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968
33화 이간계의 시작
썰렁해진 대회의장을 바라보는 일리언 공작은 참담하기만 했다.
왕가의 견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취급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물론 왕가 쪽에서도 나름의 이유를 들었지만, 가우리라는 나라의 실체가 정말로 대단하다는 게 밝혀진다면 계승귀족들의 입지가 뒤흔들릴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지금 버튼 공작가의 당대 수장인 일리언 공작에 대한 성토가 그를 더욱 수렁에 빠져들게 만들고 있었다.
계승귀족들의 우두머리이면서 그 방패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놓고 비난하는 이들은 없었지만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다. 그를 힐난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계승귀족들의 영지들은 수도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중에서 시에라 제국과 인접한 영지가 한둘이 아니었다.
필리어리 왕국 자체가 영지들의 연합에서 시작된 탓에 수도를 중심으로 왕가의 직할지가 있고, 또 왕가의 영향을 받는, 즉 왕당파라 불리는 귀족들이 직할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거기에 시에라 제국과 인접하지 않은 동떨어진 위치의 귀족들은 계승귀족이라 할지라도 왕가의 편에 붙어 있었다.
즉 지금 귀족파라 불리는 이들은 시에라 제국과의 전쟁에 있어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들이라 보면 된다.
게다가 지금 상황은 터그람 왕국과 카말 왕국이 건재한 상황도 아니다 보니 위기감은 그 어떤 때보다 고조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일리언 공작이 제대로 왕가의와 싸워 주지를 못하니 귀족들의 성토는 당연한 것이었다.
실제 폐인이 된 스미스 백작은 일리언 공작가의 봉신 가문이었다가 영지를 얻어 계승귀족이 된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그런 그의 실책이었기에 왕가에서도, 또 귀족파 내에서도 성토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무능’.
이 단어가 일리언 공작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장자 계승의 원칙에 의해 공작가를 물려받았지만, 실제 공작가를 빛낼 인재라는 말을 듣던 이는 바로 그의 동생이었다.
검도 잘 쓰고 주변에 사람도 많이 따랐다. 거기에 학문적으로도 성취를 이루어 많은 이들이 그를 공작가의 수장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사고로 인해 동생이 죽고 난 뒤 그가 공작가를 무리 없이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가 동생을 암살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억울했지만 나름 노력한 끝에 어느 정도 귀족파의 수장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이번 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대회의실 문이 열렸다.
“듀란 페이서 백작…….”
“홀로 계십니까.”
“뭐, 복잡해서 말이네.”
그의 가신 중 하나인 듀란 페이서 백작이 그에게 다가왔다.
노년에 접어들기 시작하는 그는 중년의 초입에 서 있는 일리언 공작이 마음을 터놓는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였다.
사실 예전 시에라 제국과의 화평정책을 추진할 때 그의 도움을 꽤 많이 받았었다.
그때에는 공작가를 이른 나이에 이어받고 난 뒤 가시 같은 시선에 괴로워할 때였다.
그때 그를 도운 이가 바로 듀란 백작이었다.
젊은 나이에 시에라 제국으로 유학을 다녀오면서 얻은 인맥으로 그를 도왔던 것이다.
이후에도 흔들릴 때마다 힘이 되어 준 이가 바로 듀란 백작이었다.
“이번에도 도어 후작이 참석을 안 했더군요.”
“그 작자야…….”
버튼 공작가와 같이 공신가문의 수장이었다.
다른 점은 그가 중립이라는 점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뭉치는 귀족들이 꽤 있는 편이었다.
천생이 무골인 도어 론 스피어 후작인지라 정치적으로 움직임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덕에 자신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중립이라지만 계승귀족 모임에 가끔이나마 얼굴을 내밀었다. 그 역시 왕가의 부당한 명령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내는 편이었다.
일부에서는 그를 박쥐에 비교하기도 하지만 그런 목소리는 그다지 힘을 얻지 못했다. 그가 가진 무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중립적이면서 실리적인 판단은 왕가나 귀족파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칩거 아닌 칩거를 하고 있었다.
그가 참석을 하지 않자 귀족파에서는 점차 불안감이 스멀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역시 일리언 공작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벌어지니 이탈의 움직임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도어 론 스피어 후작이 그들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사실 말로는 중립파라 하지만 무장들을 중심으로 모인 무투파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인 이들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가에서 도어 후작을 찾는다더군요.”
듀란 백작의 말에 일리언 공작이 일그러진 얼굴을 그대로 유지한 채 질문을 했다.
“이번엔 무슨 일로?”
“정확한 사실은 아니지만…….”
듀란 백작이 말끝을 흐리자 일그러져 있던 일리언 공작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일상적인 부름이 아니라는 의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교 역할을 맡기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가교?”
“사실 도어 후작은 지금의 형태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야…….”
그는 시에라 제국이라는 중대한 적이 있는 상황에서 귀족파니 왕당파니 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 입장 때문에 중립파 운운 소리를 들을 뿐이다.
실제 전투에서 그 누구보다 앞장서는 이가 바로 도어 론 스피어 후작이었다.
“아마도 이번 사신단에서의 실책을 들어 힘을 하나로 뭉치자는 왕가의 목소리가 귀를 기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위기상황이라는 것도 설득력이 있겠지요.”
“으으음.”
듀란 백작의 말에 일리언 공작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에게 듀란 백작이 심각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결국 이쪽에서 흔들리는 귀족파들을 포섭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맡기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차피 도어 후작이 나서지는 않을 것이니, 이 기회에 각하를 밀어내고 귀족파에게 새로운 수장을 세우게 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미친!”
일리언 공작이 벌떡 일어섰지만 이내 힘없이 주저앉았다. 설득력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냥 멍하니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 나갈 방안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침묵이 길어졌다.
한숨을 내쉰 일리언 공작이 답답한 마음을 품은 채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겠는가?”
듀란 백작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가 던진 질문에 듀란 백작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하면 좋겠건만 대답 없이 서 있기만 했다.
침묵은 길어지고 초조함은 쌓여 갔다.
듀란 백작이 굳어진 얼굴로 시선을 맞췄다.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그와 함께 일리언 공작은 그 어떤 때보다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귀족파들은 솔직히 다른 건 관심이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국가나 왕가의 존속이 아닌 자신들 영지의 존속을 위해 모여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긴 하지.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일리언 공작이 다시 질문을 던지자 듀란 백작이 한층 더 낮아진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의미가 있습니다.”
“…….”
듀란 백작의 시선과 마주한 일리언 공작은 이어질 말을 기대했다. 이렇게까지 말을 꺼냈다면 무언가 이 상황을 깰 수 있는 계책이 있다는 의미일 테니 말이다.
듀란 백작이 말했다.
“공왕이 되십시오.”
일리언 공작의 머릿속에서 천둥이 울려 퍼졌다.
***
쏜튼 폴리어 백작에게 달려온 술법사가 숨도 고르지 못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필리어립니다!”
“결과는?”
쏜튼 백작이 긴장된 얼굴로 질문을 던지자 술법사가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작전 승인을 요청해 왔습니다!”
술법사의 대답에 쏜튼 백작의 얼굴로 미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그러곤 바로 그의 참모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차를 준비하게. 각하께 가봐야겠어!”
“예!”
쏜튼 백작의 방문을 전해들은 프라임 론 아가드 공작이 그를 맞이했다.
“요즘 자주 보는 것 같아. 좋은 소식이라도 가져왔나?”
“그러하옵니다.”
환한 얼굴을 하고 서재로 들어선 쏜튼 백작의 힘 있는 대답에 프라임 공작이 기대에 찬 시선을 던지며 질문했다.
“혹시 저번 그 일인가?”
“맞습니다. 고기가 미끼를 물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프라임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
시녀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금발 미녀가 거울 앞에서 연신 드레스를 가져다 대보았다 집어던지기를 반복했다.
“옷들이 다 왜 이래?”
“예?”
금발 미녀의 투정에 시녀들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금발 미녀가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대꾸했다.
“너무 점잖은 거 같지 않니?”
금발 미녀의 대꾸에 시녀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을 바라보았다. 점잖음과는 거리가 먼 옷들이었다.
무어라 대답할지 갈피를 못 잡는 시녀들을 대신해 중년 여인이 입을 열었다.
“거기서 더 과감하려면 가슴을 다 내놓는 게 빠를 겁니다.”
“유모, 그건 너무 과감하지 않아?”
“아시는군요. 공주님.”
금발 미녀는 바로 필리어리 왕국의 센시아 리어 공주였다.
“너무 과감하면 꼭지는 가릴까?”
“전하께서 머리를 다 밀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오호홋!”
센시아 공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유모 로잔이 잔잔한 미소로 대했다.
센시아 공주의 외모를 평할 때 필리어리 왕국의 최고로 꼽힌다.
항간에는 카말 왕국의 이실라 공녀와 더불어 대륙의 2대 미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실라 공녀가 강하고 육감적이라면, 센시아 공주는 가녀리면서도 뇌쇄적이었다.
하얀 피부에 대조되는 붉은 입술 때문일지도 몰랐다. 거기에 유난히 긴 속눈썹은 그녀의 섹시함을 더욱 증폭시켜 주었다.
“참, 그 남자도 금발이라며?”
“그렇다더군요.”
“금발 커플, 어울리지 않아?”
“전에는 금발 커플 따위는 다신 안 하신다 하셨습니다.”
“흥, 그 인간은 금발이 아니라 노란 똥색이었고!”
센시아 공주의 대답에 로잔이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 센시아 공주가 들뜬 이유는 바로 사신단을 호위하고 온다는 필리언 제라르라는 남자 때문이었다.
그가 금발의 미남자인 데다 엄청난 강자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것이다. 심지어 미혼이라는 말도 말이다.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꽤나 구체적인 정보였다.
어쩌면 사신단에서 그를 미인계로 엮어 보라는 의미로 그런 정보를 보냈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 정보를 들은 센시아 공주가 들떠 버린 것이다.
“이번에는 좀 신중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때 로잔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의견을 내비쳤다. 그러자 센시아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난 항상 신중했어.”
“그건 알지요.”
센시아 공주와 로잔의 대화를 듣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드레스를 거두어 들고 밖으로 나오며 시녀들이 한숨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신중해서 시집을 세 번이나 다녀오나?”
센시아 공주.
그녀는 필리어리 왕가의 유일한 골칫덩이였다. 그 위명 역시 자자했다.
호사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대륙에 미친년이 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카말의 이실라요, 다른 하나는 필리어리의 센시아라고.
하나는 전장의 미친년, 다른 하나는 사교계의 미친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