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mal agent of steel RAW novel - Chapter 988
53화 자살하는 방법
“오해를 받기 싫다?”
“그런 이유입니다만…….”
바사 론 카말 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신단이 머무르는 기간은 단 3일이었다. 그마저 오늘 도착했고, 가는 날을 빼면 단 하루다.
그 기간이면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이기는 했다. 그러나 반대로 전쟁을 앞둔 국가끼리의 만남이었기에 길 필요도 없기는 했다.
물론 단순한 전쟁선포를 위한 사신단 방문이라고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기간이지만, 시에라 제국이 어디 그런 요식행위를 할 이유가 있는가?
없다.
이미 요식행위는 오래전에 지났고, 엄밀히 따지면 지금은 그저 잠시간의 휴전 기간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이들이 이렇게 머리를 굴리는 이유는 뭔가 꾸미는 것이 있지 않나 하는 고민 때문이었다. 고민은 길어졌지만 딱히 걸리는 부분은 없었다.
필리어리 왕국 쪽에서 뭔가 첩보가 있는 듯했지만 그 역시 자세한 내용이 오지는 않았다.
“쯧,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영…… 어떤가?”
바사 왕의 질문에 쉬람 마쟐 공작이 슬쩍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오면서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솔직히 그놈들이 우릴 보자고 왔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속 편히 생각하십시오. 얼굴이나 보고 대충 똥배짱도 부리시고…….”
쉬람 공작의 말에 바사 왕의 얼굴이 환해졌다.
“평소대로 하라는 거네?”
“예. 지르고 싶으면 지르십쇼. 뭐 제국 입장에서 전쟁을 아예 안 한다면 모를까, 이미 준비 중인 거 뻔히 아는데 우리만 빼준다고 해도 그건 이미 망조가 든 거잖습니까.”
“그렇지. 혼자 남아 봐야 별거 없고 야금야금 말라죽겠지. 혹시 그런 거 아닐까? 그래도 니들은 보존해 줄게 하고 각국에 사신단을 보내서…….”
“쏜튼 백작이야 그럴 만한 위인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대 놓고 사신단을 보냈잖습니까. 그런 건 원래 뒷구멍 밀실에서 노닥거리며 좀 댕기고 밀고 하는 거고 말입니다.”
“하긴 그건 그렇지.”
“가우리 양반들은 태연한데 우리만 쫄면 그것도 보기에 안 좋습니다.”
“쫄긴 누가 쫄아?”
바사 왕이 버럭 소릴 지르자 쉬람 공작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면 말고 말입니다. 그렇게만 하십시오. 터그람 왕국과 전쟁하면서 많이 위축되셨는데, 그렇게 하시는 게 더 우리 왕답습니다.”
평소 불퉁거리던 쉬람 공작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바사 왕을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더 뻘쭘한 바사 왕이 머쓱해졌는지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건 좀 미안해.”
“뭐 말입니까?”
“카마쉬. 니 아들.”
카마쉬 마쟐의 이름이 나오자 쉬람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국시절 바사 왕의 하나밖에 없는 여식에게 장가보내서 신분상승을 노렸던 쉬람 공작으로서는 계웅삼의 등장이 쓰디쓴 결과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이내 펴졌다.
“하지만 그 덕에 우리가 안 망했잖습니까. 사실 그쪽과 어느 정도 혈연이 필요하고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뭐 이실라 공주가 딱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리 생각해 주면 고맙고.”
“뭐 제가 봐도 인물은 몰라도 이 난세에 실력 하나는 확실한 이가 바로 계웅삼 경이니, 뭐 그 선택에 뭐라 하기도 힘들고 말입니다.”
“그건 그래. 사실 그 실력 탐나거든.”
“예. 게다가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막말로 이실라 공주의 성격이 조금만 좋았어도 제가 카마쉬 멱살을 잡아서라도 자빠트리라 했을 겁니다.”
“자빠트려? 카마쉬가?”
바사 왕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쉬람 공작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꾸했다.
“자빠지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뭔 생긴 건 왕비님을 닮았는데 검술 실력이나 성질머린 지 애비를…… 큼, 전하를 닮아서 말입니다.”
“…….”
바사 왕이 주먹을 말아 쥐는 모습을 보였지만 쉬람 공작은 칠 테면 치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면서 이 정도 말도 못 받아 줍니까? 잊으셨나 본데 전하를 처음에 공왕으로 추대한 건 접니다. 오히려 제가 지지가 더 많았다는 건 아시지요?”
“큼…….”
바사 왕이 주먹을 슬그머니 풀었다.
사실 이 지역의 패자는 바사 왕이 맞았지만, 실제 세력은 쉬람 공작이 더 컸다.
그의 특유의 외교력과 친화력으로 영주들과의 유대가 돈독했다.
물론 바사 왕도 화통한 면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반대로 머리가 나쁘다는 평이 있어 영주들이 조금 저어하는 모습이 있었다.
그때 그를 공왕으로 추대한 건 쉬람 공작이었다.
바사 왕은 당시 쉬람 공작이 영주들에게 한 말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랬지.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못 배워서 모르는 거라고 말이지.”
“뭐 검만 드셨으니 당연하잖습니까.”
“그때 아는 거 모자라는 건 자네가 채운다고 설득했지.”
“뭐 글만 배웠으니 당연하잖습니까.”
쉬람 공작이 따박따박 대답했다.
그러자 바사 왕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둘이 딱 섞인 군주였다면 이 나라 백성들이 개고생은 안 할 건데.”
“그런 군주였으면 일통했습니다.”
“크크크, 그렇겠군.”
쉬람 공작의 말에 바사 왕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때 쉬람 공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천재가 아니잖습니까. 그나마 각자 하나씩만 파서 둘이 이 정도 해 온 거고 말입니다.”
“그래,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예.”
“그때 혹시 내가 딸만 있으니까, 처음부터 나 밀어 주고 자연스럽게 아들내미를 밀어 넣어서…….”
바사 왕이 게슴츠레 바라보자 쉬람 공작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이것 보십시오. 전하는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니까요?”
쉬람 공작의 말에 바사 왕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나서 쉬람 공작에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알아둬.”
“뭘 말입니까.”
“내가 전장에서 항상 선두에 설 수 있는 건 자네가 있어서라고.”
“…….”
어떻게 보면 공왕이 되기 전과 된 후의 바사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공왕이 되기 전에는 전장에서도 많은 것을 염두에 두고 무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공왕이 된 후에는 미친놈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전장의 선두에서 날뛰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한숨도 많이 쉬었지만 정작 이런 소릴 들으니 쉬람 공작은 왠지 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지요. 제가 여기 이인자잖습니까. 바로 딱하니 차지했을 겁니다.”
“그래. 자네니까. 그러니 말이야…….”
바사 왕이 다시 쉬람 공작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잠시 흐렸던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
바사 왕의 말에 쉬람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잘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쉬람 공작에게 바사 왕이 다시 말했다.
“이 나라를. 불쌍한 우리 백성들을 말이야. 그리고 나도 말이지.”
“…….”
쉬람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은 이것 때문이었다. 자신은 이렇게 하지 못할 것을 아니까 말이다.
아마 불리해지면 생존을 위해 시에라 제국의 그늘로 들어가는 걸 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를 공왕으로 추대했던 것이다.
침략자인 시에라 제국으로부터 마지막 하나의 양심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어쩌면 바사 왕의 그늘로 숨은 건 그였다.
목이 잠기는 것을 느낀 쉬람 공작이 바사 왕에게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왕 오래도록 해 먹어야 하잖습니까. 기왕이면 전쟁이 끝난 세상에서도 말입니다.”
“흐흐흐. 그래야지.”
“그럼 내일 준비하러 이만 먼저 나가겠습니다.”
“준비는 무슨.”
“아무리 그래도 사신단 아닙니까? 연회는 아니어도 격식은 차려야지요.”
“클클, 알아서 하게.”
쉬람 공작은 바사 왕의 웃음소리를 뒤로하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왠지 늙은 나이에 주책없게 눈물이 흐를 거 같았기 때문이다.
“늙었어. 저 양반도…….”
그리고 자신도 말이다.
***
사신단 숙소를 경호하는 그린 베이커 백작은 기사단의 보고에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뭔가.”
“별건 아닙니다만…….”
말끝을 흐리던 경비를 서던 기사가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그린 백작이 잠시 멈칫했다. 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조금 아까 왔습니다만 저렇게 멀거니 바라보거만 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보고를 드린 겁니다만.”
“아무것도 안 하고?”
“예. 그냥 구경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냥 구경하듯 바라본다는 말에 그린 백작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천하의 패자인 시에라 제국 사신단이 구경감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린 백작은 불쾌함에 기세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멀거니 구경하던 그 사내가 고개를 돌려 그린 백작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
눈 깜빡할 새.
매우 짧은 순간을 뜻하는 수식어가 딱 맞았다. 별 표정 변화도 없이 슬쩍 보고는 다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명백한 무시였다.
“으음.”
그린 백작이 이를 악물었다.
살기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기세를 쏘아 보내었는데 이렇게 무시를 당했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이 이상의 행동을 하는 것은 어려웠다. 더군다나 저 사내는 가우리의 인물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사실 이쪽도 그쪽이 신경 쓰여서 온 것이기에 가우리도 시에라 제국을 살피러 올 수 있다. 다만 저렇게 대 놓고 살피는 게 기분이 나쁜 것이다.
“가우리라는 곳의 풍습이 많이 다른 것 아닐까요?”
“그럴까.”
“오는 내내 가우리의 고위 인물들이 보인 행동을 보면 약간 거친 느낌이 있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사신단을 맞이하는 모습이 아니었지.”
“마치 북방의 야인들과 느낌이 비슷했습니다.”
“그래서인가…….”
그린 백작은 상대방을 안중에도 없다는 저 행동이 그런 문화적 차이에서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다시 시선을 마주쳤다. 하지만 또다시 외면당했다.
사실 마주친 거라기보다는 되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며 잠시 스친 것뿐이었다. 다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큭!”
그린 백작이 이를 갈자 기사들이 그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말을 걸었다.
“참으십시오. 보아하니 저쪽 무장 같은데 전장에서 보지 않겠습니까?”
“내 반드시 카말 지역 공략에 나설 것이야.”
“그때 저 재수 없는 대가리를 잘라다가 굴리면 되겠습니다.”
“큭큭큭.”
기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멀어져 가는 등을 바라보며 그린 백작이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 칼 앞에서도 그리 시선을 돌릴 수 있나 보자.”
계웅삼이 한가롭게 걸어오고 있는 고진천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구경.”
“시에라 제국 사신단 말입니까?”
웅삼이 되묻자 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진천에게 웅삼이 물었다.
“뭐 말 좀 섞으셨습니까.”
“그냥 구경만 했지.”
“그렇습니까?”
“그랬더니 내 목을 잘라다가 굴린다더군.”
“…….”
그 말을 내뱉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진천을 보던 웅삼이 시에라 제국 사신단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