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982
47화 같은 만남, 다른 결과
“흠.”
“어떻습니까? 요즘 유행인 살롱입니다.”
카사 노바 남작이 환히 웃으며 필리언 제라르에게 소개를 했다.
장내는 화려한 장식들이 사방을 밝힌 불빛에 반사되어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악사들이 저마다 재주를 뽐냈고, 그 가운데 넓은 홀에는 남녀들이 서로를 붙든 채 춤을 추고 있었다. 흔하디흔한 사교살롱 같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면이었다.
스스로를 감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일탈을 꿈꾸는 이들에게 두근거림을 주게 된다.
또 한 가지, 외모에 자신 없는 이들에게는 나름 기회의 장이기도 했다.
일단 생긴 것 때문에 말도 못 붙여 보는 절망적인 상황은 없으니 말이다.
물론 절대 없는 것은 아니다. 몸매는 가면으로 가릴 수 없으니 말이다. 정확히는 부피라든지 신체의 길이 비율이라든지 말이다.
“김빠진 술 같은데?”
“예?”
제라르의 박한 평가에 카사 남작이 눈을 빛냈다.
보통 이런 말을 하면 기상천외한 문물에 대해 설명을 해 주곤 했기에 오히려 기대감이 앞섰다.
“클럽이란 걸 가 봤는데. 거기에 비하면 여긴 뭐 노인네들 노는 곳 같단 말이지.”
제라르의 말에 카사 남작이 눈빛을 반짝였다.
“클럽은 또 뭡니까?”
“뭐 음악 듣고 춤추고 술도 마시는 건 비슷한데, 분위기가 달라.”
제라르의 말만으로는 차이를 못 느끼는 카사 남작이었지만, 그는 그동안 그와 함께하며 기다림의 미학을 깨우쳤다. 닥치고 있으면 알아서 새로운 세상을 펼쳐 준다는 것을 말이다.
“일단 복장도 다르지. 아슬아슬.”
“아!”
복장에 대한 강의는 이전에 들었다. 심지어 제라르가 가지고 있는 잡지라는, 믿을 수 없는 문물을 보고 확인하기도 했다.
“음악의 빠르기도 달라. 미친 듯이 달리고 난 뒤 심장이 뛰는 것처럼 빠르지. 어떻게 보면 소음 같기도 한데, 그게 또 술 한 잔 들어가면 묘한 흥분이 있어.”
“그렇습니까?”
부드러운 선율이 흐르는 홀에 서서 설명을 이어 가는 제라르에게 카사 남작은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당연하지. 뭐라 그러는지 목소리도 잘 안 들려. 그러면 남은 건 원초적인 거지.”
“오오!”
원초적이라는 말에 카사 남작이 눈을 빛냈다.
“눈빛과 몸짓으로 상대를 부르는 거야. 거기에 중요한 것은 바로 접촉!”
“접촉!”
“그래. 손발이 닿는 그런 접촉이 아니야. 접촉의 종류로 부비부비란 게 있는데…….”
제라르의 실감 나는 설명에 카사 남작은 오늘도 신세계를 영접하고 있었다.
“그런 망측한!”
“망측하긴. 어차피 노는 게 다 그런 거지. 오히려 솔직한 문화가 그런 부분을 만들어 냈다고 보거든. 물론 뭐 약간 막 나가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는데, 조절은 알아서 하는 거지, 뭐.”
“하긴. 파티장 숲속에서 일보는 친구들도 있는 마당에…….”
“오히려 거기서는 그러다가 잡혀 공공장소 어쩌고 무슨 법이 있나봐.”
둘의 대화 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마치 작당을 하는 이들처럼 소곤거리며 킥킥 웃기를 반복했다.
“물론 그것도 적당히 해야 해. 딱 봐서 들이대도 되겠구나 하는 상대가 아니라 아무데나 들이대면 싸대기 맞기에 십상이지.”
“하긴 그렇겠군요.”
“맞아. 말은 하지 않아도 그런 눈짓과 몸짓으로 계속 대화를 하는 거라고.”
“그거 오묘할 것 같은데요?”
“오묘하지. 흐흐흐. 물론 그 동네 사람들은 놀다 죽는 게 목표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뭐 그거야 어느 세상이나 비슷하지. 다만 그 동네는 평소 뭔가가 쌓인 게 많아서 놀 때는 그렇게 노는 모양이야.”
제라르의 설명에 카사 남작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전쟁 용병들처럼 말입니까?”
“뭐 비슷할걸?”
전투 후 살아남은 것을 만끽하기 위해서거나 혹은 전투가 주는 피로감을 풀기 위해 하루를 미친 듯이 보내는 용병들이 있었다.
누구가는 피를 씻어 낸다고 한다.
그런 일을 하고나면 조금이나마 전투가 주는 정신적 피로를 풀 수 있었다. 물론 누구나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쪽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고, 이곳에 왔으니 이곳의 법칙에 따라 최선을 다 해야지!”
제라르가 눈을 빛내자 카사 남작이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으흐흐!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가지!”
둘은 당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십년도 더 된 친우처럼 함께 말이다.
“가면 하나 차이가 이렇게 크나?”
센시아 리어 공주가 투덜거리자 로잔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정확히는 가면 차이가 아니. 가면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것 때문 아니겠어요?”
그렇게 답하며 로잔이 당당히 가슴을 폈다.
풍만함으로 도드라지는 그녀를 보며 센시아 공주가 분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작은 건 아닌데. 유모가 반칙인 거야!”
“오호호!”
로잔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였다.
“그 어떤 음악보다도 감미로운 웃음소리군요.”
한 남자가 점잖은 모습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남자는 둘이었다. 그러자 로잔과 센시아는 장난스러웠던 웃음기를 지웠다. 물론 은은한 미소만은 남겨두었다.
“그랬나요?”
로잔이 기품 있는 목소리로 답하자 사내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지금도 그 감미로움이 들려오는 걸 보니 제 귀가 잘못되지는 않았나 봅니다.”
그때 옆에 있던 금발 사내가 한 걸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이야! 눈이 부시다는 게 이런 건가?”
약간은 가벼운 듯.
“가면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게 있나 봅니다.”
“어머, 그래요? 그게 뭘까요?”
금발 사내의 시선을 받은 센시아 공주가 입을 손부채로 가리며 웃었다.
“눈부신 미모.”
“너무 느끼한 거 아세요?”
“느까히게 만드는 사람이 나쁜 겁니다. 당신은 사람을 참 느끼하고 진부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으니까요.”
“진부하게요?”
금발 사내의 말에 센시아 공주가 웃으면서도 의아한 시선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금발 사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을 보면 정말 흔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어떤 말일까요?”
“사랑스럽다, 눈부시다, 아름답다, 매혹적이다, 섹시하다 혹은…….”
금발 사내가 한 걸음을 성큼 내딛으며 센시아 공주에게 가까이 와서 흐렸던 말을 이었다.
“숨 막힐 것 같은 향기가 난다.”
“훗!”
정말 흔한 말들의 연속인데, 또 이렇게 들으니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금발 사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도 금발인데 당신도 금발이군요. 이런 기막힌 우연이 또 어디 있을까요.”
금발 사내의 말에 대답하려던 센시아의 몸이 멈칫했다. 왠지 금발이 눈에 익었다.
정말 황금 같은 금발은 드물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눈앞의 사내 역시 화금 같은 금발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탄탄한 몸이 여간 단련하지 않고서야 만들 수 없는 형태였다. 또한 약간은 느끼한 이 말. 목소리.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느낌이었다.
흠칫한 그녀의 행동을 느꼈는지 금발 사내가 말을 걸다 말고 갑자기 멈추었다. 마치 그도 뭔가를 느낀 것처럼.
그 잠깐의 행동이 그녀에게 확신을 가져왔다.
그녀가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를 말했다.
“뇌전…….”
“쿨럭!”
그와 그녀가 무도장에서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
음울한 분위기에 뭔가 일이 생긴 것임을 눈치챈 부여기율이 입을 열었다.
“왜 저러냐?”
저녁에 나갈 때만 해도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나갔던 필리언 제라르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모습은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한쪽 구석에 축 늘어져 있었다.
“킁, 거 뭐냐. 가면 무도장인지 살롱인지 갔었다드라.”
“그건 또 뭔데?”
“얼굴 가리고 여자 꼬시는 데.”
삼두표의 단순명료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대답을 들은 기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또 차였다냐?”
“아냐. 요즘 저 양반 성공률 높잖아. 새로운 문물을 무기 삼아서 말이야.”
“그런데 왜? 아! 가면이니까 가면 안의 지옥을 본 건가?”
기율의 대답에 두표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그럼?”
답답하다는 듯 또다시 질문을 던지는 기율에게 두표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센시아 공주를 꼬셨단다.”
“응?”
“가면 쓰고 작업질하던 여자가 센시아 공주라고.”
“…….”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기율이 제라르를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뭐가 좀 풀린다 싶더니 스스로 똥 밟은 격이었다.
“그런데 류화는 어디 갔냐?”
“킁. 낸들 아냐. 초저녁부터 없더만.”
“그래?”
그렇게 대화를 나눈 둘은 조용히 제라르에게서 멀어졌다. 왠지 그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주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깔깔깔!”
“웃지 마, 유모.”
혼이 나가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살롱 한쪽에 늘어져 있는 센시아 공주는 한숨을 내뱉었다. 좀 괜찮은 남자다 싶었는데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있나? 자기도 와 놓고선.”
“끙.”
유모의 말에 센시아 공주가 머리를 감싸 안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복잡했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와 또 작업을 걸었다.
“오, 아름다운 그대여, 나와 함께 춤을 추지 않겠소?”
제법 근엄한 기운을 풍기는 중년 남성이었다. 그의 시선은 로잔을 향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제 일행이 조금 힘들어 하고 있어서요.”
“이런. 그런 때에는 혼자 있는 게 더 좋다오. 음악도 잔잔하고 밤도 깊어지는데 나와 함께하지 않겠소?”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로잔이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로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충 이쯤 설명하면 알아서 빠져주는 게 기본 예의인데, 무례하게 손목을 잡아끄는 모습에 기분이 나빠진 것이다.
“지나친 사양은 결례라오.”
그런데 오히려 뻔뻔하게 나오는 중년인의 모습에 로잔이 서늘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질퍽거리는 건 어느 동네 예의냐.”
그때 그녀의 앞을 막아선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떡 벌어진 어깨가 든든해 보였다.
어느새 그녀의 손목은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이런 무례한!”
“남의 여자에게 질퍽거리는 건 오지게 맞아도 할 말 없는 거 알지?”
“무슨…….”
그때 로잔의 앞을 막아섰던 남자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가면을 들췄다.
“아!”
“안 그렇습니까? 로잔?”
몽류화였다.
로잔이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그렇지요?”
두 사람을 보며 센시아 공주는 배를 움켜잡았다. 말 그대로 배가 아팠다. 같은 장소에서 만난 건 같은데 결과가 너무도 달랐다.
중년인은 부르르 떨며 자리를 벗어났다.
“이런 곳에서 만나니 또 색다른데요?”
“저도요.”
둘을 보며 센시아 공주는 혀를 찼다.
정말 뻔뻔한 커플이었다.
로잔의 손을 이끌며 류화는 속으로 제라르에게 감사인사를 보냈다. 사실 좋은 데가 있다고 놀러가는 둘을 따라왔었다. 유흥이라면 류화 역시 빠지지 않는 이였기 때문이다.
그때 제라르가 센시아 공주와 조우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 뒤로 류화는 사냥꾼처럼 기다렸고, 기회를 얻었다. 그게 제라르와 류화의 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