 비운 사이, 사신단들은 그간의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는 사신단의 부책임자인 스미스 베일 백작이 있었다.
다른 귀족과 같이 영지를 가진 귀족 중 하나였다. 즉 필리어리 왕에게 작위를 받아 직위만 가진 베프 백작과는 입장이 달랐다. 대대로 영지를 승계해 온 귀족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왕당파와 귀족파가 나뉘어 정쟁을 벌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비교적 삼국 중에 가장 안정적이다 보니 수시로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전쟁에서의 승전을 통한 영향력 강화와 바로 이런 동맹과의 관계에서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신단 행에서는 거의 베프 백작에 의해 주도적으로 끌려가다 보니 불만이 팽배해져 버렸다.
베프 백작이 왕실에서 대 놓고 동맹관게에서 주도권을 잡으라는 밀명을 받았다는 식으로 말도 돌았다.
그런 불만이 있을 법도 했다.
사신단이 함께 움직일 때는 바사 왕의 코빼기도 보기 힘들었지만 베프 백작이 움직일 때는 그래도 간간히 만남을 이어갈 수 있었다. 물론 그 만남을 통해 뭔가 바뀌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예전 이야기나 근황 등에 대한 소소한 대화가 주를 이룰 뿐이었다.
“오후에 있을 회담에서는 나 역시 목소리를 낼 것이오.”
스미스 백작의 말에 사신단의 귀족들이 앓던 이를 뺐다는 듯 환한 표정을 지으며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잘 선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베프 백작님이야 무관에 가까운 분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신단에서의 협상이나 조율은 백작님께서 맡으셔야 했습니다.”
다들 한마디씩 던졌다.
그때 스미스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때에 따라서는 말이오.”
약간 굳은 얼굴로 말문을 열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가 뭔가 중대한 판단을 내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주변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집중되자 스미스 백작이 말을 이었다.
“그들의 동맹을 깰 필요가 있소.”
동맹을 깬다는 말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정말로 강대한 동맹이 있다면 필리어리 왕국도 그 손을 잡는 게 좋지 않으냐는 의견이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곳에 파견된 이유는 그 동맹이라는 존재에 대한 진상 파악이었지만 말이다.
“이유가 있으십니까?”
사신단 귀족 중 노회한 이 하나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스미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음성을 낮추어 갔다.
“터그람 왕국은 이번 실책으로 인해 전력이 크게 낮아졌소. 아마도 다시 복구하려면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릴 것이 분명하오. 카말 왕국은 두말할 것도 없고 말이오.”
“으음.”
“삼국동맹이 위태로웠던 것은 초기의 제국정복 전쟁 때였소. 그때야말로 속절없이 밀렸으니 말이오. 그러다 지금의 카말 왕국, 즉 카말 공국이 저격수 역할을 해 주면서 균형이 잡히게 되었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카말 공국의 역할이 지대했다. 당시 터그람 왕국에 의해 버림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이 지역에 이름뿐인 공국이 세워졌을 때 다들 이 지역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판단을 했다.
시에라 제국 역시 이 지역을 먼저 수습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그사이 필리어리 왕국과 터그람 왕국은 숨을 돌렸다. 그런데 의외로 카말 공국이 잘 버티어 내던 것이었다.
시에라 제국은 그런 카말 공국을 향해 무리하게 병력을 밀어붙이다가 대패를 하게 되었다.
그게 역공의 실마리가 되어 삼국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잃었던 영토들을 다시 획득했다.
물론 역공까지는 불가능했다. 제국은 제국이었으니 말이다.
이후 재차 이어진 정복전쟁에서 다시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차차 익숙해져 갔다. 그러다가 시에라 제국이 잠정적으로 전쟁을 멈추고 후계자 선정을 위한 내전에 돌입했던 것이다.
스미스 백작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터그람 왕국의 대 카말 공국 병합에 대하여 눈을 감아준 이유도 사실 앞으로의 전쟁에서도 할 만하다는 판단이 들어서였소. 그리고 터그람 왕국이 이 지역을 병탄하면서 전력이 어느 정도 위축되기를 바랐고 말이오.”
다들 서로 눈치를 보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필리어리 왕국이 대가를 받기로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제국의 정복 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의 세력구도에 대해 미리 신경을 쓴 것이 진짜 이유였다.
터그람 왕국이야 이전 영토의 일부를 회복하는 수준이었지만, 필리어리 왕국은 눈 한번 감아주고 기존 카말 왕국의 영토 일부를 얻기로 했다.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그러나 거래는 불발이 되었고, 제국의 후계자 전쟁은 조기에 종식이 되어 버렸다.
스미스 백작이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결국 지금 터그람 왕국은 목소리를 내기 힘든 상황이란 말이오. 카말 왕국이야 지금 기세가 등등하다지만 그 역시 새로운 동맹에 빌붙었기 때문이 아니겠소?”
“그럼?”
“그 새로운 동맹과의 연줄이 끊어진다면 더는 카말 왕국도 저렇게 대놓고 터그람 왕국을 적대하지 못할 것이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조율을 하여 다시금 삼자동맹을 이어 가면 되는 것이고…….”
스미스 백작의 말에 사신단 귀족들이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카말 왕국 혼자라면 현실적으로 터그람 왕국을 배척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삼국동맹의 중심이 되는 것이군요!”
“그러네. 게다가 제국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터그람 왕국이나 카말 왕국을 제외하고 침략전을 벌일 이유가 없지.”
한마디로 카말 왕국을 끈 떨어진 연으로 만들고, 그 틈을 타서 기존의 삼국동맹을 다시 끈끈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되면 필리어리 왕국의 영향력은 다시 상승할 것이라는 결론인 것이다.
“탁월하십니다!”
“최선의 선택 아니겠습니까?”
스미스 백작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그들 대신 교류의 끈을 잡는 거라네. 영토의 절반 가까이가 불타 버린 카말 왕국보다는 우리가 거래할 것이 더 많지 않겠는가?”
스미스 백작의 말에 사신단원들이 박수를 쳤다. 요란한 박수소리를 들으며 스미스 백작은 비틀린 웃음을 머금었다.
“이게 정치란 거지.”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시간.
사신단이 입장해 있는 공간은 더없이 활발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카말 왕국의 시종들이 손님 대접에 공을 들이는 모습을 본 사신단 귀족 중 하나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허 이런 차별 대우가…….”
혀를 내찬 사신단 귀족은 이전에도 카말 왕국에 사신으로 몇 번이나 참여했었던 이다.
동맹인 만큼 극진한 대접을 받기는 했지만 지금과 같이 공을 들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최근 두 번의 사신단 행사에서 받은 푸대접은 절로 눈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였다.
“조용히들 하시오.”
베프 리온 백작의 말에 사신단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베프 백작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아직도 이런 것까지 신경 쓰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후우. 어쩔 수 없지.’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마 자중하려는 모습이 조금 보이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걸리는 것은 있었다.
자신이 잠시 외출했던 사이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다.
딱히 꼬집지는 않았지만 사신단의 부책임자인 스미스 베일 백작을 중심으로 묘한 기류가 형성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자신이 홀로 나돌면서 사신단들이 부책임자인 그를 중심으로 논의를 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왠지 느낌이 찜찜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리까지 그들을 배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카말 왕국의 바사 론 카말 전하와 제국 가우리의 고진천 열제 폐하께서 납시옵니다!”
제국이란 단어와 폐하라는 단어에 사신단 몇몇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지만 베프 백작이 사전에 언질을 주었던 덕에 다들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실체를 확인조차 하지 못한 나라를 그들 왕국보다 한 단계 위의 제국으로 인정한다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지금은 그걸 들출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넓은 홀로 바사 론 카말 왕과 고진천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진천은 미리 자리를 잡은 이들을 스치듯 보고는 자연스럽게 가장 상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에 일어서 있던 베프 백작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예를 보였다.
모두가 자리하자 바사 왕이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고진천 열제께서 우리의 동맹과의 접견에 흔쾌히 자리를 내주신 덕에 이런 자리가 만들어졌소이다.”
바사 왕의 말에 베프 백작이 웃으며 다시 예를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열제 폐하께 아국을 대표해 감사의 예를 표합니다. 모쪼록 우리 필리어리 왕국과도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쁠 건 없지.”
단답형의 대답히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