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959
24화 산에는 산적, 숲에는?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가.”
기사의 보고에 바사 왕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신단과 자리를 하려 만들었던 식사자리에는 바사 론 카말 왕과 고진천 그리고 을지우루만이 있었다. 바사 왕의 표정이 꽤 가라앉아 있었다.
분노와 연민이 점철된 표정이었다.
분노는 사신단의 생각에 대한 것이었고, 연민은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았던 베프 백작에 대한 것이었다.
“베프 백작이라는 이는 몰랐나 보더군.”
“그럴 겁니다.”
진천의 말에 바사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죄가 없지. 식사나 한 끼 하고 가라 하지?”
“식사를 말입니까?”
이미 문밖을 나선 이들이었지만 아직 멀리는 가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진천이 못을 박았다.
“딴 놈들 빼고.”
진천의 말에 바사 왕이 약간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그도 마음이 편친 않았던 것이다.
“그럼 지금이라도 전령을 보내지요.”
“그러게나. 기왕이면 직접 데려오든가.”
“제가 자릴 비워도?”
“되네.”
진천의 허락이 떨어지자 바사 왕이 잠시 자릴 비웠다.
사실 아직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이기도 했다.
바사 왕이 바쁘게 밖으로 향한 뒤 우루가 진천을 향해 신기한 듯 질문을 던졌다.
“많이 너그러워지셨습네다.”
다른 때 같았으면 여기 있던 사신단의 턱주가리가 다들 제자리를 이탈했을 텐데 말이다.
그런 우루의 질문에 진천은 또다른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리셀 지금 바쁘냐?”
***
황량한 벌판.
수도를 벗어난 지 오래지 않아 카말 왕국 수도 방향에서 기마들이 달려왔다. 바사 론 카말 왕이 선두에 선 모습에 몇몇 사신단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바사 왕이 아직 생각은 제대로 박혀 있구나 싶었다.
그러나 도착한 바사 왕이 베프 백작만을 데려간다는 말에 그들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베프 백작은 이 역시 기회라 판단했다.
사신단의 발언으로 인해 바사 왕의 진노를 샀으니 이 또한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이에 사신단은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동맹 분위기에 똥물을 퍼부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조금 더 이동한 뒤 노숙을 준비해야만 했다.
“젠장. 수도가 지척인데 이곳에서 노숙이라니…….”
사신단 귀족 중 하나가 투덜거렸다.
“진짜로 이 시간에 내쫓을 줄이야.”
황량한 곳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숲을 등지고 있어 나름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다.
정확히는 숲 초입이었다.
임시막사를 건설하기 위해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사신단은 슬슬 배가 고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
“일단 우리끼리 식사라도 하지요.”
“그럽시다.”
그런데 말이 끝나는 순간 사신단 귀족들은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숲 방향에서 뭔가 빛이 번쩍였기 때문이다.
“뭐지?”
“분명 빛 아니었소?”
“순간적으로 비춰지기는 했는데…….”
놀란 눈이 숲 방향으로 향했다. 사신단을 호위하는 병사들과 기사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숲 안쪽을 바라보았다.
물론 수도가 인근이기에 크게 긴장하지는 않았지만, 경계의 시선도 놓지 않았다.
그때 빛이 터져 나왔던 숲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누구냐!”
병사 중 하나가 크게 외쳤다. 그럼에도 발걸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경계를 하면서도 의아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발걸음의 주인이 소수였기 때문이다.
잘해야 두셋?
발걸음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병사들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어스름을 뚫고 나타난 불청객의 수눈 두 명이었다.
그때 사신단을 호위해서 회담장에 들어섰던 기사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 두 명의 불청객 중 하나의 체형이 낯익었던 것이다.
“복면?”
문제는 그들이 복면을 쓴 채 한 손에 나무를 깎아 만든 것 같은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기사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정체를 밝혀라.”
“복면 쓴 거 보면 모르간?”
“…….”
낯익은 체형의 복면인이 내뱉은 어투가 묘하게 귀에 익었다.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목숨을 보장하지 못한다.”
기사가 살기를 품은 목소리를 흘리자 이번에는 그 옆 큰 체구의 복면인이 대답했다.
“산적.”
“여기에 산이 어디 있다고…….”
질문을 던졌던 기사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뒤는 벌펀이고 앞은 숲이다. 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 숲적?”
큰 체구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바꾸자 기사들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다 떠나 일단 불손한 목적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이들이 쉽게 칼을 뽑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혹시 아까 회담장에 있던…….”
“내래 숲적이야. 이빨까디 말라우.”
“…….”
사신단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딱 봐도 아까 회담장에서 후작의 지위라는 이가 맞는 것 같은데, 복면을 쓰고 나타난 걸 보면 또 이상했다. 숫자도 단둘이었다.
“후후후. 이거 황송합니다. 아무래도 바사 왕 앞에서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기가 힘들었겠지요.”
그제야 사신단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베프 백작만 따로 빼낸 것도?”
“오!”
사신단 귀족들이 반색을 하자 스미스 백작의 어깨가 다시 펴졌다. 분명 가우리에서 온 이들이 맞다는 확신을 한 것이다.
아까 카말 왕국의 실상을 이야기하며 깎아내린 것이 먹혀들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또 같았다.
“우린 숲적이다.”
반복되는 대답에 스미스 백작이 웃으며 한걸음을 내딛었다.
“이 사람들은 다 제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가진 거 다 내놔.”
“필요는…….”
“속곳 빼고 전부.”
“…….”
스미스 백작은 입을 벙긋거리며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지금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의밉니까.”
“터는데 의미를 왜 부여하지?”
그때 스미스 백작의 표정이 묘해졌다. 옆에 있던 굵직한 체구의 사내뿐 아니라 지금 말을 주고받는 이의 어투 역시 익숙했던 것이다. 순간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다.
“주변을 살펴라!”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지 사신단의 귀족들이 병사들과 기사들에게 주변을 살피라는 외침을 터트렸다. 하지만 숲 안이라면 모를까, 주변은 황략한 벌파네 가까웠다.
숲 안쪽도 나무가 그리 울창한 편은 아니라서 대규모 병력이 숨어 있다면 눈에 쉽게 들어오는 구조였다.
“어, 없습니다! 저 둘뿐입니다!”
“이익!”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 겁니까!”
스미스 백작의 외침에 건장한 복면인이 대답했다.
“털려는 의도. 입 아프다. 이젠.”
순간 스미스 백작의 표정에 독기가 서렸다.
“화적이다! 사로잡을 필요 없이 죽여라!”
스미스 백작의 외침에 사신단 귀족들이 놀란 눈으로 외쳤다.
“그, 그렇게 하시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가 맞다면 카말 왕국과 그들과의 동맹이 깨지겠지.”
“아!”
“그리고 본인들 입으로 숲적이니 뭐니 했으니…… 그거면 이유로 족하지 않은가?”
스미스 백작의 말에 사신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깽판이라도 쳐서 카말 왕국을 다시 제대로 끌어들이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그 둘을 일제히 둘러싸며 달려 나갔다.
“쳐라!”
그 말과 동시에 선두에 선 기사의 안면에 몽둥이가 박혀들었다.
퍼억!
찌그러진 투구가 뒤로 날아갔다. 동시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허공으로 떠오른 기사의 입 주변으로 알알이 흩어져 날아가는 이빨들이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몽둥이를 휘두른 건장한 사내가 즐거운 음성을 내뱉었다.
“손맛이 좋군.”
매타작 소리가 사방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
“응? 어디 가셨는가?”
바사 론 카말 왕은 베프 리온 백작을 데리고 고진천과 을지우루가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둘은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다녀오실 곳이 있다 하셨습니다.”
“다녀오다니?”
시종의 답변에 바사 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뒤쪽에서 진천의 음성이 들려왔다.
“음, 데려왔군.”
“옷이 바뀌셨습니다?”
약간 수수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옷 종류도 카말 왕국의 양식이었다.
그에 진천이 대답했다.
“그곳의 복식을 체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길티요.”
우루 역시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바사 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옷에 피가…….”
진천이 입은 옷에 피가 튀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진천이 잠시 내려다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잠깐 몸 좀 풀 겸 대련을 했지.”
“길티요.”
이번에도 우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몸에 피가 튄 것 치고는 두 사람의 행색이 너무 멀쩡했다.
그때 또 다른 이가 나타났다.
“허허허, 안녕하셨사옵니까!”
리셀 시아론. 그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바사 왕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치유마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와 타다르 후작의 대련에 의한 상처를 일순간에 치유하는 이적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이전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그라면 이해가 갔다.
영문을 몰라 하는 베프 백작에게 바사 왕이 리셀을 소개했다.
“가우리의 술법사이시네. 치유술에도 일가견이 있으시지.”
“아, 그렇습니까?”
“그리고 우리로 따지자면 공작의 직위에 계시는 분이기도 하시네.”
공작의 직위라는 말에 베프 백작의 허리가 절로 휘어졌다.
“아까 일은 잊고 우리 식사나 하지.”
“죄송하옵니다. 제가 모자라…….”
베프 백작이 굳은 얼굴로 사과를 이어 갔지만, 진천이 말을 끊으며 정말 괜찮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다.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 신경 쓰지 말도록.”
“예, 폐하.”
베프 백작이 그제야 안색이 펴졌다. 그리고 아직 기회는 남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모습을 본 바사 왕이 크게 웃으며 외쳤다.
“으하하! 정말 화통하십니다!”
***
“저, 저리 가.”
알몸의 사내가 나무에 몸이 묶인 채 발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힘이 없어서인지 다리를 핥고 있던 들개를 쫓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그 주변에는 백여 명에 달하는 알몸의 사내들이 나무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묶여 있었다.
“어흐흐흐.”
“끄응.”
“어구구…….”
숲 초입 나무에 빼곡하게 묶인 알몸의 사내들이 저마다 신음소리와 울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충격이 심한 듯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내 소울아머가…… 내 소울아머가…….”
그의 눈앞에는 갈기갈기 뜯겨 해체가 된 소울아머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 스미스 백작도 있었다.
“어으으으…… 으흐흐흐…… 끄으으. 우힛!”
합죽이 같은 모습.
입안의 이빨마저 강탈당한 그는 정신이 나간 채 신음을 흘리다 갑자기 웃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